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27)

부흥의 불길(1903∼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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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성 불길, 원산→개성→평양→목포로

1900년대 초 한국교회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선교사의 내한 이래 첫 10년간은 ‘고투의 날들’이었으나 청일전쟁 이후 수적 성장을 보이더니, 1900년 이후 도처에서 사경회(査經會)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도 변화의 시기였다. 청일전쟁(1984∼5), 을미사변(1895), 노일전쟁(1904∼5), 을사늑약(1905), 그리고 1910년의 강점으로 이어지는 국권상실의 과정은 역사의 아픔이자 좌절의 시기였다. 감리교 선교사 무즈(J R Moose)는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의지할 곳 도무지 없소”(Wei-chi hal kot tomochi oupso, There is altogether no place to trust)라는 조선인의 절망을 보았다며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기”가 도래했다고 썼다. 암울한 역사현실로부터 탈출하려는 욕구와 무언가 새로운 역사의 변혁에 대한 기대가 뒤엉킨 1900년대 첫 10년 동안 한국교회에는 몇 가지 형태의 신앙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03년부터 1907년에 이르는 신앙부흥, 그리고 1909년의 100만인 구령운동(救靈運動)이었다.

부흥이란

부흥이란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인데, 근본적으로 부흥은 생명(life)과 각성(awakening)을 의미한다. 부흥운동사가인 에드윈 오르(Edwin Orr)는 부흥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나 신앙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초대교회에서와 같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가운데 행하시는 특별한 역사’로 정의되어 왔다. 이렇게 볼 때 성장(growth)은 인간의 계획과 의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점진적인 발전이라고 한다면, 부흥(revival)은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현상’으로서 혁명적인 요소가 있다. 부흥은 영적 각성과 함께 수적인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에 웨일즈부흥(1859) 기간 중에는 부흥을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들, 사람들로 충만한 교회’라는 말로 정의하기도 했다.

이런 부흥이 1900년대 한국에서 재현된 것이다. 그 시원이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회개의 역사였다. 중국에서 일하던 남감리회의 화이트(Mary Cutler White)와 장로교의 매컬리(Louise H McCully)는 의화단(義和團) 사건을 피해 원산에 오게 되었는데, 이들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던 중 8월 24일부터 1주일간 기도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때 캐나다 출신의 감리교 선교사 하디(Dr. R A Hardie)는 효과적인 기도에 대해 강의하던 중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다. 회개는 자신에게도 큰 변화를 주었고, 회중 가운데서 회개의 역사를 불러 일으켰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였다. 이 작은 시작이 1903년 이후 이 강산을 부흥의 물결로 파도치게 만들었던 변화와 각성의 시작이었다. 부흥의 역사는 1903년 8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해 10월 스웨덴에서 온 프란슨 목사(Rev F Franson)가 원산에서 장감침(長監浸) 연합사경회를 인도했을 때에도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한국에서의 부흥

이런 부흥의 역사는 1904년 봄 원산에서 다시 재현되었다. 이때의 초교파 사경회에서 장로교 선교사 롭(Alexander F Robb)과 장로교의 전계은(全啓恩),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 목사도 성령충만을 경험했고, 부흥은 곧 개성 송도로 확산되었다. 그해 3월 서울에서 하디의 집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서도 놀라운 각성이 일어났다. 1905년에도 개성을 중심으로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부흥이 일어나고 있을 때인 1905년 9월 주한 네 장로교선교부와 두 감리교선교부 선교사들은 ‘한국복음주의 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고,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기도달력(Prayer Calender)이었다.

1903년에 이어 1906년에는 또 한 차례의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1906년 개성의 송도(松都)에서 부흥을 경험했는데, 크램(W G Cram)은 이때에도 회개와 죄의 고백이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평양주재 선교사들은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하디를 초청하여 ‘평양선교사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하디가 요한1서를 설교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때 성령께서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증거 하였다. 이 집회에서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셨다. 평양선교사 사경회 이후 서울에서 선교사연례대회(9. 2∼9)가 개최되었다. 미국에서 온 존스톤 목사(Rev Howard Agnew Johnston)가 인도 카시아지방(Kassia hills)과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보고했을 때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에게 영적 깨달음을 주었다. 그 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의 사경회, 10월에는 목포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 부흥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사경회)과 죄의 고백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쯤 평양에서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였던 길선주는 동료 장로인 박치록과 함께 1906년 9월경부터 교회에서 새벽마다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1907년 이후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회로 발전되었다. 1907년의 대부흥은 이런 과정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 역사신학)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09.0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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