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과 제네바의 교회 정치

이은선 교수 (안양대학교 기독교문화학과)

 

칼빈은 2세대 종교개혁자로서 장로교회 정치 제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가 성경적인 모습으로 개혁될 것을 기대하였으므로, 교황제와 성직자 계급제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신분적 구별을 무너뜨리기 위한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하였을 뿐 중세와 다른 교회의 직제에 대한 적극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개혁을 시작하였던 츠빙글리는 시의회와의 협력을 통해 권징을 시행하려고 1525년에 결혼법정을 조직하였다. 칼빈의 교회 직제 이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바젤의 개혁자였던 외콜람파디우스와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처였다. 이들이 교회 직제를 마련하는데서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교회의 거룩을 회복하기 위한 직제였다. 특히 부처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1530년대 초반부터 장로직을 두고 치리를 시행하고자 하였고, 칼빈은 1538년부터 41년까지 이곳에 체류할 때 장로직을 알게 되었다.


칼빈은 이러한 선구자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여 성경에 근거한 장로교회의 4중 직제를 가장 확실하게 마련하고, 1541년에 제정된 제네바 교회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시행하였고, 그와 함께 교회의 거룩을 회복하기 위하여 consistory를 만들었고, 목회자들의 영적 성숙과 도덕적 성결을 위해 매주 금요일마다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목사회(venerable company of pastors)와 3개월마다 모이는 시찰회를 만들었다.


칼빈은 이러한 4중 직제를 만들면서 초대교회의 직제를 회복하여 목사와 장로와 집사 직분과 함께 신학교 교수인 교사직을 확립하였다. 칼빈은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 장로를 평신도의 대표직분으로 만들었다. 초대 교회를 지나 중세에 이르면서 한 명의 감독과 다수의 장로가 있는 구조로 바뀌면서 장로는 사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집사들도 사제가 되는 과정의 하급 성직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중세에는 장로라는 명칭은 사용되지도 않았고, 집사는 부제 대부제 등의 명칭으로 사제를 돕는 자라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칼빈은 성경에 근거하여 집사와 장로를 평신도의 직분으로 회복시켰다. 그리고 장로 가운데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를 구분하여 가르치는 장로를 목사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의 직분은 목사, 장로, 집사와 함께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직무를 감당하는 교사의 4중 직제가 확립되었다.


칼빈은 1541년에 제네바 교회법에 이러한 4중 직제를 마련하면서, 목사, 장로, 집사의 모든 직분을 선거로 뽑도록 제도화하였다. 로마 가톨릭에서 모든 직제가 중앙집권화되어 있고, 교황과 주교가 사제들을 임명하던 것이 성경에 어긋난다고 보아, 교회의 모든 직제를 선거로 선출하였다. 칼빈은 이러한 선거제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이 성취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장로는 매년 선거로 뽑도록 하였다. 장로는 교회법에서 정한 임무를 제대로 시행했는지를 교인들이 평가하도록 매년 선거로 뽑도록 하였다.


칼빈은 목사와 장로로 장로회를 구성하여 제네바 성도들의 영적인 성숙을 돌보면서 감독하도록 하였다. 장로회는 매주 목요일마다 열려서 성도들의 삶에 필요한 목회적인 상담도 하고, 교육도 하면서, 권징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권징을 하였다. 칼빈을 비롯한 목사들의 설교와 성실한 목회 활동과 함께 이러한 장로회의 활동을 통하여 제네바 시는 거룩한 도시로 변하여 갔고, 그리하여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낙스는 제네바를 그리스도 이후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하였다.


집사들도 선거로 선출하였는데, 집사들도 그들의 근무상태를 살펴보아 계속적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하도록 하였다. 집사들은 당시 제네바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집사직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하여 생활하던 구빈원(hospital)의 운영경비를 조달하는 재정집사(procurer)와 구빈원에 거주하여 실질적으로 봉사를 하는 봉사집사(hospitaller)의 두 직분이 있었다. 칼빈은 이러한 4중 직분과 장로회는 통하여 제네바 시의 실질적인 개혁을 이루어나갔다.


이와 함께 칼빈은 제네바 목사들의 교리적인 통일과 함께 영적 성숙을 위해 목사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매주 금요일에 모여 한 목사가 성경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 설교가 끝난 후에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여 적용했는지를 토론하면서 교리적인 통일을 기하면서 동시에 올바른 성경 해석과 적용 실력을 통해 설교의 능력도 높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3개월마다 목사들의 도덕적인 삶을 점검하고 살피기 위해 시찰회를 조직하였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사회와 시찰회를 통하여 목사들의 영적인 수준과 도덕적인 수준을 높이고자 하였고, 동시에 장로회를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집사직분을 통하여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신학교 교수들을 통하여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게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다양한 직제와 모임을 통하여 제네바 교회뿐만 아니라 제네바 시 자체가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로 개혁되어 갔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12.07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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