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비운의 조선역사와 평양대부흥운동


19세기 말 조선의 역사는 한 마디로 비운의 역사였다. 1873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야욕이 노골화되면서 조선에는 전쟁의 포성이 그칠 날이 없었다. 특히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한 후부터 1910년 한일합방이 있기까지 15년간은 전쟁과 일제의 식민침략으로 얼룩진 역사였다. 1894년 청일전쟁,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고종의 퇴위,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비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19세기 말 비운의 역사는 이 민족을 깊은 영적인 잠에서 깨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였다.

 

                        1. 비운의 조선 역사


미국의 유명한 외교가 포스터(John W. Foster)가 말한 것처럼 당시 한반도는 주변 강대국들이 노리는 “나봇의 포도원”이었다. 러시아는 계속해서 남하정책을 쓰고 있었고, 일본은 대륙 정복의 발판기지로 조선을 노리고 있었으며, 중국은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미국은 조선을 아시아의 발판기지로 삼으려 했다. 이 때문에 한반도에서 전쟁의 포성이 그치지 않았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단순히 청나라와 일본군, 러시아와 일본군의 전쟁이라는 의미 그 이상이었다. 이들의 전투로 피해를 본 사람은 오히려 우리 민족이었다. 전쟁의 상흔은 참으로 깊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평양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shop)이 증언한 것처럼 당시 평양 근교는 십리길이 넘게 피비린내로 장렬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해 한반도는 또 다시 전쟁터로 돌변했다.


당시 의식 있는 한국의 지도자들이나 국민들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나라는 러시아도, 중국도, 일본도, 미국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믿고 의지할, 이 민족을 구원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의식이 백성들 사이에 팽배했다. 하나님께서 민족의 위기를 영적각성의 도구로 선용하신 것이다.


                      2. 전 세계적인 근대 부흥운동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선에서 비운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세계 여러 곳에서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세기 말 무디 부흥 운동, 1904-1905년 웨일즈 부흥운동, 1905년 인도 카시아 부흥운동, 1906년 아주사가 오순절부흥운동은 이 시대 발흥한 대표적인 부흥운동이었다. 이들 부흥운동 특히 19세 후반 영미 복음주의 부흥운동, 웨일즈 부흥운동,  인도 부흥운동은 한국의 영적각성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었다.


해외 선교를 동반한 19세기 후반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포문을 연 드와이트 무디(D. L. Moody, 1837-1899)는 3R로 집약할 수 있는 기독교 근본 신앙, 곧 죄로 인한 타락(Ruin by Sin),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Redemption by Christ), 성령에 의한 중생(Regeneration by the Holy Ghost)을 외치며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무디는 1876년 매세추세츠 노스필드의 여름 컨퍼런스에서 학생자원운동을 결성하여 “이 시대에 세계복음화”라는 모토로 수천 명의 학생들을 전 세계로 파송하였다. 무디 부흥운동을 통해 촉발된 해외 선교운동은 피어슨(A. T. Pierson, 1837-1911), 고든(A. J. Gordon, 1836-1895), 심슨(A. B. Simpson, 1843-1919), 모트(John R. Mott, 1865-1955), 스피어(Robert Elliott Speer, 1867-1947), 그리고 브라운(A. J. Brown)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나이아가라 사경회, 성결운동, 영미에서 진행된 케직사경회는 근대 복음주의 부흥운동을 저변 확대시키는 중요한 통로였다. 


상당수 선교사들이 무디 부흥운동이나 19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입국했다. 1889년 무디는 은둔의 나라 조선을 향해 떠나는 26살의 젊은이 게일(James S. Gale)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축복했다. “한국으로 떠나는 거지? 젊은이, 당당하게. 내 자네를 위해 기도할 걸세. 하나님이 자네를 축복할 거요.” 근대 복음주의 선교운동의 거장 피어슨은 자신이 발간하는 세계선교 평론지(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을 비롯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글을 거의 매호마다 게재하며 한국선교를 독려했다. 비록 당시 조선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의 힘없는 약소국이었지만 전 세계의 이목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3. 웨일즈와 인도의 부흥운동


19세기 영미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발흥한 웨일즈 부흥운동과 인도 부흥운동은 한국의 부흥운동의 발흥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이 두 부흥운동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가장 강력한 성령의 현시였다.


1903년 웨일즈 랜드린도드 웰스에서 첫 케직사경회가 열리면서 촉발된 웨일즈 부흥운동은 성령충만을 경험한 26세의 젊은 청년 이반 로버츠가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1904년 이후 웨일즈 전역으로 놀랍게 확산되었다. 무시무시한 죄악들이 고백되었고, 묵은 빚이 청산되었으며, 극장이 문을 닫아야 했고, 광부는 물론 무신론자들이 회심했으며, 술주정뱅이, 도적, 사기꾼들이 구원을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었다. 불과 5주 만에 2만명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다.


 웨일즈에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운동의 소식은 곧 인도, 한국, 중국으로 퍼져나갔다. 1905년 웨일즈 출신 장로교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인도 동북부의 아삼(Assam) 주 카시(Khasi) 구릉지대에 부흥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그 불길은 곧 회교도였다 기독교로 개종한 라마바이가 사역하는 묵티 지역으로 번져갔고, 다시 하이드 선교사를 통해 시알코트의 장로교로 옮겨 붙었다.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인도 전역의 많은 교회들이 놀랍게 성장하였고, 특별히 인도의 카스트 계급의 사람들 가운데 영적각성이 민감하게 일어났다. 


웨일즈와 인도에서 들려오는 부흥의 소식은 비운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던 좌절과 실의,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이 백성에게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돌이켜 볼 때 한반도를 둘러싼 비운의 역사, 해외에서 일고 있던 부흥운동은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였다. 오 주님! 19세기 비운의 역사 속에서 깊이 잠든 이 민족을 깨워주신 것처럼 다시 한번 이 민족과 교회를 깨워주옵소서!

         

목회와 신학 칼럼-2005년 3월.hwp[C:My Documents]-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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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08.0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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