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과 신앙 이야기: <7>

미국대학과 부흥의 꿈

한철희 교수 (나사렛대학교 기독교교육학)

스산한 바람이 찰스강 언덕으로 불어온다. 서럽도록 춥고 황량하던 불모지에 첫 대학이 세워졌다. 청교도들의 꿈이 신대륙에 펼쳐진지 불과 6년 만의 일이었다. “오늘의 목사들이 죽어 흙 속에 묻히게 되는 날, 우리의 교회들을 무지한 목회에 남겨두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노라. 이에 배움을 향상시키고 이를 후손들에게 영속시키기 위해 이 학교를 설립하노라.” 젊은 목사 존 하버드가 1636년에 세운 대학의 헌장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가 그들의 교훈이었다.

머지않아 코네티컷 하구에 또 하나의 대학이 세워졌다(1701년). 학장 토마스 클랩(Thomas Clap)은 건학 이념을 이렇게 명시했다. “예일대학은 탁월한 신앙적 사회이다. 예일은 선교 사역을 위해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목회자의 사회’이다.”

이곳 뉴잉글랜드에 부흥의 열풍이 불어 닥쳤다. 이른바 1740년대 미국의 대각성운동이었다. 척박한 식민지에 영적 스트레칭이 강하고 깊숙이 뻗쳐나갔으며, 비로소 선조들이 품어 왔던 애잔하고도 거룩한 꿈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거대한 회개와 갱신의 흐름이 신대륙을 휩쓸어 가면서 가정과 교회와 대학마다 새 에너지로 충일해졌다.

그런데 이 부흥의 계절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신실한 설교자 5인이 있었다. 요나단 에드워즈, 길버트 테넌트, 그리고 요한 웨슬리는 1703년 생 동갑내기들이며, 조지 휫필드는 11살 연하, 프렐링하이젠은 11살 연상이었다. 에드워즈가 첫 정착지 뉴잉글랜드에서 부흥의 불을 지폈다면 다른 사람들은 중부 식민지로부터 열기를 몰고 올라갔다. 어떤 이는 선구자로서 어떤 이는 완성자로서 역할을 하였으나 서로에 대하여 주목하며 격려하고 존경하였다. 휫필드를 자신의 교회에 초청했던 에드워즈는 설교시간 내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18세기 초 유럽의 이민자들이 중부식민지로 몰려들었다. 당시 최대의 항구도시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여 델라웨어 강을 따라 트렌톤 인근까지 올라왔다.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기다리며 강기슭을 따라 넓게 퍼져나갔다. 그들의 신앙을 지탱해줄 설교자가 필요했다.

이 지역을 담임하고 있던 윌리암 테넌트 목사는 에딘버러대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다. “좋은 훈련을 받은 목회자가 국가 발전에 최우선적 조건이라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다. 고전학문과 신학을 교육할 학교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대륙에 있던 대학은 하버드, 예일, 윌리엄 메리가 전부였으며 그나마 너무도 먼 곳에 있었다. 테넌트 목사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네샤미니 숲에서 아름드리나무를 베다가 2층짜리 정방형 통나무 건물 한 채를 지었다. 자신의 세 아들을 포함하여 15명의 헌신된 젊은이들을 데리고 교육을 시작하였다. 위층에 교실이 한 개있고, 벽난로와 화덕이 있는 아래층은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을 방문한 휫필드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내게는 이 집이 옛 선지자들의 학교처럼 보였다.” 새벽 5시 기도회로 시작된 하루의 학과는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포함한 고전학문으로 채워졌으며 저녁 9시가 되어서야 수업이 마쳐졌다. 역사가들은 이곳의 교육이 "놀라울 만큼 효율적"이었다고 경탄하였다.

1726년에 첫 수업을 시작한 이 허름한 건물은 당대에는 조롱하는 말로, 후대에는 영예로운 명칭으로 “통나무학교”(Log College)라고 불려 졌으며, 세계적으로 유수한 프린스턴대학교(Princeton University)의 전신이 되었다. 무엇보다 테넌트 목사의 불같은 복음 설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신대륙의 역사 한 가운데서 진지하게 자신들을 준비하게 하였다. 이들은 대각성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들로 성장하였으며 변방으로 진출하여 60여개의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1746년, 부흥사 테넌트 목사가 소천하였다. 학교는 “뉴저지대학”으로 교명을 정하고 엘리자베스타운 요나단 디킨슨 목사의 관저로 옮겨졌다. 디킨슨 목사는 초대총장이 되었으며 마침내 트렌톤 인근 프린스턴이라는 곳에 영구 정착하게 되었다. 테넌트 목사의 제자들인 통나무학교 출신들이 대거 프린스턴의 이사로 진출하였다. 사무엘 블레어, 길버트 테넌트, 윌리암 테넌트 2세 등이다.

1756년에 프린스턴 대학으로 명명하고 요나단 에드워즈를 3대 총장으로 청빙하였다. 에드워즈가 취임 후 몇 주 만에 병으로 소천하게 되자, 통나무학교에서 공부한 부흥사 사무엘 데이비스가 4대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학생들이 그의 설교를 노트에 받아 적으면 곧 빈틈없는 조직신학 교과서이었다. 영국의 로이드 존스는 그를 가리켜 청교도 설교의 원형이라고 극찬한다. 이 데이비스 총장은 통나무대학 시절 스승 사무엘 블레어의 가르침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모든 학도들이 혼을 모두어 그에게 귀 기울일 때/ 그의 발아래 앉아 존경의 마음을 모으던 자들에게/ 물처럼 흘러내리던 당신의 아름다운 지식이여/ 앉은 자들에게 임하던 황홀함이여/ 오, 블레어 선생이여/ 가장 존경스러운 이름에 합당한 스승이여/ 나의 아버지여, 나의 선생이여, 나의 목자여, 나의 형제여, 나의 친구여 . . .”

그의 뒤를 이은 5대 총장도 통나무학교 출신 부흥사 사무엘 핀리였다. 바야흐로 대학의 기틀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당시 대학 건물은 본관으로 사용되던 내소오(Nassau) 빌딩 하나뿐이었으며,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대학 이사들의 요청으로 통나무학교 출신 사무엘 데이비스와 길버트 테넌트가 영국으로 건너가 모금해온 기금으로 지어졌다.

1930년대에 프린스턴대학 교정을 거닐던 아인슈타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 20년 전에 한국의 건국 대통령이 될 한 청년이 이 대학에서 정치학박사(Ph.D.)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프린스턴대학교가 부흥사들에 의해서 부흥사를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대학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제는 없는 것 같다. 대학교 인근 총장들 묘역 짙푸른 잔디 위에는 아직도 스산한 바람이 지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설교의 열정과 하염없는 기도가 그 바람결에 스치기라도 하듯이 . .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1.25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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