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5) 루터는 오늘도 그 거리에…

기사입력 2006.05.17. 오후 3:49

 

 

종교개혁은 인류 역사의 위대한 진보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영적 부흥이었다. 기독교 역사상 이처럼 중요한 사건은 없었다. 이 중요한 사건의 역사적 무대는 독일이었고 그 중심 무대는 비텐베르크였다.

우리 일행이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자 그곳은 온통 루터의 발자취로 가득차 있었다. 루터박물관 비텐베르크성교회 비텐베르크시교회 루터하우스 멜랑히톤하우스 비텐베르크광장들과 심지어 비텐베르크 표지판에도 ‘루터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500년이 거의 지난 지금까지 비텐베르크 거리는 물론 골목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종교개혁의 본산지 비텐베르크는 작센의 엘베 강둑의 메마르고 척박한 지역에 위치했던,인구 3000명의 가난하고 초라한 마을이었다. 이곳은 문화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어서 예절도 잘 모르는 야만적인 곳이었다. 루터는 그 마을을 떠나고 싶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비텐베르크에 대학을 세운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실소를 터뜨렸다. 5세기가 지난 지금도 비텐베르크는 여전히 낙후된 지역이다. 도시는 참으로 작고 초라했다. 도시를 조금 벗어나자 전형적인 독일 농촌이 나타났고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한 옛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도 초라한 데 루터 시대에는 얼마나 심했겠는가.

하지만 작고 초라한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탄생한 것처럼 이 보잘것 없는 마을에서 인류 역사의 분기점,종교개혁이 태동되었다. 이 부흥의 불길을 댕긴 사람은 작센의 한 농부의 아들 마르틴 루터(1483∼1546)였다. 그는 1483년 독일 작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나 63세 되던 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 일행이 아이슬레벤을 찾았을 때 루터의 체취가 아직도 도시 구석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가 태어난 집이 놀랍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집 입구에 루터 흉상이 세워져 있어 생가인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가 세례를 받았던 교회,그가 마지막 설교를 했던 교회,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났던 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루터의 체취가 가득 남아 있는 고향 아이슬레벤 거리를 걷자니 500년의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내 자신이 루터와 같은 시대에 거리를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루터의 부모는 무척 가난했지만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경건했다. 루터는 어린 시절부터 경건한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18세에 독일의 명문 에어푸르트 대학에 입학하는 영광을 얻었다. 언덕 위에 우뚝 세워진 에어푸르트 대학의 웅장한 모습이 찬란했던 그 옛날의 명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20세 때 루터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라틴어 성경을 접했다. 그후 그의 손에는 항상 성경이 들려 있었다.

1502년 문학사를 마치고 1505년에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루터는 부친의 소원에 따라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법학을 중단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가 머물렀던 수도원에는 지금도 루터의 흔적이 수도원 곳곳에 배어 있었다.

기도와 금식,밤샘, 그리고 스스로를 자학하면서 구원의 길을 찾던 루터는 요하네스 폰 스타우피츠를 만나면서 새로운 진리의 빛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성경연구와 고전연구는 루터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을 열어주었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루터는 기사의 복장을 한 채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루터가 머물렀던 기사방과 성경을 번역했던 장소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바르트부르크 성을 둘러보고 루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톨릭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민중의 손에 들려주자 사람들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각성하기 시작했다. 성경이 출간된지 불과 수년만에 라틴 벌게이트(Vulgate) 성경을 읽었던 사제들보다 더 많은 평신도 독자들을 갖게 되었다. 1년만에 종교개혁 이전 15세기 동안 필사되었던 것보다 더 많은 성경이 독일과 유럽 전역에 유포되었다.

성경적 기독교의 재발견으로 마르틴 루터는 사도 바울 이후 누구도 갖지 못했던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루터의 가르침은 비텐베르크 대학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진리가 그들의 가슴에 심어지자 그 영향력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동료 교수들도 루터의 개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리하여 비텐베르크 부흥의 불길은 작은 시골 마을 비텐베르크에서 독일어권 전역으로,다시 전 유럽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다.

루터는 자신의 성경적 교리의 재발견을 통해 근대 부흥의 길을 닦아놓았다. 루터 개인의 성경적 기독교의 재발견과 영적 각성이 종교개혁의 위대한 원리를 창출했고 교리적 재발견은 영적 각성의 위대한 힘으로 작용했다. 루터의 개혁정신이 살아움직이고 그가 외친 칭의론이 선포되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확실히 루터는 근대 영적 각성의 선구자였고 종교개혁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려는 깊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8.01 09:52
  • 수정 2021.03.26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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