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28)

1907년 평양서 일어난 대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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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친구 돈 사취” 고백이 대부흥 불 댕겨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평양, 개성, 서울, 목포 등지로 확산되었고, 1907년 1월에는 ‘평양 대부흥’으로 발전하였다. 대부흥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수많은 샛강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 큰 강물이 모여 대하(大河)를 이루듯 평양에서의 부흥은 그동안 간헐적으로 전개되어 왔던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결집된 것이었다.

그해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개최되었다. 1000여명이 회집한 이 집회에서 그래함 리, 스왈른,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블레어 등이 강사였다. 길선주 또한 이 사경회의 강사이자 이때의 부흥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낮에는 분반으로 나눠 성경을 공부하였고, 저녁에는 대중집회 형식으로 모였다. 1월 6일부터 시작된 저녁 집회에는 1500여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나 집회는 계속됐다.

사경회가 회개기도회가 되기까지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때로 분위기는 냉담했고,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월 12일 밤 블레어 선교사가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을 본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한 지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을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날은 더욱 분명했다. 영적 분위기가 회중을 압도했고 길선주 전도사가 “맛을 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라고 외치며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했음을 설교했을 때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14일에는 정오기도회를 열고 성령의 역사를 간구했다.

오늘 우리가 평양대부흥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는 사경회 마지막 날인 14일과 15일에 일어났다. 14일 저녁 길선주는 회중 앞에서, 1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로부터 재산을 관리하도록 부탁받았으나 그 일부를 사취했던 죄를 고백했다. 이 고백이 회개의 역사를 불러일으켰고, 평양대부흥의 내적 동인이 되었다. 길선주의 회개에 이어 청일전쟁 당시 자기 아이를 죽였던 한 여인이 살인의 죄를 고백했다.

이때부터 죄의 고백은 계속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은밀한 창고 속에 숨겨 두었던 죄를 하나씩 고백하기 시작했다. 회개의 기도는 바다에 이는 파도소리 같았다. 김양선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인간이 범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죄는 거의 다 고백되었다. 사람의 체면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하던 예수를 향하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다. 국법에 의해 처벌 받는다든가 또 바로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래함 리는 1월 15일자로 기록한 보고서에서 “어제 있었던 집회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집회였다”고 했다.

조지 맥쿤 또한 1월 15일자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모임이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스,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것도 능가할 것”이라고 썼다.

죄 고백이 행동으로 옮겨가다

15일 저녁에도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셨다. 선포된 말씀에 응답하여 교인들은 밤새워 눈물로 기도했고 온갖 죄악들이 숨김없이 고백되었다. 눈물은 가슴을 적셨고, 애통하는 회개는 격류를 이루며 평양의 거리를 파도치고 있었다.

이 회개의 물결을 목격한 여 선교사는 이렇게 썼다. “저런 고백들, 그것은 마치 감옥의 지붕을 열어젖힌 것이나 다름없다. 살인, 강간,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종류의 죄가 고백되었다.” 블레어는 이 당시 회개는 진정한 의미의 죄의 청산이라고 보았다. “대부흥의 회개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은 그 손해를 끼친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는 사과를 하고, 과거에 남의 재물이나 돈을 훔친 사람들은 그것을 갚아 주었는데 비단 교인들에게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18, 19세기 영국, 미국의 부흥사에서 예시된 바처럼 죄에 대한 회개는 부흥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평양 전역으로 퍼졌고, 교파를 초월하여 다른 교회로 그리고 학교로 확산되었다. 부흥의 불길은 곧 타 지방으로 번져갔다. 그래함 리에 의해 선천으로, 스왈른에 의해 광주로, 윌리엄 헌트에 의해 대구로 전파되었다. 길선주는 의주와 서울로 갔다. 또 평양신학교 학생들에 의해 부흥의 소식이 각지로 전파되었고, 부흥의 역사는 신의주, 선천 등 북한 지역과 대전, 공주, 대구, 목포 등 남한의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되어갔다.

성경연구와 기도, 전도, 봉사, 봉헌의 생활이 강조되었고 사경회가 열리는 곳에는 공적인 회개와 더불어 영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부흥은 1907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1908년에는 만주와 중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때의 부흥은,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과 내적인 신앙 성숙을 가져왔고,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사회변혁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03년 이후 1907년 대부흥은 교회연합운동을 가능케 했고, 한국교회의 성격을 주형하였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 역사신학)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09.1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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