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6) 존 낙스와 스코틀랜드 부흥

기사입력 2006.05.24. 오후 5:14


칼뱅을 통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개혁과 부흥의 봉화를 높이 든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존 낙스다. 1560년대 그를 통해 일어난 불길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 전역으로 놀랍게 확산되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태동시켰고, 다시 전 세계 장로교 태동의 시발이 되었다.

낙스의 활동 무대 에든버러와 세인트 앤드루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구석구석에는 그의 체취가 가득 남아 있다. 특히 에든버러 시내에는 낙스가 담임했던 세인트 자일스 교회,그가 살았던 낙스 하우스,낙스의 개혁사상을 이어간 에든버러 대학교,낙스의 스코틀랜드 개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에 이르기까지 낙스가 남긴 역사적 흔적들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고스란히 숨쉬고 있다.

낙스가 매주일 말씀을 선포하며 개혁과 부흥의 불을 지폈던 세인트 자일스 교회는 4세기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여전히 스코틀랜드 개혁의 상징처럼 우뚝 서 있다. 그곳은 온통 낙스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교회 입구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낙스가 묻혀 있다.

낙스의 개혁을 달갑지 않게 여긴 기즈의 메리와 그녀의 요청에 따라 출동한 프랑스군에 의해 포로가 된 낙스는 19개월 동안 프랑스 갤리선 노트르담 호의 노젓는 노예생활을 했다. 주의 은혜로 어렵게 풀려났지만 다시 1553년부터 6년간 프랑크푸르트와 제네바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 이 기간은 스코틀랜드 개혁과 부흥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특별히 제네바에 머무는 1555년부터 1559년 동안 그가 목도한 칼뱅의 제네바 개혁은 깊은 감동과 도전으로 다가왔다.

이국에서의 망명생활, 유럽의 개혁자들과의 교류, 그들의 작품섭렵, 불타는 조국애는 낙스로 하여금 종교개혁의 이상을 스코틀랜드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강한 힘과 자극을 주었다.

1559년 5월 2일 낙스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왕의 포고에 의해 불법자의 신분으로 낙인 찍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낙스는 “오!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며 망명 중에 습득한 종교개혁 이상을 자신의 조국 스코틀랜드에 적용해 나갔다.

낙스는 미사가 성경의 가르침을 파괴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한번의 미사는 백만의 군대보다 무섭다”며 가톨릭 잔재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그에게 타협은 곧 저주였다. 강력한 세력으로부터 야만적인 공격이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위대한 역사를 진척시켜 나갔다.

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낙스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그러다 아예 이 교회 담임을 맡아 개혁의 봉화를 높이 들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동반한 낙스의 설교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전역을 휩쓴 개혁과 부흥의 불길이 이곳에서부터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를 들은 한 청년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낙스는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는 몸을 약간 구부정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어찌나 활기와 정력에 넘치는지, 마치 설교단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그 속에서 날아오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다니엘서를 강해할 때는 양심이 너무 찔려 펜을 잡고 필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뜨거운 심장에서 나오는 불꽃 튀는 낙스의 설교가 청중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이다. 설교를 듣는 이들의 가슴에 개혁의 불, 부흥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낙스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신앙,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진리를 붙들고 루터와 칼뱅이 이룩하지 못한 ‘피 없는 혁명’을 완성할 수 있었다. 1560년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승리했다. 스콧의 메리 여왕은 1561년 스코틀랜드를 개신교 국가로 선포하였다. 낙스 한 사람의 용기와 설교가 스코틀랜드 개혁과 부흥의 불을 지피더니 드디어는 스코틀랜드를 개신교화한 것이다.

사회, 정치, 문화를 종교적 눈을 통해 통찰하는 탁월한 혜안을 지닌 낙스는 단순한 종교개혁 차원을 넘어 사회구제, 평등사상 구현, 균등한 교육기회 제공을 통해 루터와 칼뱅이 이루지 못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낙스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에 설립된 에든버러 대학교는 비록 낙스가 직접 설립하지는 않았지만 낙스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며 스코틀랜드 개혁과 부흥의 불길을 이어갔다. 수 세기 동안 이곳은 전 세계 장로교회의 영적 구심점이 되어 왔다. 지난 4세기가 넘게 스코틀랜드가 세계 지성사를 빛냈다면 그 상당한 몫은 존 낙스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를 들어 위대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스코틀랜드 개혁과 부흥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시는 도저히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낙스가 거대한 개혁을 이룩하리라는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세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볼 때 그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어진 시대적 소명 앞에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개혁과 부흥의 불길을 높이 들었던 낙스를 통해 하나님은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다. 그는 결국 진리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역사 앞에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1572년 11월 24일 에든버러에서 낙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섭정자 모르톤이 “어떤 사람에게도 아첨하거나 역성들지 않았던 자가 여기에 누워있다”고 예찬할 만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8.01 09:56
  • 수정 2021.03.2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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