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성령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글·사진 최영경 기자

최근 성령운동의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고 성경을 통해 검증될 수 없는 예언과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로 둔갑되고 있다. 국내에도 각종 은사집회가 성행하고 있다. 물론 성령은 지금도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다. 문제는 분별이다. 성도 입장에서는 어디까지가 성령의 역사이고 어디서부터가 미혹의 영의 장난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 한국교회의 왜곡된 성령운동을 분석하고 성경을 통해 참된 성령의 얼굴을 분별하는 척도를 제시한 안내서가 출간됐다. 성령론을 전공한 박영돈(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과 교수·작은목자들교회 목사) 교수의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IVP)이 그것이다.

박 교수를 최근 충남 천안의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만나 성령운동의 문제가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성령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성령은 “얼굴이 없는 인격”이라는 말이 있다. 성령은 자신의 영광을 베일로 감추고 자신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게 하신다. 성령은 항상 예수 중심적으로 일한다. 성령과 보혈은 직결돼 있다. 진정한 성령사역과 영적 체험의 한 복판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리 잡고 있다. 만약 성령운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 분명한 포커스를 맞추지 않으면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이루기보다 인간의 종교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남용될 것이다. 일부 성령운동의 문제는 기적이나 은사를 강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십자가에 대한 초점을 흐리게 하는 데 있다.

책에서는 ‘성령운동’이라는 말을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편의상 사용하긴 했지만, 성령운동이라는 말 자체는 아주 잘못된 용어다.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고 선전하는 운동을 하시지 않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예수님의 이름과 사역을 증진시키는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이런 성령의 특성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표현이다. 또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마치 우리가 우리 뜻대로 성령을 조종하고 운행할 수 있는 것 같은 뉘앙스를 전달하기에 매우 부적합한 용어다. 성령을 우리가 마음대로 끌어당겨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고 순종해야 하는 인격적인 대상으로 모셔야 한다. 구태여 운동이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면, 성령은 성령운동이 아니라 ‘예수운동’, 즉 예수님을 알리고 높이는 운동을 하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령운동’이라는 말보다 ‘성령사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좋다.”

-이 책은 교수님께서 2년간 성령운동을 조사하며 분석한 것이다. 갑자기 이런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성령론을 가르치면서 일선의 목사님들과 많은 교인들이 한국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영적인 현상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매우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발견했다. 성령론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런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진단해 교인들이 올바르게 판단하도록 돕는 글이나 책을 써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게 됐다. 하지만 비판하는 일이 즐거운 일이 아니라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주위의 많은 목사님들과 교인들의 요청과 권유, 그리고 어떤 편집인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이 책을 낸 것이다. 이 책에서 직통계시, 금니 소동, 쓰러지는 현상, 천국 증언, 예언, 방언, 치유, 성령의 불세례 등 교인들이 가장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심히 당혹스러워 하는 문제들을 다루었다.”

-현재 한국 교회에 성행하고 있는 치유의 사역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치유집회가 어떤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병들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믿음이 있으면 다 고침 받는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단순화된 치유신학이 치유집회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육체의 치유를 반드시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성경의 기본 원리에 무지한 결과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했지만 아직도 이 땅에 속한 지체, 즉 죄와 사망의 육체를 입고 있다. 육체의 완전한 치유는 이 땅에 속한 지체를 벗어버릴 종말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아무리 믿음이 좋을지라도 실제로 치유 받기보다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고침 받았다고 굳게 믿고 선포해 봐도 이 엄연한 사실을 결코 변개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치유를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는 한 설명할 길이 없다. 신자는 이 땅에서 ‘이미’ 치유의 은혜를 부분적으로 누릴 수 있지만 ‘아직’ 약함과 질병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다.

흔들림 없이 주님의 고쳐주심을 신뢰했으나 자신들의 기도를 외면하는 주님의 싸늘한 뒷모습만을 접하는 수많은 신실한 교인들의 문제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은 믿음이 적은 자신을 자책하거나 자신만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비애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학적인 균형을 잃고 극단으로 치우친 치유신학, 즉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다양한 관점들을 하나로 아우르지 못한 치유신학이 많은 주님의 자녀들을 괴롭히고 교회를 해롭게 한다. 그러므로 치유사역은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치유신학의 바탕 위에서 시행돼야 한다.”

-그러면 아무리 치유를 위해 기도해도 치유 받지 못한 이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가.

“성경을 통해 ‘아직’ 치유되지 않는 질병과 고통의 신비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잘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질병과 고통이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더 많은 영적인 질병, 교만과 방종을 치유하시고 영적 성숙의 밑거름인 겸손과 인내를 배양하신다. 하나님은 육신의 질병을 통하여 우리 내면의 변화를 극대화하신다. 만약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마다 매번 즉각적으로 병 고침을 받는다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영적인 유익과 은혜의 기회를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신앙이 깊어지고 성숙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이 땅 위에서 잠시 질병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십자가의 목적이 우리 안에 실현되는 것이다. 우리가 죄와 옛사람의 소욕에 대해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이며 우리 안에 행하시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다른 사람은 방언을 하는데 왜 나는 못할까라는 고민에 빠진 분들이 많다. 그런 이들에게 줄 수 있는 방언에 대한 성경적인 지침은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에서 방언에 대한 분명한 가이드를 제시해 주었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다양한 은사들이 주어졌으며 방언의 은사는 그 중에 하나이다. 바울은 은사를 획일화하는 위험성을 엄중하게 경계하고 그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사랑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방언의 은사만은 예외적으로 모든 신자들이 필수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특정 은사를 획일화함으로써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시려는 주님의 뜻을 무시한 것이다. 이는 성경적인 균형을 현저히 상실한 가르침이며, 교회를 부흥으로 이끌기보다는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위험성이 높다.

바울이 계속 강조한 것은 신자에게 주어지는 은사의 다양성이다.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기질과 성향과 사명과 상황에 꼭 필요하고 알맞은 은사를 주신다. 당신의 자녀들에게 최상의 은혜를 주기 원하신다. 어떤 이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없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보시기에 그 은사를 안 주실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최상의 은혜이다. 방언을 유창하게 하면서도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이 많은 반면에, 방언을 못하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신앙 인격을 소유한 이들도 많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실 때처럼 지금 우리도 성령의 불세례를 받아야 하나.

“오순절에 제자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믿은 후에 성령세례를 받느냐는 문제에 있어서 전통적인 교회와 오순절 교회는 첨예하게 대립되며, 그에 대한 논쟁이 오래 지속돼왔다. 물론 서로의 차이에 대한 학적인 연구와 논의는 필요하지만, 이제 성령세례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하는 소모전을 그치고, 실제로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일에 공동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믿은 후에 성령의 불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믿은 후 성령세례’라는 구도 속에 모든 신자들의 은혜체험을 획일화함으로써 성령체험의 다양성을 무시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교인들 중에는 믿은 후 획기적인 은혜체험 없이 점진적으로 성숙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차례 극적인 성령체험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할 때부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 계속 주관함, 즉 충만함을 받는 것이 성경이 제시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신 성령의 충만한 은혜와 역사하심을 계속 거스르고 소멸하는 삶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다시 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께 돌아가야 한다.”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잘못된 은사 집회나 운동에서 거짓 영에 미혹되지 않도록 분별력을 키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은 자유하시지만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진리의 테두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성령의 근본적인 사역이 무엇이며, 그 사역의 특성과 패턴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어떤 영적인 현상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미혹의 영의 장난인지를 분별하는 척도는 성경이다. 성경으로 입증되지 않은 영적인 현상과 체험을 비판이라도 하면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고 성령을 소멸한다는 식으로 겁박하는 것이 사이비 성령운동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력이 필요한 시기다. 따라서 진리의 잣대를 가지고 잡다한 영적인 현상을 진단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중대한 사명이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할까 두려워 성경적인 검증을 회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오히려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잘못된 성령운동에 대한 성경적인 대안, 즉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꼭 있어야 할 성령의 사역은 무엇인가.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을 위임받은 제자들이 가장 힘쓴 것이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천지개벽적인 사건이나 거창하고 요란한 행사가 아니라 겨자씨와 같이 아주 미미해 보이는 우리의 기도와 말을 통해 다이내믹하게 진행된다. 이런 미약한 방편을 통해 성령의 강력한 능력이 역사한다.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쇠퇴한 이유는 강단에 말씀의 권세가 사라지고 기도의 무릎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열매 없고 무기력한 말씀사역의 공백을 다른 것으로 메우려하다 보니 복음사역의 정도에서 벗어나 편법을 동원하게 된다. 말씀의 능력 대신 사람들을 쓰러뜨리거나 신비한 표적이나 은사를 나타냄으로 교인들을 제압하여 사역의 즉각적인 성과를 거두려는 유혹에 빠진다.

교회는 사도적인 전통을 따라 복음사역의 정도로 돌이켜야 합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기도와 말씀사역이 부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 전파자들이 강단 위에서 말씀 전할 때만 성령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은밀한 삶 속에서도 항상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새창조의 능력이 역사한다. 우리를 자유케 하며, 치유하고, 평안케 하며, 풍성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며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의 6중 사역이 교회 안에서 강력하게 일어나 교회를 부흥하게 한다.”

물론 박 교수가 국내에서 가장 보수적인 고신교단 소속이기 때문에 그의 견해에 반대하는 소리도 적지 않을 듯하다. 그럼에도 무분별한 사이비 성령운동이 넘치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 이 시점에 한국교회가 “참된 성령운동을 분별하는 척도는 성경뿐”이라는 박 교수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는 충분히 있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03.21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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