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 대학 설립 이야기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미국 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사람 가운데 한명인 데이빗 브레이너드는1718년 커네티컷에서 출생했다. 미국에서 1차 대각성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1739년 예일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입학 얼마 전에 데이빗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깊은 영적 체험을 했다. 그러나 그가 예일대학에 입학했을 때 예일대학교의 영적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하버드 대학교가 유니테리안 손에 넘어가면서 예일대학교가 설립되었지만 종교적인 활동은 학생들에게 그렇게 깊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학생들의 상당수가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술파티를 즐기고 그중에는 노름에 빠진 학생들도 많았다.

이런 예일대학교 영적 상황에 일대 도전을 준 인물이 미국 1차 대각성운동의 불씨를 가지고 신대륙에 온 조지 휘필드였다. 1740년 폐결핵 때문에 데이빗이 집에서 쉬고 있는 동안 약관 25세의 조지 휘필드가 예일대학에 와서 학생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그해 11월 그가 예일대학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그 이듬해 2월까지 조지 휘필드가 던진 메시지의 결실들이 예일대학 안에 눈에 띠게 나타났다.

이런 영적 움직임이 예일대학교에 나타나고 있던 1741년 봄 아일랜드 출신 미국 부흥운동 지도자 길버트 테넌트가 예일대학에 와 설교를 통해 학생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예일대학교 학장 토마스 클랩과 재단이사들은 부흥운동 지도자들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대각성운동이라 알려진 영적부흥을 지지하는 학생들을 정죄하고 만약 예일대학교 어떤 학생이 학장, 재단이사 또는 선생들을 위선자, 회심받지 못한 자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전체 학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다시 그런 실수를 반복하면 제적을 시킨다는 학칙을 통과시켰다.

1941년 예일대학교 3학년이 된 데이빗은 동료 학생들과 영적각성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며 여러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데이빗과 토론하던 친구가 한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데이빗은 “그는 이 의자보다도 은혜가 없는 사람이다”고 응수했다. 신입생 한명이 이 이야기를 옆에서 들었고 곧 학장 클랩이 알게 되어 데이빗 브레이너드를 학장실로 불렀다. 학장 크랩은 그에게 학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을 명령했다. 데이빗은 그렇게 말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사적으로 한 말을 공적으로 학생들 앞에서 사과한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며 학장의 요구를 거절했다. 학장이 볼 때 그것은 일종의 반역으로 여겨졌고, 즉시 브레이너드를 예일대학교에서 제명시켰다.

바로 그 즈음 하바드 예일 혹은 유럽의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자는 목사로 교회에서 임직을 가질 수 없다고 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학교에서 제명당한 데이빗이 목사로 임직을 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그 후 데이빗은 클랩 학장에게 상황을 다루는 데 있어서 자신이 미숙했다는 사실, 학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할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청원은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뜻은 따로 있었다. 대각성운동에 동정적인 일련의 목회자들이 데이빗 브레이너드에게 설교할 수 있도록 강도사 자격을 인허하고 그를 미국 인디언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사로 임명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수년동안 그는 매사추세츠, 뉴저지, 펜실바니아에 거주하는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인디언들 가운데 놀라운 영적 결실이 나타났다.

예일대학교에서의 제명은 인디언 선교 그 이상의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예일대학교를 졸업한 장로교 목사, 조나단 딕킨선과 아론 바 경은 예일대학교에 재입학하려는 브레이너드의 노력에 관심을 갖고 지원했으나 예일대학교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브레이너드의 재입학 거절로 장로교 지도자들은 예일대학에 깊이 실망했고, 목회자 양성을 위해 자신들의 학교를 시작하겠다는 기왕의 결심을 더욱 강화시켰다. 1741년 프린스톤대학의 전신 뉴저지 대학이 조나단 딕킨슨의 집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집에서 29세가 된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그의 생애 마지막 몇 개월을 살았다. 브레이너드는 뉴저지 대학의 첫 학생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브레이너드의 예일대학교에서의 제명이 프린스톤 대학의 설립을 촉진시킨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바드대학이 유니테리안 손에 넘어가면서 예일대학이 설립되었고, 예일대학에서 브레이너드가 제명됨으로 인해 뉴저지 대학 설립이 서둘러 진행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11.05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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