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서울 정동 구세군

[한국의 기독교 성지순례]

사랑의 ‘3S(씻고 먹이고 구원) 정신’ 품고 한세기를 오롯이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윤중식 기자

(2) 서울 정동 구세군

구세군(救世軍)대한본영은 군대 같은 교회다. 개신교의 목사 격인 사관(士官)은 군인처럼 제복을 입고 계급장도 단다. 총 대신 성경을 들고 ‘거리 전도’에 나선다. 하지만 군번 없는 군인 정신으로 이 땅의 낮은 곳을 향하여 103년 동안 ‘3S 사역’을 벌이고 있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먹이고(soup), 씻기고 입히고(soap), 구원(salvation)으로 인도한다. 연말이면 길거리에 자선냄비를 걸고 사랑의 온도를 높인다. 올해로 84년째다. 서울 덕수궁 돌담을 끼고 난 길을 따라가면 옛 미국 공사관 건물과 덕수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빨간색 2층 건물이 한국 구세군의 살아 숨쉬는 성지다.

◇한적하고 아늑한 궁궐 뒷길 끝자락에 의연히=사람들과 차량이 맘대로 오가는 정동길과는 달리 이 길은 좀 낯설어 보인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비하는 경찰들이 상주하고 있어 왠지 모르게 멈칫하게 된다. 그래서 발을 떼었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행선지를 돌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몇 발짝만 가면 한적하고 아늑한 덕수궁 뒷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길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한눈에 봐도 고색창연한 옛 석조건물 한 채를 만날 수 있다. ‘구세군중앙회관’으로 자선냄비가 시작된 1928년에 완공됐다. 2003년 서울시로부터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됐다. 현재 구세군대한본영은 충정로 100주년기념빌딩으로 2008년 이전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지난 10일 오후 정동 구세군박물관을 찾은 날은 아쉽게도 유물을 볼 수 없었다. 내달 초 100주년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재개관할 계획으로 한창 리모델링 작업 중이었다. 은퇴한 지 8년이 넘은 김준철(73) 구세군역사박물관장은 은발을 휘날리며 마지막 디자인 작업에 몰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구세군의 약사(略史)를 소개해달라고 했더니 “박물관이 재개관하는 내달 초에 인터뷰할 순 없느냐”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자신이 쓴 ‘구세군100년사’와 신앙 에세이 ‘나는 구세군과 결혼했다’(애디아)를 내밀었다. 과천에서 열리는 구세군사관 신입생 환영 예배에 참석해야 하므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고해 달라고 말했다. 구세군사관학교는 1985년 과천으로 옮겼다.

◇일반인들 독립군에 지원하는 줄 오해도=김 관장이 쓴 책에는 한국 구세군의 어제와 오늘이 알기 쉽게 잘 정리돼 있었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 감리교 목사 부스(W Booth)가 런던의 슬럼가에서 창립했다. 한국 선교는 43년 후에 시작됐다. 1908년 10월 부스의 지시를 받은 호가드(R Hoggard)에 의해서다. 부스가 일본을 방문하고 있을 때 어느 한국인이 간절히 요청한 결과였다.

서울에 온 구세군은 서대문 밖 평동(강북삼성병원 주차장 일대)에 ‘본영(本營)’을 설치했다. 호가드는 ‘개척대’라는 이름으로 곧바로 길거리로 나섰다. 고아원 사업과 양로원 사업에 착수했다.

성직자(목사)는 ‘사관(士官)’으로 불린다. 참위·부위·정위·참령·부령·정령·참장·대장 등으로 구분됐다. 당시는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특히 1907년 강제로 해산당한 구한국부대 병사들이 의병을 조직해 항일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치외법권적 특권’을 지니고 있던 영국인들이 군복을 입고 들어와 ‘입대’를 권유하자 독립군에 지원하듯 몰려들었다.

호가드는 영어로 ‘보혈 속죄’와 ‘회개 성결’을 외쳤다. 하지만 한국인 통역자는 설교 내용과 달리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외치기도 했다.

급기야 구세군은 ‘구세신문’ 창간호를 통해 교인들의 정치 참여를 강력히 경고하기에 이른다. ‘독립군 지망생’들은 총을 준다고 해서 왔는데 총 대신 성경을 주고, 전투하러 나간다며 길거리에 나가 나팔을 불며 전도하는 것이 구세군인 것을 안 뒤 실망하고 떠났다. 그들은 구세군이 말하는 ‘마귀 속박에서 자유’를 ‘일제 지배에서 독립’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속죄-화평-성결 ‘회개석’ 앞에 서면 숙연=1910년 평동에서 시작된 구세군사관학교는 매년 10∼20명씩 복종’을 제일 덕목으로 삼는 충성된 사관을 길러냈다. 정동 새 구세군사관학교 부지는 원래 덕수궁 소유였다. 이후 친일 기업인들 모임으로 넘어간 것을 구세군이 사들였다. 옛 선원전 부속 건물을 헐고 727㎡(220여평) 규모로 2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1회 자선냄비가 시작된 1928년의 일이다.

르네상스 건축 양식으로 수직적 상승감이 강조되는 고딕 건물과 달리 이 양식은 수평적 안정감을 강조한다. 삼각형과 사각형, 원형을 조화롭게 배치했다. 지붕과 도르래식 창문틀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양식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강대상 아래 나무로 깎아 만든 장의자 하나다. 회중석을 바라보게 놓여 있는 것이 특이하다. 등받이 안쪽에 ‘속죄’ ‘화평’ ‘성결’ 세 단어가 새겨져 있다. 의자처럼 생겨 모르는 이는 무심결에 앉을 수 있다. 그랬다간 큰코다친다. 의자가 아니라 무릎 꿇고 기도하는 곳이다. 구세군 예배당에서만 볼 수 있는 ‘회개석(悔改席)’이다. 닳고 닳은 회개석 앞에 서면 누구든 옷깃을 한번 여미게 된다.

사관들은 부부가 함께 사역하지만 한 사람 몫만 받는다. 월 150만원 안팎이다. 부(富)에 대한 미련을 가진 이는 사관이 될 수 없다. 모두 사택에 살며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짐을 싸야 한다. 이날 오후 7시 경기도 과천 구세군사관학교에선 86기생 17명의 환영 예배가 열렸다. 백발의 선배들은 아름다운 동행에 첫 발을 내딛는 후배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03.16 14:25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