한국 땅에서의 캐나다 선교의 시작은 맥켄지의 헌신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신학교를 다니던 중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인 100달러를 캐나다장로교 선교부에 내 놓으면서 한국에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선교부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맥켄지는 독립선교사로 1893년 12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맥켄지는 한국말과 풍습을 빨리 배우기 위해서는 외국인 사회를 떠나 한국인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서울을 떠나 황해도 솔내로 옮겨가서 한국 사람들이 사는 집에서 한국음식을 먹고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살았다. 이런 맥켄지의 태도는 한국인들에게 큰 호감을 주었다. 크리스마스때에 언더우드는 맥켄지를 위하여 빵,과일,야채,차,의복,음식 등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버리면서 “내가 만일 이것들에 맛들면 다시는 한국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맥켄지의 마지막일기에 의하면 그는 8개월 동안 외국인을 한 사람도 보지 못하고,영어 한마디 쓰지 않고 지냈다.


이런 생활이 맥켄지의 정신과 육체를 쇠약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1895년 6월 22일의 일기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이대로 죽어서는 않된다는 생각이 든다. 땡볕 가운데 여행했고,밤늦게 차가운 이슬을 맞으면서 설교한 것이 나의 실수였다”


며칠 후 맥켄지는 소래교회의 신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은 이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서 왔으며,죽으면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시체는 교회 옆에다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이렇게 해서 젊고 유능한 선교사 한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맥켄지가 죽자 소래교회 신자들은 캐나다장로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해달라는 진정서를 보냈다. 이렇게 해서 캐나다장로교회는 한국에 정식으로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맥켄지의 방식이 옳았는지 질문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맥켄지가 한국을 사랑했고,복음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려고 했던 정신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3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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