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1월 서론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반도 전역에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이 놀랍게 발흥했다. 2년 후인 2007년 1월이면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라고 평가받고 있는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100주년이라는 한 세기가 지니는 의미도 놀랍지만 그 사건이 우리 교회와 민족에게 준 영향과 결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 부흥운동은 우리 민족과 교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청일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발생한 1904년의 러일전쟁, 이어 진행된 1905년의 을사조약, 1907년의 고종의 강제 퇴위, 그리고 1910년의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 그 때 만큼 우리 민족이 암울한 시대를 걸어갔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민족이 주권을 상실하고 독립의 소망이 요원한 이때 우리 민족과 교회가 놀라운 영적대각성운동을 경험한 것이다. 


1.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


   1903년부터 1909년까지 6년 사이 부흥운동의 놀라운 파장이 세 번이나 나타난 나라는 한국이 처음이다. 종교개혁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영적대각성운동도 1734-36, 1740-1742년 두 번의 파장에 그쳤다. 평양대부흥운동은 미국의 제1차대각성운동 못지않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다. 1907년 1월 14일 장대현교회에 임했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직접 목도한 조지 매큔 선교사는 그 다음날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브라운(A. J. Brown)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지난밤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현시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즈, 인도 등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장대현교회에서 임한 성령의 역사는 곧 평양전역으로 놀랍게 확산되었다. 곧 그 부흥의 불길은 한국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였던 남산현교회로 옮겨져 평양의 감리교회 전체가 그 성령의 역사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 현장에서 그 놀라운 영적 각성운동을 직접 목도한 감리교 선교사 노블(W. A. Noble)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보고했다:


“우리에게는 한국교회에 내 자신이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가장 놀라운 성령의 부어주심의 현시가 있었는데,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현시는 없었을 것입니다.”


   선교보고는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고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직접 목도한 많은 선교사들은 자신의 생애에 그 같은 것을 목도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읽지도 못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강력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2. 한국교회 120년의 영적생명의 원동력


   이 시대 부흥운동이 한국인들에게만 국한되거나 단순히 개인의 영적체험으로 끝났다면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온전한 부흥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부흥운동은 연령과 신분과 지역을 초월하여 한반도 전역의 수만은 한국인들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 모두에게 임했으며, 또한 이 부흥운동은 개인의 영적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개혁과 변혁으로 이어져 한국교회가 대 사회적 민족적 책임의식을 발견하고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만들었다. 1905-1909년 사이 한국교회는 외형적인 성장과 내적 성장 두 가지 모두를 경험했으며 실제로 교회로서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1905년 약 5만 명이던 교세는 1909년에 20만으로 4배나 증가했고, 초등학교도 115개에서 606개로, 그리고 주일학교 학생 역시 17,894명에서 87,117명으로 급증했다.

   

   이 기간 한국교회가 외형적인 성장만 경험한 것이 아니다. 부흥운동은 개인의 영적갱신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교육열, 금연금주운동, 우상숭배에서의 해방, 여성지위의 향상, 결혼 및 세계관의 변화로 이어져 사회변혁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과거 사회 악습으로 평가받았던 노름, 일부다처제, 조상숭배와 같은 옛 관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부흥운동은 한국교회를 성령 안에서 하나로 만들어 자연히 교단과 교파의 벽을 넘어 민족복음화 연대를 결성하게 만들었다. 성경번역, 찬송가 발행, 주일학교 교재, 미션스쿨운동, 문서선교, 의료선교, 장감이 공동으로 발행한 그리스도 신문과 코리아 미션 필드(The Korea Mission Field) 모두 부흥운동이 낳은 연합의 결실들이다. 1905년에는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가 복음주의연합공의회를 만들어 기왕에 구축된 복음주의 연대가 한층 강화되었다.

 

3. 한국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

  

   우리 모두가 평양대부흥운동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단순히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120년의 한국교회의 영적생명의 원류였던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만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위기 속에서 이 민족과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위기의식이 팽배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 사이의 긴장이 마치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을 방불 할 만큼 강도 높은 데다 현재 한국교회가 맞고 있는 영적 침체와 복음의 생명력 상실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많은 일들 중에 가장 시급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다시 한번 이 민족 가운데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는 일이다. 오 주님, 다시 한번 100년 전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임재를 우리 가운데 허락하셔서 이 민족과 교회를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워주소서!


목회와 신학 칼럼-2005년 1월.hwp[C:My Documents]-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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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08.0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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