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던 한국명 서서평 선교사
호남선교 위한 고귀한 희생 쉐핑을 찾아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던 한국명 서서평 선교사
강경구 기자[뉴스파워]
1912년 32살의 나이로 파송된 미혼의 여성 선교사 쉐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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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한국명은 서서평(徐舒平, Miss Elisabeth Johanna Shepping, R. N.)이다. 한국에 온지 22년여를 평생을 헌신이라는 단어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던 그녀를 추억하고 그녀의 삶이 적어진 노트를 뒤적이는 자체가 행복이며 감동이다. 1934년 향년 54세를 일기로 한국 땅에 뼈를 묻은 그녀의 흔적은 광주의 제중병원과 군산 구암예수병원, 그리고 현재 전주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인 이일성경학교(“"Neel Bible School”, in Honor of Miss Lois Neel of Charlotte)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여전도회라 할 수 있는 부인조력회를 설립해 여성의 신앙운동과 개화운동에도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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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온지 22년여를 헌신하며 시신을 기증하며 떠난 쉐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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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예산을 확보해야 가난한 자와 선교 사업을 도울 수 있다는 식의 사회복지사업이 아닌 자기의 것을 아끼고 아껴 나누는 쉐핑의 모범은 그녀가 떠난 후에 그녀가 나눔과 베풂의 도구로 사용하였던 쌀뒤주에 밀가루 2홉이 남아있었다는 일화로도 근면과 나눔의 절정을 느끼게 한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이냐고? 누구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냐고... 자꾸만 물어보는 쉐핑의 눈빛을 만난다. 심성이 아름다고 고왔던 서평이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졌던 그녀가 자꾸만 우리에게, 한국교회에게 물어오는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 앞에 무슨 답을 주어야 하는가?
기독교 여성운동의 모범 답안을 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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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 병원에서는 특별히 나병환자들에 대한 애정과 섬김의 도를 실현했고, 저작거리를 헤매는 여자 나병환자나 거지들을 만나면 집에까지 데리고 와서 목욕시키고 밥을 먹여서 자기의 옷을 나누어 입혔기 때문에 자신은 평생 두벌 옷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이제는 고인이 된 김윤식 장로의 목격담에 의하면 엄동설한에 두 사람의 문둥병 환자가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집에 달려가 하나밖에 없는 담요를 가져다가 둘로 나누어 하나씩 덮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굶주린 사람에게 자기의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는데 그가 죽을 때 집에는 밀가루 두 홉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고 하니...
한국 기독교 원년을 만들었던 고귀한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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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녀는 조선에 머물렀던 22년 동안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 원래의 조급한 성격 때문에 매사를 서서(徐徐)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을 徐씨로 하고 이를 또 강조하는 뜻에서 이름의 첫 자를 천천히 할 서자로, 두 번째 자는 모난 성격을 평평하게 한다는 뜻에서 평평할 평(平)자를 붙여 서서평(徐徐平)이라 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본 이름인 쉐핑의 발음을 살린 것이기도 했다. 양림동 성역화 사업이 한참이다. 아직도 여러갈래로 길들이 나있는 양림동 거리에 서면 옥양목(玉洋木=하얗게 바랜 서양 무명베)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에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고 고아를 등에 업은, 단발머리에 독일계 미국인으로 평생을 미혼으로 산 작은예수 쉐핑의 흔적을 여기저기서 확인한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02.06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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