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0) 진젠도르프는 누구

기사입력 2006.06.21. 오후 5:00


모라비안 부흥의 주역 진젠도르프(1700∼60)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독특한 인물이자 뛰어난 종교적 천재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1700년 5월26일 작센주 한 장관의 아들로 드레스덴에서 출생하여 슈페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외할머니의 밑에서 자랐다. 외할머니의 경건주의는 어린 진젠도르프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진젠도르프는 할레에서 교육 받는 동안 경건주의 운동의 선구자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성장했다.

진젠도르프는 전형적인 루터파 경건주의 운동의 후예였지만 결코 편협하지 않았다. 피에르 벨의 ‘역사와 비판 사전’ 같은 계몽주의자들의 저서를 섭렵하면서도 계몽주의 한계를 정확히 읽고 그것을 극복한 인물이었다. 진젠도르프는 이성 중심의 신앙,이성과 더불어 하나님께 접근하려는 모든 시도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배격했다.

진젠도르프의 십자가의 신학은 당시 개신교 정통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지식만의 신앙,계몽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이성 중심의 신앙과 달랐다. 그는 모든 이성적 신인식을 거부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신학과 신앙의 중심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형벌의 고통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곧 십자가 신학이 진젠도르프의 신앙의 근간을 형성했다. 그는 자주 “예수가 없었다면 나는 무신론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이같은 그리스도의 대속 신앙에 근거한 진젠도르프의 경건주의는 주변에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가 이끄는 모라비안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졌다. 학창 시절의 형제 사랑을 위한 조합들,드레스덴 공직 시절 때 경건을 위한 모임,무엇보다도 헤른후트 형제단은 그 전형적인 사례였다.

진젠도르프는 자신의 영토에 정착한 후스의 후예들인 보헤미안-모라비안 형제단을 통해 누구도 해낼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 무엇보다도 그는 철저한 경건주의 실천을 공동체 안에서 구현했다. 이들은 결혼 유무와 성별에 따라 자신들의 공동체 일원을 ‘대’로 나누고 다시 작은 공동체인 ‘단’과 ‘반’으로 나누어 철저하게 경건주의을 실천했다. 그 결과 1744년 윌리슨이 증언한 대로 1735년 모라비안 공동체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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