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을 맞은 105인 사건의 의미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일환으로 시작된 105인 사건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살해 음모 사건을 조작하고 신민회에 깊이 개입하고 관여했던 한국의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한국의 민족 지도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한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세력의 원천이 되는 한국 기독교를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주 관심사였습니다. 신민회에 참여하였던 선천신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대거 체포되어 투옥되고 유죄 언도를 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10월 12일이 정확히 지금부터 100년 전 105인 사건으로 신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갑자기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날입니다. 105인 사건 100주년을 맞아 이 사건의 배경과 과정과 성격을 조명하는 것은 한국교회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105인 사건이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나라사랑과 민족애를 온 몸으로 실천에 옮겼던 구체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보여주듯 한국교회는 겨레와 함께 한 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는 민족의 아픔을 방관하지 않고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고 민족과 아픔을 같이 했습니다. 특별히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 같은 생각과 이상을 갖고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105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판단하건대 105인 사건은 다음 몇 가지 면에서 한국교회 특별히 한국장로교회와 민족운동과의 관계를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첫째, 민족운동에 기독교가 앞장섰고, 실제로 초기 민족운동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투옥된 지도자들 절대 다수가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둘째, 투옥된 이들 기독교인들 가운데 압도적인 숫자가 장로교인들이었습니다. 장로교가 일제의 주 타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셋째, 이들 기독교인 절대 다수가 선천과 평양 등 관서지방에서 살거나 사역하는 이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이 가장 왕성하게 확장되던 그 지역에 기독교 민족애가 가장 강하게 일어났다는 것도 한국교회와 민족운동의 관련성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넷째, 선천신성학교는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일제는 신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을 대거 구속하고, 심문조서에 나타나듯이 심문을 통해 이승훈 양준명 등 신민회 지도자들과의 관련성을 캐려고 했습니다. 일제는 한편으로 민족운동 조직을 파쇄하고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세력을 말살하려고 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와 민족 앞에 너무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면서도 그동안 한국근대사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니 폄하를 받아 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05인 사건 100주년을 맞아 이 사건의 발단과 과정과 결과를 포함한 105인 사건 연구를 통해 한국교회 특별히 한국장로교회와 민족운동과의 관련성을 조명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10.07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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