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지금, 그리고 부흥을 위한 개혁-1

  -이 스데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먼저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알고, 믿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연구함으로 진리를 고집하며, 그것만을 설교하는 희귀한 설교자들입니다. 그들은 물질위주로 돌아가는 세속화된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온전히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며,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모든 현실 가운데 입체적으로 적용시키는 영감된 설교자들입니다. 그들은 소명, 칭의, 중생, 양자됨, 성화, 견인, 영화등과 같은 기본적이지만, 오늘날에는 가르치지 않는 필수적인 교리들을 지속해서 캐고 가르치는 소수의 설교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영혼구원에 진정한 열심이 있는, 그러므로 성경적 부흥에 대해서 항상 꿈꾸는, 따라서 이 부흥이 공동체 전체를 덮을 때 일어나는 개혁과 변혁까지도 바라보는 매우 열정적인 설교자들입니다. 이들은 다만 이전에 있었던 부흥이야기들이 신화가 아니라 지금도 또 다시 가능한 살아있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믿으며 갈망하는 신실한 설교자들입니다.

당신이 위와 같은 설교자라면, 아래의 글들은 아무런 가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지금 그 길로 그대로 가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옛 방식의 설교자가 아니라면 아래의 글을 읽어야만 하며, 그 후 자신이 진정 부름받은 설교자인지 숙고하고, 만일 아니라면, 자신을 위해서 물러나야 하며 또한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물러나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라 함은, 설교자가 받을 엄청난 중량의 심판과 저주를 피하기 위한 것이며,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라 함은, 함께 멸망의 길로 들어서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만일, 옛 설교자의 전형을 회복하기 위한 강렬한 열망이 재생됨을 느낀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이 일에 자신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당신이 위에서 언급한 소수의 설교자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글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복음을 개발한 한국교회
역사적 문화적 고찰을 떠나서, 우리가 지금 흔하게 듣는 새로운 복음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헌금 많이 하는 대로 많은 축복을 받는다. 예수 믿으면, 사업 확장되고, 아파트 평수 넓어지고, 물질 축복받는다.” 대체로 이런 류의 것들입니다. 매우 흔하게, 어디에서든 쉽게 들을 수 있는 사기꾼들의 전형적인 이야기 방식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도 피상적이나마 1년에 서너번 이야기를 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전부임을 거부하며, 성경에서 모든 것을 추출해 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 통치하심, 다스리심과 인간의 사악함을 온전하게 드러내기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사실상 전혀 두려움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지 않고 해석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가치와는 동떨어진 적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설교가 무엇인지 모르며, 진정한 설교를 해 본적도 없으며 따라서 설교단에 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다른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마련입니다. 온정주의, 따스함, 교인수 늘리기용 방법론, 세속적인 심리학과 인간중심적 철학,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성경을 캐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피하기 시작할 때 위와 같은 것들이 자연스레 흘러들어 오며, 혼합주의를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없지만, 음악은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없지만, 뜨거움은 있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경외감은 없지만, 예배의식은 있습니다. 중생이 무엇인지 듣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사람에게 3분간의 간단한 문답을 통해 세례는 주어집니다. 오늘날 교회가 지키는 세례예식은 그 의식은 같지만 본질은 옛날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전의 세례는 (유아세례를 제외한다면) 구원의 고백과 그 열매가 뚜렷하여 거룩한 공교회의 일원으로서 합당하게 여겨질 때, 즉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와 자매로써 불려지기 합당할 때 주어졌습니다. 교회안에서 형제 혹은 자매는 거듭난 신자로써 맏형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업을 받을 자격을 갖추었다는 영광스럽고 가장 고상한 호칭입니다. 요즘은 개인적 회심의 과정은 생략하고, 인스턴트식 세례를 치룬 사람들을 곧장 각종 양육과정으로 인도합니다. 새로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을 양육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입니다. 그리고 각종 교회적 문화와 친교를 통해 교회생활이 주는 일정한 종교적 안도감을 누리면서 유사복음에 마비되어 갑니다. 세례예식은 더 이상 예식이 아니며 세례교인 늘리기식 도구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함으로, 심지어 성만찬을 더럽히는 죄까지 범하도록 인도해 냅니다. 예식사를 읽는 것으로 성만찬을 거룩하게 하려고 애쓰지만, 정작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그 의미를 깨달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성만찬에 참여할 자격을 세례교인으로 제한한다면, 세례는 당연히 중생의 씻음에 대한 증거가 분명한 사람으로 제한해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에 의한 분리입니다. 거듭난 자는 그렇지 못한 자와 완전히 다르며, 함께 모여 있지만 섞일 수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우리는 세례와 성만찬의 순결성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성만찬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강권적으로 부흥을 일으키신 옛 일들이, 오늘날 중단되어진 것 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제 밝혀졌습니다.

이전에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마저, 분별할 힘을 잃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도 듣는 자도 함께 멸망의 길로 나아가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구원의 주체인 성령 하나님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새로운 복음을 우리는 듣고 가르치며 함께 멸망의 길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있지도 않은 새로운 복음의 개발과 적용을 중단해야 하며, 원래의 복음, 성경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사야 2장 8-9절은, 따라서 지금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옛 부흥과 새 부흥
옛 부흥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된 성경의 입체적 강해, 죄에 대한 깊은 인식, 회개와 기쁨의 찬양,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기도모임, 구령열정에 기초한 전도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 결과로 사회적 변혁이 일어났고, 불신자들은 영적 부흥을 통해 일어난 높은 도덕적 가치관과 순결한 삶에 의해 압도되었습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에 기초를 놓았던 스코틀랜드와 미국과 캐나다와 호주의 선교사들은 바로 이러한 부흥을 경험하고, 선교사로 자원하여 미지의 땅, 조선으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불신자 초청 전도잔치, 치유사역자 초청 전도집회, 방언받기 모임, 태신자 초청 잔치, 구도자 예배, 알파코스, 긍정적 사고, 목적이 이끄는 삶, 사영리, 교회성장 세미나, 이와 비슷한 류의 것들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부흥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교인수의 기하급수적 증가에 의한 헌금 확보, 교회 건물 확장, 갖추어진 찬양밴드를 통한 멋진 예배, 축복을 통한 사업의 확장, 넓은 평수로 아파트를 옮기는 것, 더 많은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물질적 지원,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부흥은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부흥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것들이 부흥의 결과로 파생되었더라도, 진정한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위의 결과들을 부흥으로 간주하거나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분리와 순결함
과학자들은 어떤 새로운 물질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함께 생긴 부산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정제과정을 거칩니다. 많은 경우에 크로마토그래피법을 사용합니다. 칼럼 안에는 충전물이 채워져 있고, 혼합물을 그 안에 넣어서 압력을 주면, 부산물은 걸러지고, 얻고자 하는 순수한 물질이 분리됩니다. 이 분리(separation)는 바로 정제(purification)의 결과로 주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얻어진 순수한 물질은 그것을 얻고자 했던 과학자에게 비로소 큰 기쁨을 선사합니다.

성서조선 98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데, 참으로 옳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거대한 사업의 성취나 신령한 사업에 헌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다. 그가 아무 사업도 성취한 것 없이 그리스도와 같이 무참하게 패배하는 것으로 세상 삶을 마친다 할지라도 좋다. 참다운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와 함께 걷고 함께 생각하며 함께 힘써 일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희망은 오로지 그에게 달렸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살전 4:3). 우리는 무언가 많은 일의 성취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리려는 비성경적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이것은 죄로부터의 분리에서 비롯됩니다. 분리(separation)는 언제나 참여(participation)를 전제로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격리되도록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세상 안에 살지만, 그러나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끊임없이 차단시켜야 합니다. 이 과정은 우리 자신을 순결하게하는 (purifying) 과정이며, 말씀의 충전물을 통해서 오염물들을 계속해서 걸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세상 안에서 세상과 분리되며, 그 분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드러내며, 이 죄와 분리된 거룩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오염을 걸러야만 하는 충전물이 깨끗하지 않다면, 즉 말씀을 잘못 전달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오늘날 우리가 항상 접하는 새복음 즉 유사복음이 과연 오염을 걸러 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결과적으로 죄와의 분리가 아니라, 죄와의 결탁을 통해서, 더 이상 우리가 순결한 삶을 살도록 도울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더 이상 타락할 수 없도록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동성범죄는 일반적인 뉴스거리가 되어가고 있고,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할 경찰의 타락은 더 이상 충격을 주지 않고 있으며, 청소년들의 엽기적인 행동도 사회적 심리학적 시각에서만 다루어질 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휩싸고 있는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는 거듭나지 않은 인간의 완전 부패성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충전물 (말씀, 복음)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분리와 순결함에서 오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개혁의 시간이 무르익은 것입니다!


비이성과 소위 개혁 그리고 기도모임의 가치
위에서 대충 드러낸, 우리가 멋지게 고안해 낸 새복음의 폐해는 사실상 더욱 자세하고, 처참한 형태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우리는 지금 이것을 정교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우리의 잘못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생긴다면 되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개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의 기초를 먼저 언급하고자 합니다. 마틴 루터는 개혁의 시간 안에서, 할 일이 많아지자 하루 두 시간 기도를 네 시간으로 늘려야만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하루에 네시간 기도하지 않는 설교자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맡은 전임 사역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옛 선배들로부터, 기도의 기초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개혁이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며 이루시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개혁을 위한 행동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져야 함을 알았고, 따라서 그들은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설교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친히 역사하셨으며, 그 결과는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개혁의 절대적 필요시기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를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불과 30-40년 밖에 되지 않은 현대적 기독교의 세속적 전통에 사로잡혀, 초대교회 이후로 면면히 흘러내려오고 있는 진정한 복음의 회복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것이 현대적이고, 잘 짜여져 있고, 부담이 없고, 30-40년 동안 거부감 없이 한국교회 전체에 잘 적응되어진 것이며, 항상 완전한 것은 없었으므로 약간의 세속적인 수용도 이제 필요하다는 인식이 팽배하여 수정과 개혁에 대해서 필요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개혁을 통해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 그냥 그대로 가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리를 통한 순결함을 잃어버리고도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비성경적 태도이며, 항상 개혁을 위해 힘써왔던 용감했던 신앙의 선배들의 유산도 팽개쳐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 이러한 비이성적이고, 소심하고, 용기 없는 상태에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둘째로, ‘소위 개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진정한 복음의 진수를 드러내고 그것을 통한 교정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는 심히 둔감한, 따라서 파괴적일 뿐 다시 세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거나 매우 부족한 형태입니다. 문제를 드러내는 것은 반드시 그것의 회개와 수정을 통한 회복을 실재적으로 추구할 때에만 진정한 가치를 발하게 됩니다. 문제를 드러내기 전에 우리는 항상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셋째로, 기도모임의 가치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에 간단하게 쓴 것은 기도모임을 중단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성경적인 충격을 가해서 기도모임을 더욱 활성화시키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먼저 밝힙니다. 무슨 기도할 제목이 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기도모임의 가치가 발생하는 것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렇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있는데도, 단지 모여서 같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구하기만 해야 할까요? 물론, 끊임없이 간구해야 할 것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할 때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믿음과 함께 갑니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복음의 확장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이 기도가 성경적인 것을 알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신 다는 믿음이 따라갑니다.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기도는 중언부언이 되며,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어떤 가상의 신에게 무언가를 비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기반으로 합니다. 둘째,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즉, 우리 안에 가득한 죄악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믿음으로 기도해 왔는데, 왜 아직 통일의 문은 열리지 않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단순히 우리의 기도의 분량이 차지 않아서 입니까?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기도의 분량이 작다고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살필 이유가 생깁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유 1:20).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비추고, 또한 우리 공동체를 비추어서, 우리 안에 합당하지 않은 요소들을 제거함으로, 성령께서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인도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통일을 위해 기도 한다면, 자신과 기도하는 공동체와, 우리 남한교회 전체의 영적상태를 성경에 비추어 보아야만 합니다. 깊은 눈물의 통곡과 회개, 남한교회의 선개혁이 없이 하나님께서 통일의 문을 여실 수 없는 이유가 이제 보다 더 분명해 졌습니다. 우리가 성령안에서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아와 공동체와 한국교회의 영적 각성과 개혁을 위해 부르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셋째, 기도는 행동을 수반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한교회의 부흥과 남북의 평화적 통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알고 있으므로, 그 때를 위해 지금 준비를 해야합니다. 남한교회의 개혁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통일시기에 필요할 것들을 예상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흥과 통일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기도만능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세가지 요소들을 기도모임 안에서 면밀하고 치밀하고 끈질기게 반영시키기 시작할 때, 먼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영적 각성과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 호에서는 개혁의 실천과 적용을 위한 주제로서 사영리 수정을 시작함, 젊은 신학도들에게, 전국의 신학교 교수님들께, 제임스 패커-옛길 찾기의 창(window)과 같은 내용들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 원고는 북한사랑 2010년 8월호에 투고되었습니다.

  • 기자명 이 스데반
  • 입력 2010.07.0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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