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과 신앙 이야기: <5>

새벽이 오기 전 어두움의 구조


한철희 교수 (나사렛대학교 기독교교육학)

부흥은 도적같이 오는가? 아니면 바람결에 풀잎 흔들리듯 미세한 전조를 동반하는가? 아니면 먹구름이 굵은 빗방울을 만들어 넓은 들판을 사정없이 두들기듯 거세게 달려오는가? 부흥을 오게 하는 구조는 무엇인가? 검은 구름 속에서도 부흥의 빛을 예견할 수 있을까? 얼마나 깊은 어둠을 통과해야 새벽이 오는가?

“그날 나는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어머니 핸드백에서 50환짜리 흰 동전 하나를 꺼낸 것이다. 가게주인 아저씨가 배신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종아리를 때리는 어머니의 손길은 차분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 다행히 동네 아주머니들이 뛰어들어 말려 주었다. 초등학교 입학 한 두 해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두 달 후에 일어났다.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두 번째 시도가 발각된 것이다. 똑같은 50환짜리였다. 이번에는 어머니의 손에 수도꼭지에서 빼온 고무 호수가 들려 있었다. 이미 모든 문은 잠겨 있었다. 형벌이 집행되는 30분 동안 어머니도 울고 나도 울었다. . . ”

인간은 왜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가?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죄의 습관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가 신경세포 속에 기록되어 남기 때문이다. 조직 안의 분자가 일일이 계산하고, 기록하고, 저장한다. 다음 유혹이 올 때에는 이것이 저절로 작동되어 인간의 선한 의지를 거스르게 만든다. 과학적으로 말해서 행위의 결과는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는다.” 내용인즉 사람의 몸이 이전의 실수를 기억하였다가 자연스러운 반복으로 유도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내 지체 안에는 또 다른 죄의 법칙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싸우는구나!”라고 탄식할 때 지체(肢體)를 ‘멜로스’라는 의학적인 단어를 사용한 것은 놀라운 통찰이었다. “이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오이케오’) 죄로구나! . .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까?”(로마서 7장). 위대한 사도의 안타까움이 배어 나오는 처절한 고백이다. 헤어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악순환이다. 이 숙명의 사슬에서 풀어줄 해방자는 누구인가?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적절한 호칭을 찾기에 고민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사랑과 존숭, 경배와 놀라움을 담아낼 기적적인 단어를 찾아냈다. “큐리오스”였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적 호칭이 되었다. 애정과 권위, 군주에 대한 충성, 법적 후견인이자 보호자에 대한 신뢰의 의미를 가장 잘 요약하고 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주님”이라고 번역하였다. 은근히 “주여!”라고 부를 때는 호격으로 “큐리에!”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큐리오스께서는 친 백성들을 구출하고자 은혜의 탐조등은 쉴 새 없이 우주에 투사하셨다. 이 빛에 발각된 인간은 막다른 길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죄의 구조에 가슴이 옥조이던 인간의 영혼을 향해 비로소 복음이 들려온다. “그리스도의 피 흘림이 없이는 풀려남(‘아페시스’)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장 22절)”. 성경은 거룩한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자에게만 그리스도의 붉은 선혈의 비밀을 깨닫게 해준다. 닫쳐진 실존 속에서 예수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깨닫게 한다.

청년 도스토프스키는 이르티슈 강변, 전나무와 가문비나무가 울창한 숲 속 유형지로 유배되었다.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 속에 달빛이 찾아들면, 멀리서 짖어대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젊은이는 매일 밤 창가에 기대어 필사적으로 한 권의 책에 매달렸다. 유형열차가 토볼스크에 멈추었을 때 한 부인이 차창으로 건네준 신약성서였다. 어느 날 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나는 그리스도와 같이 살고 싶다. 나는 오직 예수와 함께 살고 싶다.” 그는 자신의 큐리오스에게 모든 재능과 생명 고혈을 헌납하였다.

회개하면 부흥이 온다. 회개란 꽉 막혀버린 인간 실존, 떨쳐버릴 수 없던 죄의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를 큐리오스로 모신 새로운 삶 안에서 소망을 찾는 것이며, 인간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력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부흥의 현장은 늘 신비로움이 충만해 있다. 침체에서 빠져나온 감격이 있다. 감사의 기도마다 천국의 향기가 배어 있다. 새 승용차를 몰고 싱그러운 오월의 연초록 들판을 달리는 듯 가볍다. 시온의 대로는 곧게 뻗어 있고, 행선지의 기대감이 즐겁게 한다.

하나님은 역사의 먹구름 뒤에 늘 부흥의 메신저들을 준비해 두셨다. 회개를 촉구하고 부흥의 새벽을 열기위해 특별히 예비하신 천국의 용병들이다. 요나단 에드워즈요, 조지 휫필드요, D. L. 무디요, 찰스 피니이며, 길선주와 정남수, 그리고 빌리 그래함이었다. 이들을 통해 부흥의 함성은 켄터키의 숲 속에서, 예일대학 교정에서, 웨일즈의 해변에서, 평양 장대재 언덕에서, 만주 벌판에서, 그리고 여의도 강변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이제 웨슬레적 성결전통의 주류에 서있는 나사렛의 영성이 한국 교회의 부끄러움을 씻고 신선한 부흥의 새날을 열게 될 복된 아침을 꿈꾸어 본다. 사랑하는 큐리오스의 음성이 꿈결처럼 들려오는 축복의 날일 것이다:

“자, 겨울은 지나가고, 장마는 걷혔구나. 산과 들엔 꽃이 피고 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무화과 열리고 포도 향기 가득하니, 나의 사랑하는 사람아, 일어나 나와 함께 나아가자!“(아가서 2장 10-13절).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1.05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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