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100년] (2)

중국 산둥성 옌타이 속 선교 유적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글 함태경 기자·김교철 목사, 사진=서영희 기자

‘산둥성 선교의 대부’ 헌터 코벳 선교사 “핍박하던 조선이 50년만에 중국에 파송하니 실로 감사”

박태로(朴泰魯) 목사 등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의 산둥(山東)성 발자취를 따라가던 중 옌타이에서 취재팀의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앞서 이곳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의 유적·유품이었다.

1일 옌타이(煙臺)산 ‘각국 주옌타이영사관 유적지’를 취재하던 중 산둥성 선교의 대부라 할 수 있는 헌터 코벳(郭顯德·Hunter Corbett) 선교사의 빛바랜 사진을 발견했다. 미국 영사관저 전시관에서 코벳 외에도 서양 선교사들의 다양한 활동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초기 한국 선교사 사진은 찾을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옌타이에 영사관을 설치했던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관련 국가의 인물 사진만 전시됐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나라 없는 조선인으로서 자국 영사관이 있을 리 만무했다.

취재팀은 옌타이 최대 병원 위황딩(毓璜頂)에도 가보았다. 옌타이에서 학교와 교회, 진료소를 세운 코벳 선교사가 펜실베이니아대 의학부를 졸업한 오스카 F 힐스(希爾思·Oscar F Hills) 박사 부부를 만나 대규모 병원 설립 계획을 밝히고 서로 의기투합해 만든 게 위황딩병원이다. 현재 대지 8만5000㎡(2만5712.5평), 건축면적 17만㎡(5만1425평), 1613병상에 달하는 이 병원 한쪽에 코벳 선교사 등 초기 병원 역사를 담아낸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1914년 설립 당시 의사라고는 힐스 박사 외에 로버트 던랩(鄧樂潘·Robert Dunlap)뿐이었다. 이 밖에 1명의 미국 간호사, 11명의 중국인 견습 남녀 간호사가 있었다. 견습 간호사는 같은 해 세워진 간호사훈련학교 학생이었다.

산둥성 선교 주도세력은 미국 북장로회다

박 선교사 등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당시 산둥성 선교는 미국 북장로회와 영국·미국 침례회가 주도하고 있었다. 북장로회는 산둥성의 3분의 1 이상, 미 침례회는 5분의 1 구역을 담당했다. 이어 영국 침례회와 스웨덴 침례회, 공리회(감리회) 순이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교회와 학교, 병원사역을 통해 교육, 출판, 노동자·농민의 복지, 공공보건 분야에 크게 공헌했다. 1920년까지 산둥에서 공식 활동하던 외국 선교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와 미국 선교회 9개, 영국 4개, 유럽 3개, 국제단체 4개 등이었다.

한국교회는 산둥성 선교 초기부터 미 북장로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훗날 산둥에 한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라이양(萊陽)노회는 미 북장로회 산하 산둥지역 일부와 교회들이 한국선교사회에 이양되면서 노회 조직으로 발전한 것이다. 즉, 한국 선교사들이 단기간 많은 열매를 맺은 뒤 독자적으로 만든 노회가 아니다.

미 북장로회는 1861년 덩저우(登州·현재 펑라이·逢萊)에서 산둥 선교를 시작했다. 이어 1862년 옌타이(煙臺), 1872년 지난(濟南), 1882년 웨이셴(燎?, 1890년 이저우푸(沂州府), 1890년 지닝저우(濟寧州), 1899년 칭다오(靑島), 1905년 이셴(沂縣), 1913년 허텅셴(和?縣) 등 선교지역을 9곳까지 확장해나갔다.

원래 산둥성을 밟은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는 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구츨라프(郭實獵·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이다. 그는 1831∼34년 몇 차례 중국 동해안을 여행하면서 산둥 사람들에게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나눠주었다. 구츨라프의 선교가 개인적, 단회성이었다면 미 북장로회 선교는 보다 집단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미 북장로회 대표 선교사로 존 리빙스톤 네비우스(倪維思·John Livingstone Nevius), 칼빈 윌슨 마티어(狄考文·Calvin Wilson Mateer), 왓슨 맥밀런 해이스(赫士·Watson McMillen Hayes), 코벳 등을 꼽을 수 있다. ‘네비우스 삼자(자립·자전·자치)정책’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네비우스는 원래 1854년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서 활동하다가 1861년 덩저우로 이동, 산둥 선교의 기수가 됐다. 그는 1890년 6월 7일 주한 서양 선교사들의 초청을 받아 내한, ‘네비우스의 선교사역의 방법’이란 책을 나눠주며 삼자원리를 설파했다. 그 결과 주한 장로교 선교공의회는 네비우스 이론을 선교정책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네비우스에 이어 상하이(上海)에서 약 5년간 활동하던 찰스 로저스 밀스(梅理士·Charles Rogers Mills)가 1862년 덩저우에 합류한 뒤 38년간 활동했다. 1864년에는 마티어 선교사가 덩저우에서 중국 내 최초의 현대 고등교육기관을 세웠고 1908년 칭다오에서 죽기까지 45년간 산둥 복음화에 힘썼다. 1882년 중국으로 파송된 해이스는 마티어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를 지난대학교로 발전시켰다.

코벳 선교사와 한국교회 인연 깊다

옌타이 선교는 1862년 닝보에서 온 의사 디비 베툰 매카티(麥嘉締·Divie Bethune McCartee)에 의해 시작됐지만 꽃을 피운 사람은 코벳 선교사다. 1864년에 옌타이에 도착한 그는 2년 뒤 첫 장로교회를 설립했다. 그의 전도를 통해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은 중국인은 왕즈(王治)이다. 왕씨는 200여 리의 먼 길을 찾아와 코벳 선교사에게 ‘도(道)’를 물었다. 그의 밑에서 2개월간 공부한 왕씨는 집으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왕씨의 부인은 조급하고 화를 잘 내던 남편이 복음을 통해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자 놀라 이렇게 고백했다. “기독교가 만약 이 같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사악(邪惡)하다고 할 수 없다. 나 역시 기독교인이 되겠다.”

코벳 선교사는 옌타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교 초기엔 중국인들에게 배척을 당하기 일쑤였다. 한지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만 복음을 전하는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1917년에 산둥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홍승한(洪承漢) 목사는 1920년 ‘신학지남’ 제3권 제2호에 실린 ‘중국 산동성 래양 선교소식’에서 코벳 선교사가 사역 초창기 경험했던 어려움에 대해 이 같은 기록을 남겼다.

‘산둥성인(山東省人)은 본시(本是) 본국인(本國人)이라도 타성인(他省人)이면 일층하대(一層下待)하는 습속(習俗)이 유(有)한 중(中)에 모양(貌樣)과 언어(言語)와 의복(衣服)이 부동(不同)한 외국인(外國人)은 불언가상(不言可想)이라 고(故)로 오십여년(五十餘年) 전(前)에 미국(美國) 목사(牧師) 곽현덕(郭顯德) 씨(氏)가 초래(初來) 전도(傳道) 시(時)에 무한(無限)한 묘시(?視)와 능욕(凌辱)과 핍박(逼迫)을 당(當)하였도다 혹(或) 한지(寒地)에서 경야(經夜)하기도 하고(객점(客店)에서 응접(應接)지 아니함으로)….’

코벳 선교사는 최초의 한국 선교사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916년 당시 82세였던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으로 선교지 시찰을 온 심익현(沈益賢), 이일영(李一永) 목사를 만나 49년 전 경험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자기(自己)는 지금(至今) 팔십이세(八十二歲)요 오십삼년전(五十三年前)에 옌타이(烟台)에 래(來)하였으며 사십구년전(四十九年前)에 평양성(平壤城)에 래(來)하여 선교사(宣敎師) 살해(殺害)한 사건(事件)을 문사(問査)하여 보았는데 기시(其時)에는 조선국(朝鮮國)에 신자(信者) 일인(一人)이 무(無)하더니 지금(至今)은 교회(敎會)가 왕성(旺盛)하여 중국(中國)에 선교사(宣敎師)까지 파견(派遣)을 하였으니 실(實)로 감사(感謝)하다.”(기독신보 1916년 8월 23일자)

이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로 이어진 1866년 제너럴 셔만(General Sherman)호 사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코벳 선교사가 1867년 1월 23일에 조선에 온 적이 있다는 고백이다. 제너럴 셔만호 사건이 발발하자 중국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윌리엄스는 미 함대사령관 로완(Rowan)에게 사건 규명을 명령했다. 이에 로완 사령관을 와추셋(Wachusett)호를 급파했고 코벳 선교사는 와추셋호 슈벨트 함장의 통역관으로 조선에 왔다. 토마스 선교사를 살해했던 조선이, 그것도 일제 강점기에 중국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사실에 코벳 선교사는 매우 놀랐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해했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09.1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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