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가슴에 품었던 목회자, 겨레와 함께 한 교회

낙춘 강규찬과 평양산정현교회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비약인지 몰라도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조선의 역사는 한 마디로 비운의 역사였다. 비운의 역사 속에서 희망을 잃은 조선민족과 사회를 이끌며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어 온 중심 세력은 역시 기독교였다.

기독교는 한국근대화의 원동력이었고 동시에 사회와 민족의 희망이었다. 본래 민족의식이 강했던 이 땅에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민족애와 신앙이 어우러져 놀라운 기독교민족운동이 강하에 일어났다. 김양선의 말대로 “한국의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은 기독교회와 더불어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사상을 기본으로 한 것이므로 기독신자들은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타민족의 부당한 구속과 압박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민족정신이 크게 흥기 진작되었고 그것은 다시 독립운동에로 약진되었다.

시드니 알스트롬이 미국종교사(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에서 지적한 것처럼 1774년 전후 독립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미국 장로교회는 회중교회와 침례교회와 더불어 미국 독립을 적극 지지하였다. 장로교회 총회장을 지낸 위더스푼(John Witherspoon, 1723–1794)은 미국독립운동의 서명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교회 역시 한국의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적지 않게 공헌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보면 앞장선 상당수의 지도자들이 기독교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실제로 1910년 해서교육총회 사건, 1911년 신민회 및 105인 사건, 1914년 국민회 사건, 그리고 1919년 삼일운동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한국장로교회는 한국민족운동의 구심점에 있었다. 105인 사건으로 기소된 인물들 중 절대 다수가 장로교인들이었고, 1919년 삼일운동의 서명자 33인 가운데 7명이 장로교 출신이었으며, 그 중 평양신학교 출신이 다섯 명(평신에서 수학했던 이승훈까지 포함할 경우)이나 되었다. 단순히 수적으로만 장로교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선천 신성중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일제에 의해 105인 사건의 요주의 인물들로 낙인이 찍혔고, 평양과 기타 지역에서 장로교회가 기미 삼일독립운동을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해 나가는 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족운동 및 독립운동사에서 한국장로교회 특별히 평신 출신들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거나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만열 교수와 윤경로 교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초기 기독교와 민족운동과의 관계를 심도 있게 조명하였다. 특별히 윤경로 교수는 자신의 학위 논문을 통해 신민회와 105인 사건의 정체성을 심도 있게 밝혔다. 하지만 이들의 공헌과 기여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국교회와 민족운동의 조명 과정에서 한국장로교회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면이 있다.

기독교 민족애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은 바로 평양대부흥이 발흥했던 평양과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선천이었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과 “한국의 예루살렘” 선천 이 두 예루살렘은 평남과 평북의 기독교를 대변했고, 서북기독교의 놀라운 기적을 배태하는 원동력이었다. 토마스의 순교의 피가 흐르는 대동강이 관통하는 평양에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이길함(Graham Lee) 소안론(William Swallen)이 들어가 생명을 내건 복음전파로 평양에는 복음이 놀랍게 확산되었다. 예일대학교 출신 위대모(魏大模, Norman C. Whittemore, 1870-1952), 의료선교사 샤록스(A. M. Sharrocks, 射樂秀), 파크 대학 출신 조지 매큔(George S. McCune, 1872-1941, 윤산온) 선교사가 개척하고 민족운동의 주역 양전백이 이들과 동역하였던 선천에서 복음에 대한 민중들의 반응은 어느 지역보다 더 뜨거웠다. 초기 기록을 보면 복음에 대한 반응은 선천이 평양보다 더 강했다. 그만큼 복음의 결실도 참으로 많았다. 이런 이유로 선천은 평양에 앞서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충분했다.

선천은 양전백, 백낙준, 박형룡, 정석해, 방효원, 방지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인재 양성의 배후에는 선교사들과 양전백으로부터 신앙을 전수 받고 애국심과 신앙심을 가지고 제자들을 양성하여 다음 세대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감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한 명이 강규찬 목사였다. 한학자, 독립운동가, 목회자 강규찬(姜奎燦, 1874-1945)은 한국근대화와 민족운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전택부는 강규찬의 생애와 족적을 다음과 같이 예찬했다:

“위대한 목회자이며 애국자인 강규찬 목사는 1874년 선천에서 출생하여 16세 때 이미 한시(漢詩)뿐만 아니라 천문지리에도 능통한 대 유학자가 되었다. 1908년, 즉 그가 35세 되던 해부터 선천신성학교 한문선생이 되어 그의 문하생으로서는 백낙준, 박형룡, 정석해 같은 석학들이 수두룩하다. 1911년 그 유명한 백오인 사건 때에는 양전백, 이승훈 등과 함께 투옥되어 2년간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 다시 복직은 되었으나 심한 감시와 압력 때문에 1914년 신성학교를 그만두고 선천북교회 조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제 2의 삶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평양신학교에 입학, 1917년에 졸업하면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뒤 곧 평양 산정현(山亭峴)교회의 목사로 임명받아 목회를 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숭덕(崇德)학교 마당에서 열린 군중대회 때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대 열변을 토하다가 잡혀 다시 투옥되어 2년간 복역을 했다. 출옥 후 1933년까지 평양산정현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선천으로 귀향하여 말년을 쓸쓸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는 1945년 8•15해방을 4개월 앞둔 4월에 선천에서 작고하셨는데, 한 가지 무척 아까운 것은 그가 손수 기록해 두었던 여러 가지 역사기록들과 목일지, 설교 원고 같은 것을 이제는 하나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그의 “백오인 사건에 관한 수기”는 정말 아깝다.”

“위대한 목회자이며 애국자,” “한시(漢詩) 뿐만 아니라 천문지리에도 능통한 대 유학자,” “그의 문하생으로는 백낙준, 박형룡, 정석해 같은 석학들이 수두룩하다”는 말이 눈에 띤다.

한학자로서의 강규찬은 독보적인 인물이었으며, 민족운동가로서의 강규찬은 1911년 105인 사건과 1919년 삼일운동에 깊이 관여하여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한국교회로 하여금 민족적 책임의식을 갖도록 촉구하였다. 이와 같은 민족의식은 그가 1917년부터 1933년까지 16년간 산정현교회를 시무하는 동안 산정현교회를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원동력이었다.

이 기간 그는 기독교학교운동, 사회계몽운동, 연합운동, 민족운동에 앞장섰고, 산정현교회 조만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물산장려운동을 막후에서 후원하며 몸소 나라사랑과 기독교 민족애를 실천했다. 특별히 1919년 삼일운동 때는 적극적으로 삼일운동의 선봉에 서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켜주다 투옥되어 14개월간 서대문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고, 출옥 후에는 산정현교회를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그의 생애는 공교롭게도 일제의 대한 침략기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강규찬은 강대국들의 개항 압력이 거세지던 1874년 8월 15일(음) 부친 강원복(姜元福)과 모친 박무사(朴無嗣) 사이에 선천에서 출생했다. 자(字)는 내문(乃文)이고 호는 낙춘(樂春) 또는 하은(荷恩)이다. 강규찬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창립 100주년 신성학교사에는“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혀 한학자(漢學者)로서의 명성이 높아, 1909년 신성학교 교사로 부임하기 전에는 주로 지방의 서당과 여러 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린 시절 강규찬은 당시 여느 소년들처럼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한문교육을 받았다. 한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남달랐고, 자연히 젊은 시절부터 한학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중국 고전을 완전히 통달”하고, 복잡한 중국 고사성어(故事成語), 논어나 맹자 그리고 다른 중국 성인들의 어록을 늘 암기했다. 22세부터 지방의 서당과 여러 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쳐 오다 35세 되던 1909년 신성학교 한문교사로 부임했다. 다음은 강규찬이 1912년 1월 25일 일경(日警) 앞에 밝힌 자신의 이력이다:

“원래 나는 어렸을 때부터 24세까지 한문을 배웠고 농업을 하였으며, 23세 때 부터 24세까지 철산에서 서당을 열었으나 30세까지 농업을 하였으며, 또 31세부터 33세까지 철산군 영천에서 서당을 열었고 그로부터 35세까지 의천 가물암 소학교 교사로도 있었으며, 35세 되던 해 가을부터 지금까지 신성중학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위 기록에 있는 대로 그가 신성학교 교사로 부임한 것은 1909년 35살 때였다. 그가 1912년 1월 일경 앞에서 7년 전에 장로교회에 입교했다고 고백한 것을 고려할 때 그가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은 러일전쟁이 끝난 1904년 혹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으로 여겨진다. 당시 세례를 받아야 입교했던 것을 고려할 때 실제 그가 주님을 믿기 시작한 것은 이 보다 약간 더 앞설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1903-4년경부터 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강규찬이 신성학교에 부임할 때는 신성학교는 불과 3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였다. 신성학교는 선천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양전백이 김석창 노창권과 함께 1906년 7월 선천북교회당에서 처음 설립한 기독교 학교였다. 초기 신성중학교에 입학하는 입학생들은 최소자가 20세였고 연장자의 경우 25세가 넘었으며, 교복과 교모도 없었고 이들 모두 한복 차림으로 삭발한 사람들이었다. 1909년과 1910년에 각각 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가진 지도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신성학교 초대교장은 위대모(1906-1909)였고, 2대 교장은 윤산온(1909-)이었다.

강규찬이 신성학교 교사로 부임했을 때 그 학교 교사진은 교장 윤산온을 제외하곤 모두 한국인이었다. 물리 화학 국문법은 숭실중학 졸업생 곽태종, 수학과 기하학은 선우혁(鮮于爀), 성경은 홍성익, 길진형, 한문과 작문은 강규찬, 일어에 임상혁, 법학통론에 최용화(崔容華), 체조에 신효범, 구약사와 부기에 윤산온, 사무처 총무에 장시욱(張時郁)이었다. 위대모, 윤산온, 양전백으로 이어지는 정통 장로교 신앙과 민족독립정신의 이상은 신성중학교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909년 강규찬의 신성중학교 교사로의 부임은 신성중학교의 이상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그것은 강규찬이 이미 한시와 한학에 깊은 조예를 갖고 민족정신의 중요성을 어릴 때부터 훈련받고, 젊어서는 자강회와 신민회에 적극합류하며 일제의 한국 찬탈에 맞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교사로 자신의 민족적 책임을 기독교 정신 속에 구현하며 교사직에 충실하던 강규찬은 1911년 10월 12일 소위 105인 사건으로 동료 교사 7명, 20명의 학생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놀라운 세력으로 발흥하는 한국교회를 제거하기 위해 일제가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살해 음모 사건을 조작한 후 윤치호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 민족지도자 105인을 구속하였을 때 강규찬은 선우혁, 곽태종, 홍성익 등 다른 신성학교 동료 교사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감옥에 투옥되었다. 강규찬은 1심에서 6년을 선고받았다 2심에서 무죄를 언도받고 1913년 풀려난 후 신성중학교 교사로 복직했지만 일제로부터 유무형의 핍박을 받아야 했다. 그는 일제의 집중적인 감시로 더 이상 신성학교 교사로 봉직할 수 없었다. 그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부르심은 거룩한 소명이었고, 그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성공적으로 목회사역을 감당했다.

강규찬이 한국교회에 남긴 족적 가운데 그의 목회사역은 그가 한국교회에 남긴 소중한 사역 가운데 가장 빛나는 공적이었다. 그것은 그가 가장 큰 교회를 이룩했기 때문이 아니라 1917년부터 1933년까지 16년이라는 목회 사역 동안 자신이 시무하는 산정현교회를 복음 본연의 사명을 한국에서 가장 충실하게 감당하는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산정현교회는 복음의 순수성계승과 복음전파의 사명은 물론 복음의 대 사회적 민족적 책임 구현을 통해 한국교회와 민족을 깨우는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물산장려운동, YMCA, 기독교학교운동, 유치원과 유치원 사범과 설립, 조선일보운영, 그리고 신사참배반대운동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공적의 배후에는 변함없이 산정현교회를 섬기며 보호막 역할을 했던 번하이젤(Charles F. Bernheisel, 편하설)과 그의 아내 헬렌 컥우드(Helen Blauvelt Kirkwood) 선교사 부부가 있었다. 또한 강규찬의 리더십을 존중하며 그와 한 뜻으로 복음 본연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던 산정현교회 당회와 교우들이 있었다. 이들의 헌신적인 지원과 협력이 없었다면 산정현교회의 그 같은 영광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강규찬이 1917년부터 1933년까지 시무하는 기간 동안 산정현교회는 평양만 아니라 전국교회의 모델이었다. 1906년 설립되어 평양대부흥운동을 경험하고 1910년 한일합병, 1911년 105인 사건, 1919년 3•1독립운동, 그리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식민 통치하 고난의 시절 산정현교회는 사회와 민족을 가슴에 품고 복음 본연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며 한국사회와 민족을 깨웠다. 이 기간 산정현교회는 복음의 대 사회적 민족적 책임을 너무도 훌륭히 감당했다.


출처: 박용규, 강규찬과 평양산정현교회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1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11.29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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