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2) 존 웨슬리와 감리교 부흥

기사입력 2006.07.05. 오후 3:21

 

 

미국의 1차 대각성 운동과 견줄 수 있는 강력한 감리교 부흥운동이 영국에서도 일어났다. 이 부흥 운동이 영국의 사회와 문화,종교 전반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했다. 이 부흥을 이끈 주역은 감리교 운동의 지도자 존 웨슬리(1703∼91)였다. 그는 필립 샤프가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뱅 등과 견줬을 만큼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영국은 웨슬리의 나라로 불릴 만큼 거의 3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런던을 비롯하여 곳곳에 존 웨슬리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의 생전의 위치 때문인지,그를 따르는 이들의 노력 때문인지 몰라도 웨슬리의 체취를 영국 전역에서 느낄 수 있다. 웨슬리가 다녔던 명문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옥스퍼드의 홀리클럽,첫 사역을 했던 브리스톨의 감리교회,그가 노방 설교를 했던 한함마운트,그리고 마지막 사역을 했던 런던 감리교회에 이르기까지 웨슬리와 감리교 부흥의 유산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 영국국교회를 상징하는 성 바울교회 안에 웨슬리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우리 일행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그가 마지막 사역을 했던 런던의 웨슬리 기념교회와 그가 극적으로 회심을 경험한 올더스게이트 거리였다. 시티가 49번지에 위치한 웨슬리 기념교회에 들어서자 웨슬리 동상이 입구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웨슬리 동상 오른쪽에는 웨슬리가 살았던 집이 있었고 웨슬리가 사역하였던 교회 안에 들어서자 그의 체취가 가득 풍겨났다. 기념교회는 2층 구조로 청중이 강단을 바라보도록 설계되었다. 나무로 된 의자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교회 의자였다. 다만 오래된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웨슬리가 사용하던 설교 강단도 그대로 잘 보존돼 있었다. 그 강단에서 웨슬리가 외치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그가 강단에서 두 손을 불끈 쥐고 영국 교회의 부흥을 소리 높여 외치는 모습을 상상하며 교회 구석구석을 둘러본 뒤 기념교회 지하에 마련된 웨슬리 박물관으로 내려갔다.

박물관은 웨슬리의 사역과 생애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잘 정돈되어 있었고 웨슬리의 강대상,초상화,그가 앉아서 설교했던 의자 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웨슬리 기념교회 바로 옆에는 그가 살았던 집이 놀랍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웨슬리 형제가 사용하던 지팡이 의류 등 개인 소장품들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

이어 웨슬리가 회심했던 올더스게이트가를 찾아갔지만 전혀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웨슬리가 회심을 경험한 모라비안 교회를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올더스게이트가를 알리는 표지판만 말없이 나를 맞이했다. 나는 정신없이 그 거리를 거닐었다. 웨슬리가 모라비안 교회에 참석했다가 회심을 경험했던 모습을 연상하면서 그 역사적 거리를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 웨슬리를 만난 느낌이었다.

감리교 부흥이 시작된 킹스우드의 한함마운트에는 웨슬리가 남긴 명언 “세계는 나의 교구다”는 말이 생생하고 또렷하게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1주일 전 방문했던 런던의 웨슬리 기념교회의 웨슬리 동상 밑에 동일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와 함께 나의 뇌리에는 270여년 전 웨슬리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모습과 웨슬리가 불타는 열정으로 피를 토하며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킹스우드 한함마운트에서 시작된 놀라운 영적 각성 운동은 웨슬리가 가는 곳마다 계속되었다. 처음 브리스톨과 런던을 중심으로 시작된 부흥은 무어필드와 케닝턴,그의 고향 엡워드까지 이어졌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백명에서부터 1만5000명에 이르는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복음에 목말라 있던 무리들은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찢으며 웨슬리의 설교에 놀랍게 반응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는 통회의 소리,죄 사함의 감격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소리로 설교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웨슬리가 패역한 세대를 향해 죄의 관영과 개인과 공동체,사회의 타락을 지적하자 사람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강도가 어찌나 강했던지 사람들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쓰러졌다.

이후 웨슬리가 가는 곳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동반된 설교,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열정으로 외치는 설교,죄의 각성과 회심의 역사가 이어졌다. 웨슬리 듀웰의 말대로 웨슬리 부흥은 성령 충만한 설교에서 시작된 ‘설교의 부흥’이었다. 웨슬리는 1735년 원고 없이 설교를 시작한 이후 평생 성령에 의존하여 설교했고 거의 모든 설교에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웨슬리는 그 능력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나서 그 재능을 갈고 닦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웨슬리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슴에 설교하셨던 것이다.

웨슬리의 설교가 수많은 영혼을 깊은 잠에서 깨우고 강력한 도전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했으며 말을 타고 다니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아침 저녁으로 1시간씩 일과에서 손을 떼고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말씀과 경건,기도가 어우러진 신앙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웨슬리의 불타는 가슴이 평신도 순회 전도자들에게도 옮겨붙어 그들이 가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웨슬리의 감리교 부흥의 역사적 현장을 확인하고 영국을 떠나면서 웨슬리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왠지 무거웠다. 그 화려했던 감리교의 영광과 쇠락해가는 오늘날의 영국 감리교의 모습이 너무 대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 주여,제2,제3의 웨슬리를 보내셔서 감리교의 옛 영광을 속히 회복시켜 주소서.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8.01 10:13
  • 수정 2021.03.2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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