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346~399년)의 영성

조대준 목사 (필라델피아 WTS, Ph. D. )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기독교 영성신학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에바그리우스는 현대 신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교부이지만 영성을 추구하는 신자들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인물이다. 기독교 영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왜 에바그리우스가 교회사에 언급되지 않았는지 의아해 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오리겐의 신학사상과 사막교부들의 금욕주의를 조화시킨 영성을 가르쳐서 후세의 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별히 에바그리우스의 수도사의 삶과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후세 교회의 수도사 제도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에바그리우스는 터키의 이보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 당시 대도시인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세상의 권세와 향락을 맛보았으나, 꿈에 그의 영혼이 위험에 처했다는 경고를 받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금욕주의 삶을 사는 장로 멜라니아의 제자가 되었다. 이 당시에는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합법화한 후라 많은 신자들이 피 없는 순교, 즉 금욕주의를 따르는 수도사의 삶을 추구하였다. 에바그리우스도 수도사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이집트의 니트리아 지방의 사막에 독거하며 수도사의 삶을 살았다. 그의 금욕주의의 삶과 영성은 특출나서 신자들은 에바그리우스를 성자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데오필루스는 에바그리우스를 주교로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여자와 주교를 멀리하라는 수도사들의 좌우명을 따라서 주교의 자리를 거절하고 마지막까지 사막에서 수도사의 삶을 살았다.

에바그리우스는 신자는 금욕주의와 명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상태에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신자가 이 상태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네 개의 적이 있는데 그것은 물질, 열정, 생각, 귀신이라는 것이다. 신자가 세상을 떠나 사막에 나와서 수도사로서 금욕주의의 삶을 사는 것은 먼저 첫 번째의 적인 물질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수도사는 열정과 생각을 통하여 수도사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귀신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해야 한다. 이 당시에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신자들은 귀신과 싸우기 위하여 세상을 떠나서 사막으로 나갔다. 왜 귀신과 꼭 사막에서만 싸워야 했는지에 대하여는 잘 모르겠다. 여하간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로서 귀신과 싸우는 삶을 실제화하고 여기에 대한 훈련 교과서를 펴낸 사람이다. 그러므로 귀신과 싸우는 체험과 이기는 비결과 능력에 대하여는 에바그리우스 앞에서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현대 교회에도 귀신과 싸운다는 신자들이 꽤 있는데 평생 귀신과 싸우면서 살았던 에바그리우스의 책을 보면 배울 것이 많을 것이다. 귀신에 대한 웬만한 것은 에바그리우스가 거의 다 가르쳤다. 그런데 먹을 것 다 먹고, 잘 것 다 자고, 상하수도 시설이 잘된 집에 살고, 자동차 타고 다니면서 귀신과 싸운다는 현대 신자들을 볼 때 에바그리우스가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또한 에바그리우스는 신자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열정을 무열정(apatheia)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무열정은 감정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이성의 지배를 받아 어떤 한 극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이 잡힌 것을 말한다. 이것은 특별히 명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믿음을 갖고 자연에 대하여 명상함으로 얻을 수 있다. 귀신은 영혼의 감성적인 면을 공격하여 신자의 금욕주의와 명상의 삶을 실패로 만들고자 한다. 신자는 자신의 이성적인 면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은 모든 진리의 적인 것을 알고 명상과 기도로 인내하며 싸워 이겨야 한다고 에바그리우스는 가르쳤다.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연합하는 것이요 또한 영혼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라고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또한 잡념에 방해받지 않고 하는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을 굳게 잡고 기도하는 데 모든 것을 집중하라. 기도하는 동안 일어나는 생각과 걱정에 신경을 쓰지 말라. 이것들은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고 기도하는 목적을 흐리게 한다. 가서, 당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라. 그러면 잡념 없이 기도할 수 있다.

에바그리우스는 또한 기도할 때에 상상하지 말고 생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는 "당신은 기도할 때 모든 생각을 버려서 영혼이 깊은 고요함에 들어가게 하라. 그러면 무지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 당신처럼 작은 자에게도 찾아오실 것이다. 바로 그때 당신은 가장 영화로운 선물인 기도를 선물로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에바그리우스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여기며 그의 기도 방법은 상상적이라기보다는 공허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바그리우스는 또한 신자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열정적인 생각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이 열정적인 생각을 여덟 개의 적으로 나누어 가르친다. 이것들은 폭식(식욕), 정욕, 물욕, 슬픔, 노여움(화), 나태(게으름), 허영심, 교만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신자는 금욕의 삶과 명상을 통하여 이 여덟 개의 대적과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먼저 신자에게 폭식을 하지 말고 음식을 최소한으로 섭취하여 영혼을 깨끗이 지키라고 권한다. 그는 "크리스천이여, 배가 이끄는 여물통에 들어가지 말라. 그리고 매일 밤을 잠으로 채우지 말라. 그러면 당신은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이 당신에게 오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음식과 수면은 고대 교회 신자들이 육신을 훈련하는 데 사용한 중요한 도구들이었다.

신자들은 이성 관계에서 깨끗해야 하며, 특별히 수도사는 여자를 멀리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하며, 특별히 수도사의 삶을 살고자 하는 신자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금욕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사는데도 일어나는 부정한 생각들은 명상과 자비를 통하여 물리쳐야 한다.

네 번째 대적인 슬픔은 자아 동정이며,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기쁨을 앗아간다. 슬픔은 삶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둘 때 일어날 수 있다. 슬픔이 심하면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자비와 하나님에 대한 명상으로 물리칠 수 있다.

노여움은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도 삶의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자기 자신을 쳐 죽이는 금욕의 삶과 명상과 자비를 통하여 이것을 물리칠 수 있다.

여섯 번째 대적은 게으름인데, 에바그리우스는 이것이 여덟 개의 대적 중에 가장 강한 대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정오의 귀신이라고 부른다. 이 게으름은 정오를 전후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정오의 귀신이 오전 10시쯤에 찾아온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 정오의 귀신은 오전 10시쯤 찾아와서 수도사를 무력하게 한다. 이때부터 수도사는 하루가 50시간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그는 창문 밖을 바라보고, 밖에 나가 누가 나오지 않았나 둘러본다. 그러다가 그의 앞에 보이는 메마른 사막과 매일 있는 노동이 지겹게 보인다.
그는 이렇게 사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지 않냐고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그는 예전의 삶이 생각나고, 집이 생각나고, 가족이 그리워진다. 그러자 그는 자기 방에서 뛰쳐나와 수도사의 삶을 포기하고 집으로 향하게 된다.

수도사는 매일같이 이 정오의 귀신과 싸워야 한다고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이것과 싸워 이길 때에 얻어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이다.

일곱 번째 대적은 허영심이다. 허영심은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에게 주교의 자리가 주어졌을 때 이것을 거절한 것은 그가 허영심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던가를 보여 준다. 현대 교회에서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가 큰 교회에서 목회할 수 있는 자리가 주어지면 큰 교회로 옮기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는데 에바그리우스가 여기에 대하여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여덟 번째 대적인 교만은 자기 자신을 사실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교만의 귀신은 고통과 고난을 통하여 쳐 죽여야 한다. 수도사는 자신의 부족하고 더러운 것을 보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속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

에바그리우스가 가르친 수도사의 여덟 가지 대적은 후세의 신학자들에 의해 정리되어 가톨릭 교회에서 일곱 개의 대죄가 되었다. 이 일곱 개는 교만, 물욕, 정욕, 시기, 폭식, 노여움, 나태이다. 여덟 개가 일곱 개로 변했을 뿐이지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일곱 대죄는 에바그리우스의 여덟 대적에서 나온 것임을 볼 수 있다.

에바그리우스는 현대 신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독교 영성을 연구하는 자라면 꼭 거쳐가야 할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는 신자가 깊은 영성을 갖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할 자신 안에 일어나는 생각과 싸움을 실제화하였고, 또한 이것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후세의 수도사 제도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기도 방법은 마음을 비우는 공허한 방법에 너무 치우쳐서 현대 신자들이 그 방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현대 신자들도 기도할 때에 일어나는 잡념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에바그리우스에게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1.07 11:29
  • 수정 2020.12.17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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