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0) 진젠도르프와 헤른후트

기사입력 2006.06.21. 오후 5:00

 

 


1727년 이후 진젠도르프가 이끄는 모라비안 공동체 가운데 수차례 부흥이 임했다. 모라비안 공동체는 근대 부흥운동의 효시였고 근대 선교운동의 주역이었으며 대사회개혁과 사회적 책임의 이상적인 모델 가운데 하나였다. 모라비안이 근대 부흥과 근대 선교운동에 미친 영향력은 참으로 대단했다. 넓은 의미에서 존 웨슬리의 감리교 부흥은 모라비안 부흥의 산물이었다.

모라비안 공동체가 근대 영적 각성 운동의 역사 속에서 남긴 뚜렷한 흔적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헤른후트를 방문하고 싶었다. 독일에서 처음 맞는 주일,작센지방 헤른후트 모라비안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아침 일찍 채비를 하고 출발했다. 헤른후트는 생전 처음 가는 길이지만 근대 교회사에 뚜렷한 영적 각성 운동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 모라비안 공동체에 대한 기대로 나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헤른후트 마을에 들어서자 외형은 독일의 여느 마을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영적 분위기가 마을 전체를 압도하는 듯했다. 독일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교회 지붕 한쪽에 높이 솟아 있는 교회탑이나 종탑도 없었고 교회 건물을 치장하는 화려한 장식도 찾을 수 없었다. 한눈에 검소함을 읽을 수 있었다.

교회에 들어서자 치장 없는 소박한 예배당 분위기,참석자들의 외모에서부터 화려하고 예전이 짙게 배어 있는 독일 루터교회와 다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는 찬양대도 없었고 화려한 강단도 없었다. 그렇다고 장엄하고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회중들이 앉는 의자마저도 아무런 장식이 없는 단순한 나무의자였다.

예배는 말씀과 찬양 중심의 아주 심플한 예배였다. 하지만 그 예배가 언어와 인종적 벽을 뛰어넘어 감동으로 다가왔다. 예배를 드리는 모습,가슴으로 외치는 설교,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진지함,주님을 찬양하는 공동체의 경건함에서 시공과 언어를 넘어 영과 영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목도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독일에 모라비안 교회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자못 놀랐다. 그 혹독했던 동독 공산정권 시절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참으로 놀라웠다. 하지만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헤른후트 마을에 사는 1200명 가운데 반 이상이 모라비안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주민 절대 다수가 교회를 다니는 아일랜드 울스터 지역의 한 도시 켈스에서 느꼈던 것처럼 성령이 온 도시를 압도하시는 것 같았다.

예배 후 안내를 받으며 모라비안의 역사가 담긴 박물관,귀한 자료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모라비안 고문서 박물관을 돌아보며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낯선 이국인에게 보여주었던 친절은 특별하고 남달랐다. 주일날 휴관임에도 낯선 방문객을 위해 박물관과 고문서관을 활짝 열고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했다.

나를 안내한 튀빙겐대학교를 졸업한 한 여성지도자는 헤른후트 마을 구석구석을 돌면서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헤른후트의 역사를 완전히 꿰뚫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귀찮은 기색이 없었다. 그녀의 모습에서는 마치 진젠도르프가 헤른후트 공동체를 사랑으로 섬겼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물씬 풍겨났다. 아무런 자료도 없이 유창한 영어로 술술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녀의 외모에서 풍기는 겸손과 어우러지면서 헤른후트 공동체에 대한 인상은 더욱더 깊은 감동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진젠도르프가 첫 사역을 시작한 교회,그가 구축한 성,그가 묻혀 있는 무덤에 이르기까지 나의 관심을 끌지 않은 곳은 없었다. 나는 할레에서 프랑케의 흔적을 피부로 체험했던 그 이상으로 헤른후트에서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공동체의 체취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모라비안 부흥은 근대 해외 선교운동에 불을 지폈다. 부흥을 경험하자 이들의 가슴은 구령의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진젠도르프는 1732년 레온하르트 도버와 다비드 니츠만을 서인도로 파송했다. 다시 이듬해 크리스티안 다비드를 파송하고 독일 남부와 동·서,스위스,네덜란드,영국,덴마크,발트해 연안의 나라들,러시아,이집트,남아프리카,그린랜드,북미와 서인도를 비롯한 전 세계로 선교의 지경을 넓혀나갔다. 진젠도르프는 이들 지역을 직접 순회하면서 해외 선교를 독려했다. 모라비안 공동체는 18세기에 무려 226명의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며 근대 선교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경건의 실천,놀라운 선교열과 사회 개혁을 수반한 모라비안 부흥은 건강한 부흥의 모델이 되었다. 모라비안의 이상은 감리교 부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구원의 확신이 없이 조지아 사바나에서 활동할 때 웨슬리에게 심각한 도전을 준 것도 모라비안 선교사 스팡겐베르크였고 영국으로 돌아와서 영적 침체에 허덕이는 웨슬리에게 믿음의 필연성을 확신시켜 준 것도 모라비안 피터 뵐러였다.

모라비안 공동체의 영향력은 감리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과장인지 몰라도 당시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부흥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라비안 부흥은 이성과 자율의 시대로 대변되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차가운 오성에 의하여 풀이 죽은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력을 제공했으며 심지어 당대의 사상가 레싱 괴테 헤이더 등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헤른후트의 경건의 열기가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으로 확산돼 독일과 유럽의 교회가 다시 놀라운 영적 각성을 경험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헤른후트를 떠났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8.01 10:09
  • 수정 2021.03.2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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