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8)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기사입력 2006.06.07. 오후 5:35


역사적으로 경건주의 운동은 청교도 운동과 더불어 개인의 영적 각성이 공동체의 영적 각성과 사회개혁으로 이어진 전형적인 부흥의 모델이었다. 이 운동은 1670년 독일에서 시작되어 18세기 중엽까지 가장 강력한 신앙운동으로 뿌리내렸다. 그 대변자는 슈페너,프랑케,진젠도르프였고 이들의 주활동무대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할레,그리고 헤른후트였다. 이 도시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독일에 있었다. 나는 독일을 넘어 세계 기독교 역사의 흐름을 바꾼 위대한 경건주의 운동의 발자취를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독일로 달려갔다.

영국 히드로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예정시간보다 30분 늦은 오후 3시45분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수속을 마친 나는 곧 바로 슈페너(Phillip Jacob Spener·1635∼1705)가 사역했던 바울교회로 달려갔다. 프랑크푸르트 시내에 막 접어들면서 차안에서 바라본 다운타운의 모습은 과거와 현대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양한 색으로 채색된 세련된 고층 건물들이 저녁 노을과 어우러지면서 연출된 색다른 이미지는 방금 떠나온 런던의 모습과 대비를 이루었다.

슈페너가 자신의 일생을 불태웠던 독일 경건주의 요람인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슈페너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슈페너가 시무했던 바울교회 외벽에는 그를 기념하는 별로 크지 않은 푸른 청동판이 붙어 있었다. 동판 오른쪽에는 슈페너의 상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경건의 열망’,그리고 가운데는 그의 사역을 집약한 짧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문구 첫 마디는 ‘교회와 사회개혁자,프랑크푸르트 루터교 선임목사’였다. 이것은 한 손에는 복음을 들고,다른 손에는 사회 개혁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던 슈페너의 사역을 너무도 잘 집약한 말이다. 비록 그가 이곳에서 사역한 기간은 1666년부터 68년까지 2년밖에 되지 않지만 이 기간에 슈페너는 신앙과 행위,영적 각성과 사회개혁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슈페너의 경건주의는 당시 아무런 삶의 감동을 주지 못하고 냉랭해진 교리주의적 정통주의와 달랐다. 또한 복음의 본질을 벗어난 라우센부시로 대변되는 근대 사회복음과도 차이가 있었다. ‘경건의 열망’이 보여주는 것처럼 슈페너의 경건주의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생명력은 루터의 비텐베르크 부흥만큼이나 강렬했다. 경건주의 운동이 공동체의 변혁을 태동시킨 이유가 거기 있었다.

1675년 출간된 슈페너의 ‘경건의 열망’에는 종교개혁의 유산,스트라스부르크 대학 시절부터 심취한 요한 아른트의 ‘참된 기독교’와 청교도 사상이 깊숙이 용해되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머리로 쓴 책이 아니라 불타는 가슴으로 쓴 책이었다. 이 책에는 그의 뜨거운 심장,교회를 사랑하는 충정,개혁과 영적 각성의 간절한 염원이 절절히 녹아 있다. 그는 결코 기성 교회 전체를 도매금으로 매도하지도,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만일 주님 나라도 인격의 서열과 가치를 따라 평가되는 세상 나라와 같다면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볼 때 마땅히 맨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슈페너는 자신 역시 불완전한 존재로 개혁의 대상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도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를 향해 “얼마나 많은 지식을 소유했으며,그 지식을 얼마나 세상에 발표하였으며,세상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인정을 받았으며,그러한 명성을 어떻게 유지시켰고,어떠한 영광 가운데 활동하였으며,얼마나 위대한 이름을 세상에 남겼는가,얼마나 많은 물질의 부를 소유하였는가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신실하게 그리고 순전한 심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힘썼는가 하는 것이다.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제시한 것이다.

슈페너는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에 불을 지폈고 부패한 사회를 향해서는 개혁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어떤 면에서 그의 등장은 일종의 시대적 요청이었다. 그때만큼이나 독일 사회에 개혁이 강하게 요구된 적도 드물었다. 경건주의 직전의 독일교회와 사회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교회 안에서 시들어가면서 타락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크리스티안 게르버는 이런 탄식을 했다. “사람들은 쾌락과 방종의 길을 걸었다. 농부들은 동물처럼 살았고 부자들은 벤치에 앉아 먹고 마시고 즐겼으며 매일 이렇게 할 수 없는 이들은 일요일에 그 짓을 했다. 사람들이 아침까지 춤과 술에 빠져 있었고 더욱이 논쟁과 주먹다툼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사회에서 교회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부패한 사회를 이끌기는커녕 점점 더 세상에 동화되어 갔다.

이런 가운데 슈페너의 ‘경건의 열망’은 종교개혁의 참된 회복을 외치며 개혁을 향한 거대한 포문을 열어젖혔다. 곧 경건주의 운동은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요원의 불길처럼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곧 독일 전역과 주변 여러 나라에서 개혁과 각성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슈페너로 인해 촉발된 경건주의 영적 각성 운동은 개인의 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 개혁과 각성을 수반하며 성경 연구,성경대로의 삶의 실천,양로원 고아원 학교 병원 설립을 통해 잠든 영혼을 깨웠다. 1710년 독일에서 성서공회가 조직된 것도,전 세계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근대 선교 운동의 출발도 경건주의 운동이 가져온 결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경건주의자들은 신학교재를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여 신학을 신학자와 성직자의 독점물에서 평신도가 참여할 수 있는 신학으로 만들어주었다. 이처럼 루터가 이룩한 교리개혁은 경건주의 운동을 통해 비로소 종교 영역만 아니라 해외 선교 운동,사회 개혁과 문화 변혁으로 이어졌다.

확실히 영적 각성과 근대 사회 개혁의 성공적인 연계성은 경건주의가 가져다준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 경건주의 운동이 3세기 동안 높은 평가를 받아온 것은 복음이 단순히 믿는 자의 심령이나 교회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 개혁을 수반하게 했기 때문이다. 사회 개혁을 수반하지 않는 기독교는 언제나 사회와 민중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경건주의 운동은 한편으로 18∼19세기 영적 각성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대사회적 책임을 충실하게 구현하여 교회에 생명력을 더해주었다. 과장인지 몰라도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경건주의에 와서 비로소 완성된 셈이다. 경건주의 운동이 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세인의 주목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슈페너가 제시한 잠자는 교회를 위한 6가지 원칙

슈페너가 1675년에 기술한 '경건의 열망'은 출판되자마자 교리적 틀에 갇혀 있던 수많은 독일교회와 잠자는 영혼들에 각성의 불을 지폈다. 슈페너는 이 책에서 잠자는 기성교회를 향해 여섯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평신도와 목회자가 함께 정기적인 성경공부를 할 것을 촉구했다. 둘째,만인제사장의 회복이다. 셋째,교리나 신조에 대한 지성적 동의가 아닌 사랑의 실천적 행위와 행동으로 현시된 참된 믿음에 대한 강조다. 넷째,연합정신이다. 다섯째,경건훈련이 뒷받침된 신학교육이다. 마지막으로 회개와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설교다.

얼마 후 '경건의 열망'은 경건주의 운동의 선언서가 되었고 그 불길은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8.01 10:00
  • 수정 2021.03.2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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