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과 신앙 이야기: <3>

잊혀진 사경회의 추억


한철희 교수  (나사렛대학교 기독교교육학)


우리 조상이 예수를 만났던 순간은 독특하였다. 단군이 도읍을 정하였다는 평양 땅에서 장엄한 상견례를 치루었다. 현재 만수대라고 불리는 옛 장대재는 평양 고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널다리골에 교회를 개척하였고, 1893년에 이 장대재 언덕 마루에 훤칠한 기와집을 짓고 이사 왔다. 이름하여 장대현교회이다. 기역자로 날아갈 듯 높게 지어올린 예배당에는 1500명이 빼곡히 들어 앉아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민비가 시해되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와중이었다.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었다. 당시 조선의 성도들은 두 가지 일에 전념하였다. 성경을 읽기 위하여 한글을 배우는 ‘국문공부’운동이다. 또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성경을 배우는 ‘사경회(査經會)’ 운동이었다. 사경회란 글자 그대로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이었다. 본시 경전과 서책을 존숭하던 조상들이다. 선교사 입국 전에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있던 독특한 민족이다. 나라를 잃게 될 위기에서 우리 글 성경을 만나게 된 조상들은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사르는 간절함으로 매달렸다. 서당에서 경서(經書)를 한 자 한 자씩 배우고 암송하듯이, 선교사들은 신도들에게 성경 본문을 한절 씩 읽어가게 하고 이를 설명해 주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성경 각 권을 공부하게 되었고, 점차 사복음서, 예수의 생애, 바울서신, 사도신경 등으로 넓혀갔다. 대동강, 을밀대, 능라도가 내려 보이는 교회에 앉아, 상투 틀고 비녀 꽂은 일천여 우리의 선조들은 들꽃 만발한 갈릴리를 거닐던 성자 예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열어 놓은 뜰 창으로 청류벽, 모란봉을 넘어 온 강바람을 타고 진한 아카시아 향기가 조상들의 가슴에 축복처럼 내려앉았을 것이다.

평양 사경회에 참석하려고 압록강 가의 삭주 창성 지방의 여인네들이 행리를 머리에 이고 또 등에 지고 칼바람 부는 300리 길을 걸어왔다. 사경회 소식을 들은 한 형제는 전라도 목포 무안지방에서 괴나리봇짐에 의지하여 평양성까지 찾아왔다. 10일간의 성경공부에 참석하기 위해서 처녀들은 머리에 쌀자루를 이고 수백리 길을 걸어 왔다. 아낙네들은 등에 어린아이들까지 업고 왔는데, 그들의 손에는 때 묻고 닳은 한글 성경이 쥐어져 있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씨의 설명이었다. 실로 ‘동방의 예루살렘’을 향한 장대한 행렬이었다. “저희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편 84:7). 사경회 마지막 날은 온 성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도자와 함께 성경을 암송하였다고 한다. 곁에선 선교사들은 60~70대 노인들이 한글 성경을 줄줄 외우는 모습과 맹인 백사겸이 사복음서 전체를 암송하는 모습에 깊은 충격과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올해로 101세를 맞은 방지일 목사는 장대현교회를 섬기던 전도사였었다. 그는 담임 길선주 목사가 요한계시록 22개장을 낭랑한 목소리로 암송하는 장면을 단지 곁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감동이었다고 회고한다.

드디어 1907년 1월 2일 밤이다. 낙랑군의 포효가 멎은 지 오래다. 이홍장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순간에는 쓰시마해협의 함포소리도, 일본군의 기미가요도 들리지 않는다. 그 순간에는 오직 울부짖는 기도소리 뿐이다. 어두워진 평양의 하늘 위에서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조선의 아낙네들과 흰 두루마기 차림의 중년 남자들이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부르짖는다. 그것은 차라리 화염이었다. 토설하는 울부짖음은 위를 향해 타오르는 불의 혀였다. 입에서 발설된 고백의 언어들은 하늘을 조각조각 깨뜨리며 한마디씩 또박또박 여호와의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모임을 인도하였던 선교사들의 얼굴은 두려움에 창백해졌고, 허리가 끊어질듯 뒤틀려오는 고백의 언어는 고치의 명주실처럼 끝을 모르고 터져 나온다. 혹독하게 추운 평양의 겨울밤은 폭풍 같은 기도의 열기로 하얗게 지새워졌다. “그 기도 소리는 마치 거대한 폭포수 같았고, 거대한 기도의 물결은 하나님의 보좌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였다.” 전 세계로 타전한 선교사들의 보고였다.

누가 이 부흥에 불을 지폈는가? 성경이라는 태반(胎盤)에서 출생한 자연스러운 축복이 아닐까? 초기 선교사 클라크(C. A. Clark, 곽안련)는 사경회를 이렇게 정의한다. “한국교회는 성경 위에, 정확히는 성경의 본문위에 건립되었다. 놀라운 사경회제도가 한국교회를 세계 극소수의 정예교회 가운데 하나로 훈련시켜 놓았다.” ‘부흥이여 다시 오라’는 염원은 논리적인 모순이요, 작위적인 갈망일지도 모른다. 성경 본문과의 만남이 우선이다. 글(文)이 아닌 영(Spirit)의 현존과 마주칠 때 죄악의 위기상황을 깨닫게 된다. “부흥”은 단순히 결과일 뿐이다. 바람에 묻어오는 봄의 향기와 함께 불현듯 사경회가 그리워진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12.08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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