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과 신앙 이야기: <4>

나가사키로 가는 길


한철희 교수 (나사렛대학교  기독교교육학)


지금 일본은 울고 있다. 기모노를 마다하고 주저앉아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해 애곡하듯 머리에 재를 날리고 있다. 벚꽃은 곧 만발하겠지만 한번 피어오른 죽음의 연기는 널부러진 삶의 잔해들 위에 저주의 주문을 걸어놓고 숨어버렸다. “하나님은 이 참혹한 고통의 순간에 어디 계시는가?”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의 주인공이 450년 전에 직면하였던 질문을 다시 떠올린다. 오랜 세월을 인고하였던 센다이 교회 성도들은 오늘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1549년 8월 15일 예수회 신부 사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하였다. ‘봉건영주들의 화려한 기독교의 시대’를 열었다. 천하 통일의 야심을 가졌던 오다 노부나가는 불교의 영향력을 꺾기 위해 기독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성 인근 영지를 주어 교회를 짓게 하였다. 예일대 역사가 라토렛에 의하면 선교 절정기에 60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국력을 불안하게 여기던 히데요시는 점차 기독교인 부하들의 충성을 의심하게 되었고 마침내 박해의 칼을 빼들었다.

1597년 2월 5일 아침, 일본 남단 나가사키에는 따사로운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멀리 포르투갈 무역선들이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니시자카 언덕 위에 26개의 십자가가 세워졌다. 십대 소년들부터 50대 중년까지의 신자들은 창끝이 심장을 관통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찬송과 기도로 장렬하게 순교를 맞이하였다. 청결한 마음으로 하늘을 사모하던 그들의 눈앞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현존이 함께 하였다(마5:8). 영적 생명력을 간직한 신선한 새벽의 시대였다. 이때부터 전국의 기리시탄(기독교인)들은 나가사키에서 공개 처형되기 위해 수천리 길을 호송되어 왔다. 멀고도 험한 순교의 행렬이 시작된 것이다.

예수상을 밟고 지나가게 하는 후미에(성상 밟기)로 신자를 가려냈다. 거부한 신자 55인이 니시자카 언덕에서 화형과 참수를 당했다. 인근 시마바라 반도에는 운젠 온천이 있다. 바위틈에서 뿜어 나오는 매캐한 유황냄새와 사방에서 들리는 물 끓는 소리, 늘 자욱한 수증기 때문에 지금도 지고쿠(지옥)라고 불려진다. 64명의 신자들은 상처 난 맨 살 위에 매일 120도의 유황물을 끼얹는 고통을 눈살 한번 찌푸림 없이 견디고 순교했다. 바닷가에 묶여 만조를 기다리는 신자들 어깨 위에 물새가 내려앉으면, 힘겨운 눈을 들어 멀리 하늘가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가장 잔인한 일은 아나쭈루시(ana tsurushi)였다. 이마에 상처를 내고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몇 날이 못되어 대뇌의 변연계에 극심한 혼란을 야기 시킨다. 이것은 「침묵」에서도 중요한 모티프였다. 옥사 담장 밖에서 밤마다 들려오는 무죄한 신자들의 코 고는듯한 신음소리는 신부의 배교를 담보로 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박해의 목표가 처형이 아니라 배교였다는 것이다. 배교자가 나타나면 형리들은 춤을 추며 관가로 달려간다. 순교를 막기 위해 형장에 의사까지 배치하였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즉시 석방이었다. 그러나 동경 소재 소피아대학교의 자료에 의하면 순교를 택한 신자가 4만 명에 달하였다.

삶의 길을 찾아 나선 신자들도 있었다. 신앙의 대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가사키 인근 깊은 산과 섬으로 숨어들었다. 이른바 가쿠레 기리시탄(숨겨진 기독교인)들이었다. 목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별자리를 보고 스스로 교회력을 만들었고 찹쌀 모찌로 성만찬을 숨겨나갔다. 7대가 지나면 성직자가 다시 온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을 3년 앞둔 1865년 3월 17일 오우라 예배당 헌당식을 마친 오후에 일단의 남녀가 조심스럽게 교회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220년 동안 숨어살던 기리시탄의 자손들이 나타난 것이다. 중년의 한 부인이 다가와 손을 가슴에 대며 속삭였다. “여기 있는 우리들 모두는 당신과 같은 마음입니다.” 2만의 신자들이 교회의 품으로 돌아 왔다.

신앙에도 주기가 있다고 한다. 사계절처럼 순환한다는 것이다. 부흥의 계절은 언제나 봄이요 새벽이었다. 나사렛교회가 염원하는 교회상도 “초대 신약교회에 나타났던 단순성과 영적 파워”(Manual 25)이다. 부흥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거룩한 열망인 것이다. 신앙공동체가 쇄락의 가을로 돌아서는 계기는 “가난한 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망각 한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부 지배하의 일본 기독교는 청년의 신앙이었다. 단순성과 순수성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새벽이요 봄의 문턱에 서 있었다. 필경 나사사키에서 죽은 4만의 순교자들에게는 천국 보좌 앞에서 흰 두루마기가 주어졌을 것이다(계6:9-11). 그러나 이 땅에 남겨진 교회는 유래 없는 혹한과 폭설과 맞닥뜨려졌고 때 아닌 긴 동면에 들어가야 했다. 과연 일본이라는 환경은 기독교라는 묘목의 뿌리를 썩게 만드는 늪지였는가? 일본은 여전히 ‘선교사들의 무덤’이어야 하는가?

2011년, 그들은 강도 만난 이웃이 되었다. 깊은 자괴감에 빠져있는 일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중세 이후 자신의 선조들이 힘겹게 응시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돌아 서야할 것이다. 과감히 일어나 창문을 열고 또 하나의 새벽을 찾아 나가사키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나가사키로 가는 길은 생명과 빛으로의 여정이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1.12.27 07:16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