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던 한국명 서서평 선교사

호남선교 위한 고귀한 희생 쉐핑을 찾아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던 한국명 서서평 선교사

강경구 기자[뉴스파워]

1912년 32살의 나이로 파송된 미혼의 여성 선교사 쉐핑 

▲ 그녀의 한국명은 서서평(徐舒平, Miss Elisabeth Johanna Shepping, R. N.)이다. 지금의 여전도회라 할 수 있는 부인조력회를 설립해 여성의 신앙운동과 개화운동에도 앞장섰다.     © 강경구
쉐핑... 낯설지 않는 이름이다. 푸른 눈빛의 여자선교사인 그녀가 한국 땅을 찾은지가 그러니까 1912년이다. 32살의 여성, 미혼이었던 쉐핑은 미국 남장로교가 간호선교사로 전라도땅 광주에 파송했던 인물이다.

그녀의 한국명은 서서평(徐舒平, Miss Elisabeth Johanna Shepping, R. N.)이다. 한국에 온지 22년여를 평생을 헌신이라는 단어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던 그녀를 추억하고 그녀의 삶이 적어진 노트를 뒤적이는 자체가 행복이며 감동이다. 1934년 향년 54세를 일기로 한국 땅에 뼈를 묻은 그녀의 흔적은 광주의 제중병원과 군산 구암예수병원, 그리고 현재 전주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인 이일성경학교(“"Neel Bible School”, in Honor of Miss Lois Neel of Charlotte)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여전도회라 할 수 있는 부인조력회를 설립해 여성의 신앙운동과 개화운동에도 앞장섰다.   
 
▲ 한국기독사 전문가인 호남신학대학 차종순 총장은 서서평 선교사에 대해 "가사의 재정권한이 없던 한국의 여성들에게 식사 때마다 쌀 한 스푼씩을 모아 헌금하도록 하는 성미의 시초를 마련하는 등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고 말한다.     © 강경구
한국기독사 전문가인 호남신학대학 차종순 총장은 서서평 선교사에 대해 "가사의 재정권한이 없던 한국의 여성들에게 식사 때마다 쌀 한 스푼씩을 모아 헌금하도록 하는 성미의 시초를 마련했으며, 여성들에게 처음으로 비누를 제공해서 피부를 깨끗하게 세안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당시 여성들의 인권과 영혼, 그리고 미모를 위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도 노력했다"고 말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신행일치의 삶을 살았던 쉐핑은 평생을 미혼으로 살았으며, 한국 어린이 14명을 양자로 삼아 양육하고 교육을 주선하는 등 한국근대사에 잊을 수 없는 족적을 광주땅 양림동에 남기고 있다.  

한국에 온지 22년여를 헌신하며 시신을 기증하며 떠난 쉐핑 
 
▲ 당신은 지금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이냐고? 누구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냐고... 자꾸만 물어보는 쉐핑의 눈빛을 만난다. 심성이 아름다고 고왔던 서평이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졌던 그녀...     © 강경구
그녀는 고국인 미국에서 보내오는 생활비를 자기의 몫이 아닌 철저히 타인의 몫으로 사용했다. 극도의 절약과 아낌은 고스란히 한국의 고아들과 가난한 여성들을 위해 베풀었던 것이다. 일년에 신었던 신발은 한 켤레로 족했으며, 그것도 남자가 싣는 신발을 신고 다녔다고 한다. 원인모를 병명에 시달리다가 임종할 때에는 자기 시체를 해부하는데 쓰라고 시신을 기증하는 사상초유의 유언을 남겨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많은 예산을 확보해야 가난한 자와 선교 사업을 도울 수 있다는 식의 사회복지사업이 아닌 자기의 것을 아끼고 아껴 나누는 쉐핑의 모범은 그녀가 떠난 후에 그녀가 나눔과 베풂의 도구로 사용하였던 쌀뒤주에 밀가루 2홉이 남아있었다는 일화로도 근면과 나눔의 절정을 느끼게 한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이냐고? 누구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냐고... 자꾸만 물어보는 쉐핑의 눈빛을 만난다. 심성이 아름다고 고왔던 서평이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졌던 그녀가 자꾸만 우리에게, 한국교회에게 물어오는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 앞에 무슨 답을 주어야 하는가? 

기독교 여성운동의 모범 답안을 제시하다.  

▲ 바람이 분다. 100년을 바라보는 나무들이 양림동을 서있다. 이제 눈이오고 또 바람이 불고 비가 올 것이다. 역사는 늘 그랬듯 흘러가고 새로운 선교미션을 우리에게 던져 주고있다. 당신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바람속에서 누군가 물어본다.     © 강경구
인신매매 반대, 축첩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서서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하기도 한 쉐핑은 만주의 홍등가에 팔려 갈 19세 처녀를 돈을 주고 구해 오기도 하고 많은 창녀들의 빚을 갚아 주고 새 삶을 찾게 했으며 그들의 삶의 구조적인 혁신을 위해 설립한 이일학교에서 공부를 시키는 등 삶의 모순을 해소하는데 주력했다.

제중 병원에서는 특별히 나병환자들에 대한 애정과 섬김의 도를 실현했고, 저작거리를 헤매는 여자 나병환자나 거지들을 만나면 집에까지 데리고 와서 목욕시키고 밥을 먹여서 자기의 옷을 나누어 입혔기 때문에 자신은 평생 두벌 옷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이제는 고인이 된 김윤식 장로의 목격담에 의하면 엄동설한에 두 사람의 문둥병 환자가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집에 달려가 하나밖에 없는 담요를 가져다가 둘로 나누어 하나씩 덮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굶주린 사람에게 자기의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는데 그가 죽을 때 집에는 밀가루 두 홉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고 하니...

  한국 기독교 원년을 만들었던 고귀한 희생!
 
▲ 한국명은 서서평(徐舒平, Miss Elisabeth Johanna Shepping, R. N.)이다.     © 강경구
1905년 을사늑약 이후, 5년 뒤인 1910년에는 한일강제병합이라는 극단의 식민지정책이 한반도를 옥죄이고 조선은 사법권에 이은 자주적인 통치권한을 상실했다. 1910년 당시 광주의 인구는 일본인과 한국인을 합하여 2,500호, 약 10,000명이었다. 당시 광주권역의 교회는 1926년 4개의 교회에 2,000여 성도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황국 신민화를 표방한 일본의 극악한 신사 참배 강요에 의해 1930년들어 한국교회는 막다른 골목에 접어든다. 쉐핑 은 1912년에 광주에 왔고, 1934년까지 20여년을 살았다. 그녀가 이 땅에 살다간 시기가 한국교회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치열하고도 고된 고난의 삶이 강요되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조선에 머물렀던 22년 동안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 원래의 조급한 성격 때문에 매사를 서서(徐徐)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을 徐씨로 하고 이를 또 강조하는 뜻에서 이름의 첫 자를 천천히 할 서자로, 두 번째 자는 모난 성격을 평평하게 한다는 뜻에서 평평할 평(平)자를 붙여 서서평(徐徐平)이라 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본 이름인 쉐핑의 발음을 살린 것이기도 했다. 양림동 성역화 사업이 한참이다. 아직도 여러갈래로 길들이 나있는 양림동 거리에 서면 옥양목(玉洋木=하얗게 바랜 서양 무명베)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에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고 고아를 등에 업은, 단발머리에 독일계 미국인으로 평생을 미혼으로 산 작은예수 쉐핑의 흔적을 여기저기서 확인한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02.06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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