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9) 프랑케 부흥의 현장

기사입력 2006.06.14. 오후 3:35

 

프랑케가 일으킨 영적 부흥운동의 현장,독일 작센 지방 할레

17세기 말 프랑케(Auguste Hermann Francke·1663∼1727)를 통해 독일 작센의 한 작은 도시 할레에서 놀라운 영적 각성 운동과 사회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케는 개인의 영적 각성과 사회 개혁의 완벽한 조화를 통해 할레를 유럽의 대표적인 경건주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여기서 목회자와 영혼의 위로자,신학자와 교육자,거대한 조직자로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프랑케가 활동했던 작센의 잘레 강변 할레에는 그의 체취가 지금도 가득 남아 있었다. 물론 그 옛날의 화려함과 위용은 찾을 수 없었지만 한 시대의 역사를 주도했던 경건주의 흔적을 도시 구석구석에서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할레 시내 모습은 프랑케 시대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경건주의 요람 프랑케 재단,오랜 전통의 할레대학,보육원 등이 3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영적 각성과 사회 개혁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할레대학 캠퍼스 건너편에 당당하게 서있는 오페라 하우스,프랑케 시대의 할레 시내 광장이 여전히 그 옛날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할레 시내 광장과 그 주변 골목을 정신 없이 걸었다. 수백 년의 역사가 도시 건물 하나하나에서 그대로 묻어났다. 혹 프랑케가 남긴 저술과 자료들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할레 시내의 가장 오래된 고서점을 찾기도 했다. 서점 직원은 300년이 넘는 프랑케의 책을 들고 나타나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의 배려로 소중한 자료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도보나 차로 할레시내 라니쉐 거리를 따라 할레 마켓 광장에서 프랑케 광장을 향해 남쪽으로 가다보면 화려하게 복구된 프랑케 재단 본부를 만난다. 한눈에 확 들어와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바로 이 건물이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랑케가 1698년과 1700년 사이에 건립한 보육원이다. 프랑케 재단 5층 보육원 건물 지붕 밑 벽면에는 이사야 40장 31절 말씀이 새겨져 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프랑케의 비전을 그대로 집약한 성경 말씀이다. 그 성경 구절 바로 아래 큰 글씨로 ‘프랑케 재단’이라고 쓰여 있는 동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프랑케 재단은 프랑케가 할레대학 교수로 부임한 후 1695년에 세운 자선재단이다. 우리가 그 현장에 도착했을 때 3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그곳에는 할레의 경건주의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독일 종교개혁의 주역 마르틴 루터가 갓 설립된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에 부임한 후 그곳을 부흥의 요람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프랑케 역시 1692년 갓 설립된 할레대학 교수로 부임한 뒤 이 대학을 근대 영적 각성과 사회 개혁 센터로 만들었다. 그곳 교정에 도착했을 때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대학생들의 모습과 새로 단장한 깨끗한 캠퍼스,활기 찬 모습으로 캠퍼스 교정을 걷는 남녀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여느 대학 캠퍼스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옛날 할레 공동체의 영적 유산이 캠퍼스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은 비텐베르크 대학과 합쳐져 마르틴 루터 대학으로 명칭이 바뀐 옛 할레대학 캠퍼스를 거닐다 말없이 서있는 프랑케 동상을 발견했다. 나는 그 동상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동상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프랑케는 저 멀리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서 달려온 내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하지만 섭섭하다거나 아쉽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1687년 뤼네부르크에서 체류하면서 프랑케는 며칠 동안 계속된 내적 투쟁 이후 그의 생애를 완전히 뒤바꾼 갑작스러운 회심을 경험했다. 프랑케 자신이 고백하는 것처럼 “마치 손을 뒤집는 것처럼 그의 모든 의심은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 단회적인 회심 경험을 통해 프랑케는 하나님의 실존과 중생을 체험했다. 마치 웨슬리의 회심 경험이 감리교 운동을 태동시킨 원동력이었던 것처럼 그의 회심은 ‘할레 회개운동’을 태동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2년후 1689년 1월 프랑케는 드레스덴의 슈페너의 집에서 그와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며 경건주의 이상을 더욱 견고하게 다듬었다. 이후 지칠 줄 모르는 30년간의 활약으로 ‘할레경건주의’라는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뤘다. 프랑케의 영적 각성은 개인의 각성을 넘어 사회 각성으로 이어졌다. 프랑케가 설립한 빈민자 학교, 보육원,할레대학은 전형적인 사회 개혁의 모델이었다.

할레대학을 통해 독일 경건주의 운동은 전 세계로 확산되어 나갔다. 젊은이들이 복음을 들고 전 세계로 흩어진 것이다. 18세기 동안 할레가 중심이 된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해외에 파송한 선교사는 60명이었다. 1832년 복음의 빚진 자의 심장을 가지고 불타는 가슴을 안고 고대도에 도착하여 최초로 한국 선교를 타진했던 개신교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도 할레대학 출신이었다.

비록 귀츨라프는 한국 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항해기’를 읽고 런던대학에 재학중인 한 젊은이가 동양 선교를 꿈꾸기 시작했다. 바로 그 젊은이가 1866년 평양 대동강 양각도에서 순교한 토머스 선교사였다.

한국 선교가 토머스 선교사의 순교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프랑케의 할레 부흥은 귀츨라프와 토머스 순교를 통해 아시아와 한국 선교로 이어진 것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8.01 10:02
  • 수정 2021.03.2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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