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속의 성결-오순절운동


Holiness-Pentecostal Movement in the History

of Korean Church 

배 본 철


목 차


1. 서론

2. 성결-오순절운동의 이해

      1) 성결                       2) 미국적 부흥운동

      3) 케스윅             4) 불세례

      5) 방언                       6) 신유

      7) 종말론

3. 재래적 심성의 영향

      1) 이기주의          2) 타계주의

      3) 의타주의          4) 권위주의적 계율주의

      5) 기도만능주의              6) 신선의식

4. 성결-오순절운동의 한국적 도입과 그 갈등

    1) 성결운동의 도입

      2) 오순절운동의 도입

      3) 성결-오순절운동의 갈등

5. 결론; 성결-오순절운동, 그 한국적 전개를 위하여

참고문헌




1. 서론


21세기를 맞이하는 한국 개신교계는 교회 성장의 둔화에 대한 지적과 함께 교회의 질적 성숙화에 대한 논의에 여느 때보다도 더욱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특히 저급(低級)한 교회의 윤리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성화(聖化)에 대한 논제가 최근 교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1) 이같이 성령의 성화 사역에 대한 강조가 범교단적으로 고조되는 사실은 앞으로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강조점과 그 향방이 성결론을 지향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결정짓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같은 성령운동의 무게 중심의 변화가 가장 크게 일어나고 있는 곳은 오순절 그룹이라는 점이다. 오순절운동이 지난날에는 주로 방언과 ‘은사 받는 운동’의 수준을 맴돈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왔으나, 오늘날에는 국내 복음적인 성령론의 발전을 거의 주도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순절운동의 신학적, 역사적 뿌리를 찾는 작업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한 예로, 오순절신학회 창립기념 논문발표회에서 박 명수 교수는  ‘오순절운동은 19세기 성결운동에서 시작되었으며 미국의 종교-문화적 배경 안에서 성장한 것’이라고 밝혔다.2)

이같은 현상은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의 역사적 연관성과 동질성을 명백히 확인하는 일이며, 따라서 앞으로는 국내에서 성결신학자들과 오순절신학자들간의 더욱 긴밀한 유대가 가속화되어질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성결-오순절운동의 핵심으로서의 성결론은 더욱 범교단적으로 요청되어지게 될 전망이다.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의 성격을 형성함에는 외래적인 신학과  신앙의 요인의 영향을 물론 빼어놓을 수 없지만, 그 재래적인 요인으로서는 한반도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재래 종교의 유산이 한국인의 심성에 미친 현저한 영향을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한국교회 성령운동사에 미친 재래적 심성의 영향은 실로 커서, 외래적인 성령신앙을 재래적 심성의 틀 속에서 녹여서 나름대로의 특유한 한국적 성령운동의 양상들을 만들어 놓게 된 것이다.

본 연구는 위에서 언급한 성결-오순절운동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를 먼저 다루고, 이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한국적 심성의 여러 요인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한국적 상황에서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과 그리고 재래적 심성의 세 동기가 어떤 갈등을 표출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를 통해 얻어지게 되는 성결-오순절운동의 바람직한 향방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2. 성결-오순절운동의 이해


한국교회사 속의 성결-오순절운동의 태동과 그 전개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오기 전 북미와 유럽의 상황에서 숨가쁘게 전개되어온 성결-오순절운동의 흐름을 먼저 이해하는 일을 전제로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북미와 유럽의 성령운동사를 살펴보면서, 본 연구자는 지금까지 한국교회 내에서 일어났던 여러 성령운동들의 유형적 모델들을  역시 찾아볼 수 있었다.


1) 성결

감리교의 창시자라고도 불리는 John Wesley야 말로 근대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의 영적 그리고 지성적인 아버지라고 본다. 그의 일기(Journal)라든가 설교문들 속에서 나타나는 신학은 후대 개신교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감리교도들의 교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혼의 종교적 경험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같은 구원의 경험적 확신에 강조점을 두는 입장은 Wesley와 그의 후계자들을 통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것이다.3)

Wesley의 구원론은 다음과 같다. 신자가 경험하는 구원의 과정은 두 단계이다; 첫째는 회심 또는 중생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또는 성결이다. 첫째 체험에서 신자는 그의 자범죄를 사함 받는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유전된 죄성은 남아있는데, 이는 제 이차적 은총인 성결의 은혜에 의해 제거 받는다는 것이다.

감리교도들이 미국 땅에 이주하게 될 때 온전한 성결의 교리도 따라서 미국 교계에 전파되었다. 1784년에 Francis Asbury와 Richard Wright가 Wesley에 의해 파송을 받아 미국 땅에 미국 감리교회(American Methodist Church)를 조직하게 되었다. 파송 전에 Wesley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감리교도들이 미국 땅에 늘어나게 되는 것은 필경 미대륙을 성결의 능력으로 개혁하기 위한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2) 미국적 부흥운동

미국의 부흥운동은 Jonathan Edwards로부터 Charles Finney에까지 이르는 전통 속에서, 그리고 웨슬리안 완전주의는 미국 감리교도들의 전통 속에서, 이 두 가지의 운동은 서로 상대편의 강조점을 취하여 새로운 통합을 이루어 나가는 식으로 발전을 이루어 갔다. 미국에서의 부흥운동은 한마디로 ‘미국적’인 것과 ‘성결적’인 것을 모두 지니고 있다.

미국의 자유로운 교회 체제는 부흥운동의 발생을 용이하게 해주었고, 완전을 추구하는 경건주의적 기질과의 만남 속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미국의 부흥운동의 성격이 형성되어갔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기본적 원리는 모든 신자들에게 즉각적인 의무로서의 회개를 강조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부흥회 때 복음적인 회심을 즉각적으로 촉구하는 부흥강사의 요청이나, 성결운동에서 온전한 성결을 얻기 위해 즉각적인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전도자의 메시지는 서로 자연스럽게 통하게 된 것이다.


3) 케스윅

케스윅(Keswick) 신학은 미국 성결운동과 미국 부흥운동 사이의 중간적 위치를 지니고 있다. 토레이와 무디에 반대하여 케스윅 교리는 죄에 대한 해결로서의 두 번째 축복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성결운동의 가르침인 완전주의를 회피했다. 케스윅파와 성결운동파가 서로를 향해 퍼부은 별명을 통해 이 두 파간의 중요한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죄된 본성과 관련하여 성결파 교사들은 ‘근절론자’(eradicationist)라고 불리웠고, 반면에 케스윅 교사들은 ‘억압론자’(suppressionist)로 불리웠다. 케스윅 교리는 다른 그룹의 교리들처럼 명확하지 않고, 심지어 ‘두 번째 체험’의 확실성마저도 종종 제한을 받았고 억제되었다.

그러나 케스윅은 무디에 의해 미국에 역수입되었다. 미국의 케스윅운동가들로 알려진 심프슨(A. B. Simpson) 및 고든(A. J. Gorden)과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심프슨은 사중복음(Four-Fold GOspel)을 새롭게 주창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심프슨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 성결케 하는 자, 치료자, 다시 오실 왕으로 보는 사중의 사역으로 개진하는 쪽으로 발전시켰다. 심프슨은 순간적 헌신 또는 철저한 복종을 통해 예수의 인격적 내주를 가져옴을 시사하는 용어들을 많이 사용하였다.


4) 불세례

1895년에 Benjamin Hardin Irwin은 성경과 함께 John Wesley의 가르침 그리고 특히 John Fletcher의 글을 탐독하였다. Fletcher의 표현 중에서 ‘불타는 사랑의 세례’, ‘성령과 불에 의한 세례’, ‘불세례’, ‘하늘로부터의 능력을 받음’과 같은 말을 그는 마음에 받아들였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일생에 걸쳐 여러 번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Fletcher가 한 말 등에 착안하였다. 그래서 Irwin은 ‘성령과 불에 의한 세례’ 또는 단순히 ‘불’이라고 일컫는 성결 체험 이후의 ‘제 3의 체험’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같은 Irwin의 가르침은 1890년대 성결운동의 하나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성결운동의 주류를 인도하고 있는 지도자들은 이들을 ‘제 3의 은총 이단’(the third blessing heresy)이라고 혹평하였다.4)

불세례성결교회는 현대 오순절운동의 시작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해준다. 성령세례는 성결 체험의 후에 나타나는 다른 체험이라고 가르친 것은 나중에 파함(Charles F. Parham)이 칸사스의 토페카(Topeka)에서 1901년에 오순절운동을 시작하게 된 교리의 전제가 되었다. 사회적, 교리적, 그리고 지성적 의미에 있어서 볼 때, 불세례성결교회는 현대 오순절운동의 직접적인 선구자 역할을 해주었다.


5) 방언

방언을 성령세례 받은 단 하나의 증거라고 최초로 강조하기 시작한 사람은 파함 목사였다. 현대 오순절운동의 교리적이고도 경험적인 기초를 수립한 사람도 역시 그였다.5) 이같은 오순절운동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결운동의 자녀라고 할 수 있다. 실제적으로 모든 초기 오순절운동의 지도자들은 제 이차적 은총으로서의 성결의 확고한 옹호자들이었으며, 그들은 단지 이 위에다가 오순절적 세례로서의 제 3의 은총인 방언을 더한 것뿐이다.


6) 신유

신유(Divine Healing)에 대한 심프슨의 주요 저서는 「치유의 복음」(The Gospel of Healing)이다. 이 책은 본래 논문선집이었는데 선집되기 전(1885년)에 이미 널리 배포되었다. 그의 접근방법은 그 문제에 관한 그의 저서들 가운데서도 특히 그의 후기 작품인 「육신의 주님」(The Lord for the Body)에서 보여지듯이 그리스도와 그의 ‘완전’이 성화와 치유 모두의 핵심이라는 데 초점을 맞춘 것 외에는 당시의 다른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죄의 근절’과 같은 문제를 피함으로써 심프슨의 관심의 일부분은 ‘적극적인 면을 강조한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신유를 강조하는 것이 성결운동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는데, 특히 강력히 추진력이 강했던 보다 극단적인 모임들에서 더욱 그러했다. 성결운동의 등장 이래로 신유는 더 이상 논쟁의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고 갓베이(W. B. Godbey)는 말했다. 또한 그는 교회가 각성하고 온전한 성화의 높은 경지를 향해 계속 나아갈 때 전능하신 치유자에 대한 인식이 신약시대처럼 일반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오순절운동과 치유운동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리노이주 시온 시의 도위(John Alexander Dowie)가 오순절 치유교리의 주요 근원이라고 늘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치유론이 이미 도위 이전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크게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도위가 성결의 맥락에서 치유론을 끄집어냈으며 동시에 치유론에 약간만 다른 신학적 배경을 제공해 주고자 하는 경향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르침이 급진화된 성결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너무나 간과하고 있다.


7) 종말론

19세기 말 성령론으로의 전환은 대체로 당연히 종말론으로의 전환과 관련이 되어있다고 아주 쉽게 주장할 수 있다. 청교도주의와 경건주의의 영향에 있어서, 청교도의 종말론은 교회의 ‘마지막 날의 영광’ 혹은 ‘종말이 오기 전에 그리스도인의 관심이 번영하는 상태’가 올 것을 대망하였다. 오순절적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날의 영광은 항상 성령의 특별한 부으심과 관련해서 이해하였다. 점차적으로 이 견해는 오늘날 우리가 ‘후천년주의왕국설’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기울어졌으며, 이 시대를 계시록 20장에서 나타나는 천년왕국과 동일시했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했지만 임박하게 오실 것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웨슬리의 구원론은 이 세상에서 경험한 구원과 아직 다가올 영광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실현된 종말론’이었다. 그러나 프레처의 종말론적 강조는 결정적으로 비웨슬리안적인 어조를 가미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자신의 세대에 있지 않으면 그 다음 세대에는 있게 될 것이라고 고대하였다. 그의 글 중에서 보면 그는 1750년과 1770년 사이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웨슬리의 패턴은 감리교와 감리교의 영향하에 있는 운동들을 한 세기 동안 지배하곤 하였다. 그러나 프레처의 오순절적 체계가 19세기말에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을 때 그의 세대론 또한 선두에 서게 되었다.

성서에 대한 고등비평과 다윈의 진화론 등의 영향이 등장해서 성서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보자 자유주의적인 해석을 촉진하거나 혹은 기독교의 포기까지도 촉진하였다. 이 모든 것은 거친 도시화와 산업화의 맥락 안에서 발생했으며, 그 짐은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중남미로부터 도시로 이주해 오는 지방 개신교도들에게 흔히 무겁게 부과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천년주의적 비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새롭게 대두하게 된 것이다.

1914년에 미국 최대의 백인 오순절교파인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를 구성하기 위하여 오순절파의 한 그룹이 모였을 때,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예언의 강조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앤더슨(Robert Mapes Anderson)과 파우펠(D. W. Faupel)과 같은 몇몇 사람들은 실로 이 테마가 사실상 오순절 메시지들을 결합시키는 핵심이라고  주장하였다. 확실히 오순절운동의 가장 초기 문헌 속에 스며들어 있었던 이러한 종말론적 동기는 1940년대의 ‘늦은 비 부흥운동’(the Latter Rain Revival) 같은 중요한 기간 동안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3. 재래적 심성의 영향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특성을 형성함에 있어서 외래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서구의 성령론과 성령운동의 영향이라고 할 것 같으면, 재래종교들과 한반도 내에서의 여러 사회-정치적 상황의 영향에 의해 생성된 한국인의 심성은 하나의 재래적 요인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런데 이같은 심성적 영향이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성결-오순절운동을 포함한 전반적인 성령운동사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식은 성령운동의 바람직한 미래는 복음적인 영성으로 이같은 재래적 심성을 치유 그리고 증진시켜나감에 있다고 하는 점이다.


  1) 이기주의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있어서 실리주의적인 샤마니즘의 성향(utilitarian Shamanistic element)이 내재되어 있다고 하는 지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개신교가 이 땅에 급속히 퍼져갈 무렵, 샤마니즘적 성향에 길든 자기 중심적 심성의 사람들이 각자 저마다의 실리(實利)를 얻기 위해 한국교회 내에 몰려들게 되었고,6) 이같은 점은 한국의 교회들이 이기주의적, 개교회 중심적인 경향성이 짙을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같은 샤마니즘의 영향으로 인해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에는 비복음적인 축복관이 자리 잡게 되었다. 기독교의 복음은 사회적이며 윤리적이며 또한 영적인 축복관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샤마니즘은 철저히 이기주의적이며 현세적이고도 물질적인 기복신앙을 보여준다는 점이 현저히 다르다. “이런 기복신앙은 삶의 현실적인 조건의 결여(缺如) 사항을 충족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에, 행위자의 윤리 내지 내면적 덕성(德性)의 함양에는 관심이 없다. 즉 기복신앙은 이기적인 현실주의적 인생관을 조장할 뿐 사회적 정의라든가 인격적 자유, 영적 구원 같은 심오한 종교적 가치체계가 여기서는 배제된다.”7)

뿐만 아니라 샤마니즘에는 사회적 가치나 윤리성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 선과 악의 개념 자체도 지극히 개인 중심적이고 물량적인 것으로 오해되기 때문에, 더 이상 윤리적 규범이나 책임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성령운동이 이같은 샤마니즘의 영향 속에 있게 될 때, 교회는 신자들의 진정한 영적 성화(聖化)를 기대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도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이같은 샤마니즘적 축복관이 더욱 구체화되어진 것은 1960년대 이후 급속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물량주의적인 가치관이 전통적 인성(人性) 중심의 가치관을 압도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때맞춰 교계에서 유행하게 된 ‘삼박자 축복’8)의 신앙은 재래적 샤마니즘에 길들여진 한국인의 심성에 크게 어울리는 것으로서, 성령운동 내에 기복적(祈福的)인 이기주의를 정당한 신앙으로 인식시켜주는 듯한 안타까움을 낳게 되었다.


  2) 타계주의

한국인의 심성에 깃들어 있는 타계주의적(他界主義的) 경향성은 주로 도교(道敎)와 불교(佛敎)의 가르침에서 발원하였다. 도교에서 나타난 현실문제에 대한 은둔적(隱遁的) 해결의 길, 그리고 불교의 타계주의적 극락 관념은 19세기 말 한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의 내세적(來世的) 중심의 신앙과 잘 어울려 한국교회 성령운동 안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이는 안타깝게도 비운(悲運)의 시기에 한국교회가 마땅히 지녀야 할 역사적 자존감과 사회적 책임감이 둔화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이기도 했다.

불교의 타계주의가 한국인의 심성에 끼친 뿌리 깊은 영향으로 인해, 성령운동에서 종말론적 관점으로 강조하던 천국 신앙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Nirvana)과 거의 동일시되어 매우 친숙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사랑의 하나님에 의해 구속받은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복음적인 천국 관념보다는 사후(死後)의 여러 영적 단계들에 대해 조잡하고도 사실적인 표현을 하는 불교의 극락 관념과 거의 유사하게 묘사되었다.

일제의 압박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세상에서의 소망을 잃고 있던 한국 신자들에게는 이 천국에 대한 신념이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교회의 사회적 사명이라든가 신자의 윤리적 책임 등에 대해서는 매우 감각이 무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 세상은 잠시 왔다 가버리는 것이기에 덧없는 것이고, 사후에 천국의 복락을 누리는 것만이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자연스럽게 믿게 되었다.

최근에도 ‘다미선교회’와 같은 집단은 극단적 타계주의 성향의 전형적인 모델로 들 수 있다. 다미선교회는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신념 속에서 범기독교계로부터 스스로 고립된 집단적인 신비주의를 형성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임박한 시한부 종말의 위기감 속에서 비정상적인 형태의 금욕주의와 타계주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다미선교회의 대표인 이 장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1992년 10월로 확언(確言)하여 사회와 교계에 크게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9)

결과적으로 볼 때, 재래종교로부터 싹이 돋아나 국내의 여러 사회-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줄기를 뻗고 자라 나온 이같은 타계주의적 심성은 한국 성령운동의 성격속에 거룩한 교회와 세속적 사회 사이의 이중적 윤리 구조를 형성해 놓았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전통적으로 지니게 된 이같은 이분법적 세계관은 복음적 신학교육을 통하여 치유되어야만 할 뿌리 깊은 심성적 요소인 것이다.


  3) 의타주의

여러 종교를 거쳐가면서 한국인의 심성에는 의타주의(依他主義)가 많이 배어들게 되었다. 우선 샤마니즘에는 인간 자신의 신앙 결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개자인 무당이 자기 운명을 위해 신령과 교제해 주기를 바라는 의타적 성격이 나타나고 있다.10) 게다가 불교적 실용주의(utilitarianism)의 영향으로 인해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가 뿌리 깊은 의타심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유교의 가계 중심적 영향을 받아 더욱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의지하는 경향으로 심화되었다.

오랫 동안 한국인들에게 있어서의 ‘예수 믿는다’는 말은 순수한 복음적 의미 뿐만 아니라 한국 전래종교와 사회-정치적 변화 속에서 형성된 초월자(超越者)에 대한 의타주의성에 호감(好感)을 던져준 성격 또한 매우 짙었다. 그래서 지난날 많은 이들이 무당을 찾아가 자신의 운명을 점치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의 모든 문제를 의타적으로 해결 받으려 했듯이, 현대의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 믿음이라기 보다는 부흥강사를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식의 복음적 근거가 없는 의타주의에 매여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재래적 종교의 유산과 사회-정치적 영향 속에서 형성 되어온 한국인의 의타주의적 심성은 필연적으로 복음에 대한 오해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런 관념 속에서 ‘믿음’이라는 말을 받아들일 때, 이는 복음적 회개(metanoia)의 의미와는 관련 없는 것으로 이해되어지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개개인의 의무나 사회적 책임 등에 대한 면도 약화되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구원파’의 가르침은 구원의 확신에만 강조점을 둔 나머지 “의지적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가 빠져 있다.”11) 성화(聖化)를 열매 맺지 못하는 구원이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이같은 거짓된 ‘믿음’ 교리에 미혹되는 이유는 그들 속의 의타주의적 심성이 발동한 까닭이다.

이렇게도 중요한 복음의 내용이 상당 부분 훼손된 채로 한국교회에 현재까지도 방치되고 있는 까닭은 이미 언급한 대로 이러한 곡해된 가르침이 한국인의 의타주의적 심성에 오히려 안주(安住)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요인이 또한 한국교회의 참된 성장을 저해(沮害)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시급한 복음적 치유와 갱신이 한국교회와 성령운동 전반에 필요한 것이다.


  4) 권위주의적 계율주의

시작부터 한국 교회는 율법주의적 경향 속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부분적으로는 형식적이고도 율법적인 전래 유교적 인간성에서 나온 것이고,12) 또 부분적으로 외국 선교사들의 보수주의로부터 나온 것이다.13) 그런데다가 근본주의 신학의 보급으로 인해 이러한 권위주의적 계율주의(authoritarian legalism)는 더욱 짙어갔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 문은 무척 좁아서 들어가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담배 피우는 사람, 술 마시는  사람, 그리고 첩을 둔 사람들에게는 교회 문이 열리지 않았다. 마치 교회란 깨끗한 사람들만의 장소이지 용서받은 죄인들의 장소는 아닌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이같은 율법적 수준은 당시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이었다.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적 교회의 모습은 마치 계급주의적인 중세 교회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대부분의 교회당에 보면 계급주의적 연상을 떠올리게 해주는 마치 재판소의 모습과도 같은 강단이 있다. 그 강단의 의자에는 당회장과 장로들이 앉게 되는데, 이는 마치 중세교회의 교황과 추기경들의 모임과도 비슷하다. 그리고 ‘목사님’이라고 보다는 ‘당회장님’이라고 불려지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런 권위와 연관된 이유에서다.

이처럼 성령운동을 통해 축복 받기 위한 회중들의 열망과 부흥강사들의 권위주의적 부흥회 인도는 반민주주의적인 하나의 타율적(heteronomous) 체계를 만들어 놓게 되었다. 여기에 신비주의적인 요소들이 덧붙여질 때, 성령운동 내에서 반민주주의적인 경향성은 더욱 강해지게 되기 마련이다.

권위주의적 계율주의는 종종 교회 제도와 전통을 고수하려 하기 때문에 교회의 갱신을 추구하는 성령운동을 경계한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이러한 심성이 교회내에 거의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경향으로 인해 한국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성령운동은 거의 예외없이 비난과 질책을 받아야 했다. 성결운동이나 오순절운동이 한국교회에 최초로 일어날 당시 기존 교회로부터 받았던 배척의 성격도 역시 이같은 심성의 표출과 무관하지 않다.


  5) 기도만능주의

신선술이나 도교 등에서 전래되어 온 기도, 명상 등의 수행은 한국인의 심성에 매우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도 있듯이, 새벽에 정한수를 떠다 놓고 소원을 빈다든가, 바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작정기도를 한다든가, 이런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자력주의적 공적에 기반을 둔 신념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범신론적인 신념의 실천은 교회의 성령운동 내에도 젖어들게 되었다.

한국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성령운동가였던 길 선주(吉善宙; 1869.3.15 - 1935.11.26) 목사도 그가 거듭나기 전에는 범신론적인 영성운동가였다. 평양의 한 절에서 입산 수도하다가 병을 얻은 그는 어떤 도사(道士)의 제자가 되어 주문을 외우던 중 그 병이 낫게 되었고, 그후 여러 도사들을 찾아 다니며 차력술을 연마하였다.

같이 선술(仙術)을 배우던 김 종성이 기독교로 입교하여 그를 전도하던 중, 길 선주는 김 종성의 말대로 사흘을 기도하던 중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두려움 속에 밤새 울며 기도하였다. 그의 마음은 기쁨이 충만해졌고, 세례를 받고 열심히 전도를 하였다.14)

그는 1898년에 영수가 되고 33세가 되던 해 장대현 교회 장로로 일하다가, 1903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6년에 장대현 교회를 담임하였다. 새벽기도회의 시작은 목사 안수를 받기 전 장로로서의 길 선주가 주도하였다. 그가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자신의 영적 갱신의 필요성과 교회가 영적으로 변화되어져야 할 것을 통감(痛感)하고, 박 치록 장로와 함께 정해진 새벽 시간에 날마다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이같은 기도만능주의적인 심성의 영향은 곧 전국적으로 퍼진 성령운동을 통하여 ‘기도 많이 하는 한국교회’의 전통으로 흘러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랜 일제의 탄압과 6·25사변, 그리고 해방 이후의 급속한 체제의 변화를 겪으면서 한국교회의 기도는 해이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운동은 한때 침체되어가고 있던 한국교회에 다시금 기도의 열풍을 불러일으킨 큰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부터 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오순절운동은 기도를 통한 교회성장을 강조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새벽기도나 금식기도 그리고 철야기도 등은 한국교회 초기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이같은 한 민족교회로서의 강한 기도의 힘은 세계교회사상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현재 해외의 저명한 선교기관이나 교회성장의 연구기관 등에서는 한 세기 동안 한국교회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주목하면서, 그 성장의 주된 요인이 기도에 있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같은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그 요인이 우리 심성속에 내재하는 기도만능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6) 신선의식

선교(仙敎) 및 도교 등의 영향으로 인한 신선의식(神仙意識)이 한국교회 성령운동사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그 부정적인 영향으로는 수많은 종류의 범신론적 신비주의 유형의 사이비집단과 급진적 영성운동을 교회내에 생성케 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을 기대할 수 있는데, 즉 이러한 심성을 복음적인 교육과 정신을 통해 계도해 나감을 통해 성숙한 성령운동의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선의식을 자신의 영성의 실천에 온건하게 적용한 대표적인 인물중에 이 용도(李龍道; 1901-1933) 목사를 들 수 있다. 그는 13세 되던 해부터 기도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그는 신앙의 청년 박 재봉과 친근하게 되어 금강산 기슭에서 기도를 즐겼으며 산기도를 시작하였는데”,15) 금강산 기슭에서 좀더 들어간 백정리에서 10일간의 금식기도를 통하여 능력을 얻고, 그 다음부터는 기도에 몰두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24일 저녁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 3시까지 가졌던 철야기도를 통해 악령(惡靈)을 제압하는 신비로운 체험을 가졌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성령운동가중의 한 사람인 이 용도의 신앙과 사상은 현재까지 한국 신학계에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주제가 되어 왔다.16) 왜냐하면 그의 신앙과 사상 속에는 신앙의 보다 높은 단계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자칫 빠져 들기 쉬운 비복음적인 신선의식에의 다양한 시도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 용도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영성 중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늘 유의해야 할 점들이다.

우선 그의 영성(靈性)에 대한 관념 속에는 금욕적(禁慾的) 형태의 신비주의 요소가 깃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육(肉)에 죽고 영(靈)에 살자’고 함으로서, 영은 선한 것이고 육은 죄된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같은 그의 이원론적(二元論的) 관념은 그의 신선의식에서 반영된 것이다.

그는 존 웨슬리(John Wesley)와 중세의 신비주의자인 버나드(Bernard)처럼 오직 예수께 대한 사랑을 그의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다. 특히 그는 버나드의 세가지 입맞춤의 영적 단계의 마지막 단계에서 비유되는 신비적 무아경(無我境) 속에서 완전한 하나님과의 합일(合一)을 이루는 영혼의 상승단계17)를 사모하였다. 여기서 신(神)과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는 경향은 사실 범신론적 신비주의(汎神論的 神秘主義)에서 목표하는 것이다. 물론 이 용도는 신과의 합일보다는 인간 예수께 대한 애절한 사랑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범신론의 위험에서 벗어나왔다고 본다. 그러나 이 용도와는 달리, 같은 시대에 교계를 혼란시키던 백 남주, 유 명화 등의 경우에는 이미 종교혼합적인 신비주의의 오류를 걷고 있었다. 

신선의식의 좀더 급진적인 수행자로서 우선 1917년에 발생한 정도교(正道敎)의 이 순화의 경우를 들 수 있다. 1924년에 소위 계시(啓示)를 받았다고 하는 그녀는 신도들과 함께 계룡산으로 이전했다.18) 신앙의 대상은 무극성불(無極聖佛), 아버지 생불(生佛), 조물주, 천신(天神) 하나님, 천주(天主), 천지(天地) 부모님 등으로 호칭되고, 교주 이 순화는 무극성불(無極聖佛) 아버지로부터 대업을 이룰 명(命)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권능을 받고 출생했다고 가르쳤다. 이 순화는 신도들로부터 대천주님 또는 주님이라고 불리워졌다.19)

황 국주(黃國柱)는 1933년경 백일 간의 기도를 마친 후에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을 신언(神言)의 대변자로 자처하였다.20) 그리고 겉모습을 마치 예수님인양 장발로 머리를 내리고 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그는 “머리도 예수의 머리, 피도 예수의 피, 마음도 예수의 마음, --- 전부가 예수화되었다”21)고 주장하여 자기를 따르는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되었다.

1935년도에는 그가 새예루살렘 도성(都城)을 찾아 순례자의 길을 간다고 그를 따르는 적지 않은 추종자들과 함께 함경도와 강원도를 거쳐 서울로 향해 올 때, 전국 교회가 이들로 인해 매우 소란하였다고 한다. 황 국주는 후에 서울로 와서 삼각산(三角山)에 기도원을 세웠는데, 그는 영체 교환(靈體 交換)이라는 성적 행위를 통해 새로운 영성을 지닌 새 인간을 만들어 이들을 통해 새 역사를 이룬다고 하는 ‘피가름’의 교리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신앙이라는 미명 하에서 일어난 집단적 혼음 행위는 이후 이와 유사한 사교(邪敎) 집단에서 주로 발생하는 성적 부도덕성(性的 不道德性)의 모델이 되었다. 

유 명화(劉明化)는 원산(元山) 감리교회 여신자였는데, 1927년경 소위 입신(入神)의 체험이 있은 후부터 예언과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예수님이 자기 안에 친림(親臨)하여 계시를 주신다고 하면서 자신의 영적 권위를 예수와 동일시하였다. 특히 1932년에는 한 부흥회에서 이 유신(李維信)이라는 여인에게 강신극(降神劇)을 행하다가 큰 말썽이 되기도 했다.

성령운동에 있어서 이와 같은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복음적인 성령론에 대한 이해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와 하나됨’의 신앙을 추구함에 있어서 복음적인 정신 대신 심성적 신선의식을 따라 행할 경우, 누구든지 이런 성격의 함정에 빠지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에게 깃들어 있는 신선의식은 바람직한  성령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복음적인 치유와 증진을 필요로 한다.



4. 성결-오순절운동의 한국적 도입과 그 갈등


1) 성결운동의 도입

성결교회를 이 땅에 설립한 동양선교회의 설립자 카우만(C. E. Cowman)과 길보른(E. A. Kilbourne)은 원래 감리교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일어난 만국성결연합(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의 동양 선교의 일역으로 동양에 나와 이 만국성결교회의 계통으로 동양선교회(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를 일본 동경에 조직하고 활동하며 일본과 한국에 동양선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만국성결운동은 1913년에 확장, 재조직되면서 그 이름을 만국성결교회(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Church)라고 불렀다. 특히 1922년에 여러 성결단체들이 합류하여 필그림성결교회(The Pilgrim Holiness Church)로 발전하였다. 만국성결연합은 웨슬리가 주장한 중생과 성결의 도리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당시에 고조하고 있는 ‘온전한 복음’(full gospel)도 보전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들은 신유와 재림을 적절히 가르치는 것이 성결운동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 성결의 복음과 함께 신유와 재림도 힘써 가르치며 세계선교에 이바지하기를 바랐다.

1907년에 한국에 세워진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의 입장 역시 만국성결연합의 입장을 따르면서, 동양선교회의 2대 총리였던 길보른(Ernest A. Kilbourne)은 동양선교회의 목적이 바로 ‘온전한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첫째로 요한 웨슬레가 가르친 대로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두 번째로 받는 은     혜로서의 성결과, 둘째로 예수님께서 왕의 왕으로서 전천년 전에 재림하셔서 이 땅 위에 하      나님의 나라를 설립하신다는 재림과. 하나님의 대속과 약속을 믿는 신앙의 응답으로서 육신      의 치유를 받는다는 신유를 의미한다.22)


1921년에는 복음전도관이라는 명칭 대신 ‘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교단명으로 바꾸었고, 1933년에는 교단 정치적으로 자치선언(自治宣言)을 하였다. 해방 직후 1945년 성결교회의 재흥총회에서는 ‘신유’를 교리 장에서 삭제하고,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따라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교리를 한데 묶어 이를 ‘성결교회의 전도표제’로 부각시켜 강조하였다. 이 때 19세기 성결-오순절운동에서 통용하던 용어 중에서도 특히 심프슨이 애용한 ‘사중복음’(Four-Fold Gospel)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심프슨의 기독론적 전개보다는 경험론적인 전개를 통하여 사중복음의 강조를 한 점은 한국 성결교회의 독창적인 면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2) 오순절운동의 도입


하나님의 교회

당시 성결 그룹의 교단들은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를 빼고는 거의 ‘성결’ 또는 ‘오순절’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1880년에 D. S. Warner에 의해서 설립된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공식 명칭을 최초로 사용하였지만, 사실 ‘하나님의 교회’란 널리 어느 지역에서나 성결을 강조하는 교회가 새로 시작될 때 그들 스스로가 부르던 집합적인 명칭이었다. 그래서 이들 간에는 오직 하나의 신앙고백적 연결고리만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온전한 성결의 교리였다.

1895년에 C. H. Mason과 C. P. Jones가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in Christ)를 설립하였고, 이 밖에도 매우 많은 ‘하나님의 교회’가 산재하고 있었는데,23) 이들 교회는 대부분 급진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1906년 이후에는 거의 스스로를 오순절운동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1896년에는 테네시 주에서 성결의 부흥이 일어났는데, 이 부흥에서 성결의 은혜를 받은 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들이 기도할 때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당시까지는 이 산골짜기 지역에서 생소한 현상인 방언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이 지역의 침례교와 감리교 목사들에 의해 이들은 새로운 이단이라고 비판받게 되었다. 이 그룹의 지도자는 W. F. Bryant였는데, 나중에 개신교가 다시 한번 개혁되어야만 한다고 믿던 R. G. Spurling이 그와 함께 뭉치게 되었다.

이들 그룹 중 네 교회가 1905년에 모여 좀더 나은 조직을 갖추기로 합의하였고, 따라서 1906년 1월에는 캠프크릭 교회에서 ‘총회’(General Assembly)라는 이름 하에 새로운 교단으로서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 ‘총회’의 지배권자는 Tomlinson이었는데, 1910년에는 31 교회와 1천여 명의 신자들로 늘어나게 되었고 1911년에는 교회 수가 58개소로 늘어나 오늘날 미국 내에서 대표적인 오순절 교단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국 내에서는 교단 분규로 인해 성결교회를 이탈하게 된 정 남수, 곽 재근, 변 남성, 오 계식, 안 형주, 서 재철, 김 광원 등의 교역자들이 하나님의 교회와 손을 잡게 되었다. 이때  이탈한 교회의 대표들은 당시 성결교회 목사였던 송 태용 전도사가  일본으로부터 국내에 도입한 ‘하나님의 교회’24)와 병합하는 식으로 새로운 교단 출범을 선언하게 되었다. 장로교 목사인 이 원균 목사까지 이들에게 가담하여 1936년 11월 25일부터 29일까지 평양 상수리교회에서 새 교단 창립 총회를 개최하고, 변 남성 목사를 초대 공의회 회장으로  선출하여 정식 교단으로 출발하였다.25)

그후 평양 상수리교회에서 1937년 9월 제 2회 공의회를 열고 첫 목사안수(牧師按手)를 주었고, 1939년 제 3회 공의회를 인천 하나님의 교회에 회집하여 열고 회칙을 제정하였다.26) 계속해서 교단 조직을 확대해 나가던 하나님의 교회도 역시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1942년 제 4회 공의회에서 교단을 해체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재건된 하나님의 교회는, 1948년 4월 정 남수 목사가 6명의 목사와 함께 성결교회 신자 800여명을 데리고 나가 설립한 한국 나사렛교회와 합동하여 교단 명칭을 ‘성교회’(聖敎會)로 개명하였다가, 1954년 다시 나사렛교회와 분리하고 교단 명칭을 ‘하나님의 교회’로 환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나님의 성회

비록 1906년 이전에도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미국 내에 여럿 있었을지라도, Azuza 거리의 부흥은 일반적으로 현대 오순절운동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오순절운동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결운동의 자녀라고 할 수 있으며, 다시 말하면 Methodists의 자녀라 할 수 있다.

실제적으로 모든 초기 오순절운동의 지도자들은 제 이차적 은총으로서의 성결의 확고한 옹호자들이었으며, 그들은 단지 이 위에다가 오순절적 세례로서의 제 3의 은총인 방언을 더한 것뿐이다. Parham이나 Seymour나 그들의 삶 전체를 통해서 전적으로 Wesleyan적인 성결을 주장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감리교회가 분산되던 1894년부터 1906년에 이르는 기간까지 성결-오순절운동의 역사는 전 세계에 확산되어지게 된 것이다.

방언을 강조하는 오순절주의자들 중 일부가 1914년에 알칸사스 주 Hot Springs에서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를 조직하였다. 그후 이 교단에서 일어난 ‘오직예수운동’(Jesus Only Movement)으로 인해 교계에 큰 파문이 일어났는데, 이는 삼위일체 신관에 크게 위배되는 복음적 유니테리안주의(Evangelical Unitarianism)의 유형이었다. 그러자 이에 대한 수습이 1915년에 일어나 이 교단의 삼위일체론적인 입장을 밝혔고, 1916년부터는 안정 속에서 부흥하는 교단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1953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인 체스넛(Arthur B. Chesnut)의 사회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결성 총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는 초대 총리로서 체스넛 목사가, 그리고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신조에 따라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신조를 만들었다.

그후 하나님의 성회는 1960년대에 조 용기 목사를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다가, 1970년대에는 장로교, 감리교 그리고 성결교회에 이어 한국에서 네 번째의 큰 교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전 세계에서 단일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세를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성회 소속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전통에 따라 방언(方言)에 대한 강조를 오순절신앙의 본질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27)


3) 성결-오순절운동의 갈등

1960년대에 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한 오순절운동이 시작되면서, 교계에는 세가지 흐름의 성령론이 등장하여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그 첫째는 오순절운동이고, 둘째는 장로교회 계통의 성령운동이고, 그리고 셋째는 성결파 계통의 성령운동이다. 이 중에서 이 시대를 가장 특징 지워 준 것은 오순절운동이며, 나머지 두가지 성령론은 오순절운동에 대한 반동(反動)으로서 한국 신학계에 정식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오순절운동의 성령론에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색으로서는 방언, 예언, 이적 등의 ‘성령의 나타남’((Manifestation of Holy Spirit; 고전 12:7 참조)을 강조하여 이를 전도와 교회성장의 도구로 사용한 점이다. 이에 맞서서 장로교 계통에서는 성령의 회개시키고 중생시키는 사역과 내면적인 ‘성령의 열매’에 강조점을 두고 성령론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성결파에서는 한국 초대교회로부터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성령의 제 이차적 은총으로서의 ‘신자의 회개’와 ‘순간적 성결’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성령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오순절운동은 197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계에 다음과 같은 심각한 영적 현상을 불러일으킨 바, 이같은 이슈들은 한국교회의 진정한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들이다.


      ▶‘삼박자 축복’은 한국교회 내에 기복적(祈福的)인 개인 위주의 신앙으로 폭을 좁혀준       영향을 끼쳤다. 즉 하나님 나라의 의미와 신자에게 있어서의 가난과 시련 그      리고 질병의 의       미를 극히 개개인의 이기적인 차원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이같은 악영향이 지금까지 한국교        회를 질식시키고 있음으로 인해, 이같은 점은 현재 한국교회의 신앙이 이기주의적 심성의 한    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경직된 데에 적지 않은 요인이 되고 있다고 본다.

      ▶성령의 내면적인 열매보다는 봉사적 차원에서의 성령의 나타남을 중시함을 통해,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편향적(偏向的)인 시각을 교회 내에 파급시켰다. 뿐만 아니라      오순절운동은  성령의 인격적인 주(主)되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성령의 역할을 간과함으로 인해, ‘성령의    능력에 의한 성결’(Sanctification by the Power of Holy Spirit)28) 의 은혜를 한국교회에 적 용시키지 못했다. 과열된 ‘성령의 은사받는’ 운동은 전래적 기도만능주의와 신선의식 그리고   이기주의적 심성의 지원을 받으며 극단적인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오순절운동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와 함께 개개인에게 나타나는 육     감적(肉感的) 또는 가시적(可視的)인 체험 또한 중시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29) 이같은 경향     성은 결국 신학적 분별력이 약한 신자들이 영적인 생활을 함에 있어서 무조건 자기 안에서      충동되어지는 어떤 성경말씀이나 생각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오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한국 초기 성령운동 시대의 경우에서처럼, 신선의식의 오용에 의해 ‘새로     운 계시’가 자기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신몬타누스주의(Neo-Montanism) 유형의 신자들을 만      들어 낼 위험이 많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운동은 한국교회 성령론에 있어서 큰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준 역할을 해준 것도 사실이다. ‘믿고 기도하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기도 중심의 신앙을 강조함을 통해, 일제시대와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침체되어 있던 한국인의 기도만능주의 심성을 다시금 불붙혀 주었으며, 기도운동을 통한 교회성장의 가능성을 전 세계 교회 앞에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성령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한국교회 성령운동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거듭남의 사건과도 같은 일이었다. 오순절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아직 한국교회는 성령론에 있어서 체계적인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교회가 성령에 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된 매우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성령운동이었습니다.”30) 오순절운동은 적어도 한국교회에 성령의 현존(現存)과 그의 역사하심이 어느 특정인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신자들 모두에게 적용되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이같은 깨달음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무분별한 신비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에 크게 조력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삶속에 적용하며 ‘내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서의 신관(神觀)에 좀더 친숙해지는 교회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운동의 부흥과 함께 일부에서는 복음적 성령론에 미치지 못한 이기주의, 타계주의, 의타주의, 기도만능주의 그리고 신선의식 심성의 재흥(再興)이 심각한 병적 현상으로 지적받게 되었다. 특히 ‘적극적 사고방식’과 ‘삼박자 축복’의 공식을 신앙에 적용함을 통해,  한국의 교계는 온통 ‘나는 할 수 있다’는, 즉 하나님 신앙보다는 자기 신앙의 위험한 길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성령의 신자 안에서 하시는 주권적인 인도와 역사하심에 대한 자리는 신자 자신의 적극적인 성취 의지와 ‘나’ 중심적인 독선적 신앙의 자리로 대치되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곧 범신론적 신비주의 또는 신선의식, 즉 ‘나는 신(神)이다’라고 하는 신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우려되는 신앙의 풍조를 한국 교계에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오순절운동에 대한 위험성을 직시한 신학자들과 교계 지도자들이 활발한 성령론 논쟁을 벌리게 되었다. 장로교회에서는 사실 이같은 문제가 야기되기 전까지는 성령론에 있어서 큰 강조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는 “장로교회가 신조로 사용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속에 성령론에 관한 항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정통적 장로교회가 성령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과 연계”31)된다는 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성령론 확립의 필요성을 일깨움 받게 된 장로교회의 신학자들은 성령론을 전개하되, 초자연적인 성령의 나타남이라든지 성령 은사의 계속성 등을 철저히 배제하는 노선을 적용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오순절운동에서 비롯되는 극단적인 양상들을 막아 보고자 하는 데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미국의 옛 프린스톤의 찰스 핫지(Charles Hodge)나 워필드(B. B. Warfield)와 같은 신학자들이 성령의 은사의 중단성(中斷性)을 주장했던 것과 신학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성령운동은 주로 회개와 중생(重生) 그리고 성화(聖化)와 관련시켜 전개되었다. 1973년의 빌리그래함(Billy Graham) 전도대회나 1974년의 ‘엑스플로 74’(Explo '74) 대회 역시 이같은 면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32)

그러나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한 성령운동 역시 성령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면을 강조하는 일에 있어서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 장로교회의 성령운동은 성령의 활동을 개인적인 차원의 회개운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데 그 결정적인 약점을 갖는 운동이었습니다. 즉 한국 장로교회는 역시 구원을 위한 성령의 활동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개인의 중생(重生)과 경건운동의 차원으로 협소시킨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33) 오순절운동의 지도자들이 체험과 성령의 나타남을 중시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주(主)되신 성령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강조하지 못한 것처럼, 장로교회의 성령운동 역시 이 중요한 성령의 역할을 신자들에게 적용시키는 일에 있어서 뚜렷한 진보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오순절 계통과 칼빈주의(Calvinism) 계통의 성령론에 대한 비판이  웨슬리안-알미니안주의(Wesleyan - Arminianism) 계통의 성령론 신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고, 마침내 한국 교계는 성령론의 3파전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성결론(聖潔論)은 성결파 성령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데, 존 웨슬리(John Wesley)에 의하면 ‘완전한 사랑’(Perfect Love) 또는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말로 성결의 단계를 설명하였다.34) 현재 한국에서 교리적으로 ‘제 2차적 은총’(Second  Blessing)으로서의 성결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교단으로서는 감리교회, 구세군, 나사렛 성결교회, 성결교회(기성, 예성), 하나님의 교회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성결교회는 교단 교리인 사중복음(四重福音)에서 성결의 복음이 명시되어 있다.

성결파의 부흥강사들은 그들의 집회 때에 ‘성령세례’, ‘불세례’, ‘온전한 성결’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중생(重生) 이후에 다가오는 순간적인 성결의 은혜를 표현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순간적 성결’이란 신자가 온전히 헌신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영(靈)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상태를 순간적인 믿음으로 획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35) 이 순간적 성결의 입문과정을 통해서 신자는 ‘지속적 성결’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이같은 성결교리는 신학 체계가 다른 타 교단에서 성결에 대한 용어와 개념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적지 않은 신학적 비판을 해 온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령의 주되심’을 강조하는 성결은 현대교회의 성령운동속에 기생(寄生)하고 있는 이기주의, 의타주의, 권위주의적 계율주의, 타계주의, 기도만능주의 그리고 신선의식 등의 심성을 치유, 증진하여 복음적인 성령론의 결실을 기함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기능이라는 점을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같은 여러 형태의 성령운동에 있어서의 아쉬운 점은 그 어느 성령론도 가장 총체적인 성령의 역할을 교회에 적용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순절 계통은 성령의 봉사적인 능력, 즉 ‘성령의 나타남’(고전 12장)에 강조점을 둔 은사운동이었고, 반면에 장로교 계통의 성령운동은 전적으로 성령의 내면적인 감화(感化)에 의한 인격적인 변화에 초점을 둔 회개와 성령의 열매(갈 5장)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성결파 계통에서는 ‘성령의 주(主)되심’(갈 2:20)을 강조한 그 뛰어난 성결론(聖潔論)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나타남’에 대한 언급이 거의 나타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교회와 신학의 역사는 이 세가지 서로 상충되는 성령론의 성격 중 그 어느 것에도 충분히 만족할 수 없었다. 오순절 계통의 성령론은 너무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고, 장로교와 성결파 계통의 것 역시 약점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이 세가지 조류의 성령론이 한때 한국교회를 고무시켰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당시 신학자들 간에 서로 간의 약점에 대한 비판이 날카롭게 가해졌던 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36)

만일 이 세가지 성령론의 조류가 지니고 있는 약점들을 모두 극복하고 장점들을 수용한 합(合; synthesis)으로서의 성령론이 주어진다면, 교회는 필경 이를 기쁘게 받아들여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영적 성숙을 위한 디딤돌로 적용시켜 나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의 통찰력있는 교회와 신학의 지도자들이 품고 있었던 ‘기다림’이었다.



5. 결론; 성결-오순절운동, 그 한국적 전개를 위하여


21세기를 맞는 한국교회를 향한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는 ‘현재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향방(向方)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본 연구자는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이제 교회는 도래하는 제 3의 성령운동에 대처한 신학적 작업을 통하여, 온갖 범신론과 뉴에이지운동(New Age Movement) 그리고 종교다원주의의 혼탁한 혼합주의로부터 성령의 인격적 인도하심의 영역을 구별해 내야 할 때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신학적 다양성으로 인한 성령론 논쟁의 갈등 요소들을 극복하고, 재래적 심성에 대한 복음적 치유와 증진을 통해 ‘성령의 主되심’의 성결에 입각한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나타남’의 조화로운 성령신앙, 즉 성결-오순절운동의 전개 시기를 목도하고 있는 때라고 믿는다.

이를 위해서는 오순절 그룹과 성결 그룹 간의 충분한 이해와 폭넓은 대화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를 위해 현대의 오순절 그룹의 신학자들은 오순절운동에 대한 연구방법에 있어서 그들의 강조점이자 또한 영원한 난제(難題)이기도 한 방언에 대한 편향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야만 할 필요성이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방언이라는 문제를 가지고는 오순절운동을 다른 종교운동들로부터 충분히 구분할 만큼 오      순절운동을 적절히 정의할 수 없다.

      ▶오순절운동을 해석하는 자들이 이처럼 방언에 대해 전념하는 것은 오순절운동에 대한 적        합한 이해를 저지한다.

      ▶방언의 실행에 주의를 집중한 결과, 해석자들이 신학적 범주의 분석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사회학적, 심리학적 범주의 분석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주목할 때, 현대의 오순절주의자들은 20세기의 초의 토페카(Topeka)와 아주사(Azusa)의 맥을 잇는 오직 방언주의에 그들의 기원을 둘 것이 아니라, 성결-오순절운동의 역사적 조류 속에서 오순절운동의 위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오순절운동은 그 확고한 역사적 정체성을 확인 받게 될 것이고, 그 무게의 중심은 방언이 아니라 웨슬리적 성결 체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성결 그룹 역시 성결-오순절운동의 주된 기능인 성결의 복음을 해석하고 적용함에 있어서 좀더 보편적인, 즉 범교단적으로 오해없이 활용될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된 내용의 성결론을 수립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현재 진행되고 또 앞으로 도래할 성령운동의 요구에 대해 충분히 신학적으로 자료를 제시해줄 수 있는 준비가 될 것이다. 한 영태 박사는 성결론의 정립과 발전을 위해 다음과 같은 유용한 제시를 하였다.


      ▶성령론에만 집중한 성결론은 기독론과 신론을 약화시킨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적인 연관     성 가운데 성결론을 확대해야 한다.

      ▶성령세례나 성령충만 등은 성결의 본질적 내용보다는 성화의 방법에 관한 주제에 집중해      있는 편협성이 있다. 성결의 본질을 강조하되 이를 성부 하나님의 근원적 속성인 사랑의 본     질에서 찾아야 한다.

      ▶성령세례를 성결의 경험으로 보는 견해는 오늘날 신학계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기 어려운      해석상의 난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성령충만으로 수정하여 이를 성결의 체험과       연관시켜야 할 것이다.

      ▶성결의 순간성만을 고조시킬 때 실제적 삶에서의 지속적 헌신이나 노력 등의 의미가 약화      되어 결국 도덕무용론(Antinomianism)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과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은총의 수단들을 활용할 것 등을 강조해야만 할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파의 분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성화의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함으     로 개인주의나 분파주의의 위험성이 있다. 성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사랑을 강조하여 하나     님 사랑에서 나온 이웃 사랑의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

      ▶성결의 체험을 한 이들은 단지 개인주의적이고 개교회중심주의적인 활동에 헌신할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   음은 개인이나 교회 더 나아가서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성결의 은혜 체험이 너무 타계주의적인 신앙과 연관되어 온 것이 한국교회사 속의 안타까     움이었다. 웨슬리의 성결운동은 자연스럽게 선교운동으로 이어진 것을 볼 때, 당연히 성결케    하시는 성령의 권능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차원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이제는 ‘성결론을 핵으로 하는 성령론’이 국내의 성령운동을 이끌어가게 될 것이며, 이에 대한 준비를 위해 성결신학자들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할 줄로 안다. 이기주의, 의타주의, 타계주의, 권위적 계율주의, 기도만능주의, 신선의식 등의 재래적 심성은 한국 초기 성령운동의 시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성령운동속에 얽혀서,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성숙한 성령운동의 미래는 오직 재래적 심성의 복음적 치유와 증진의 작업을 통해 기약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현재 우리가 목도하기 시작한 국내 성결-오순절운동의 전개과정속에서 얻게 될 것이라고 본인은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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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07.3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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