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과 신앙 이야기: <8>

천국의 용병들

한철희 교수 (나사렛대학교 기독교교육학)

저녁 무렵 도달한 산 위에서는 멀리 등불 밝힌 마을들이 내려다보인다. 전도자는 말에서 내려 눈 위에 무릎을 꿇는다. 어깨에서는 금세 더운 김이 피어오른다. 어제 아침, 얼어붙은 제임스 강을 건널 때만 해도 상류에서 울려오던 얼음 갈라지는 소리에 숨이 멎는 듯했었다. 그런데 이제 저녁연기 자욱한 마을, 사랑하고 사모하던 자들에게 큐리오스의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어느덧 뜨거운 감사가 줄줄이 눈 위로 떨어져 내린다. 에즈베리가 파송했던 이름 없는 순회전도자들의 모습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이 땅에서 교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능력은 없으면서 화려함만 남은 죽은 공동체가 될 것을 염려할 뿐이다. 처음 신앙을 붙들지 않는다면 결국은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영국교회 목사 요한 웨슬리의 말이다. 비에 젖은 잔디밭이나 진흙땅 위에서는 설교를 꺼리던 옥스퍼드 신사였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니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옥외설교자로 발 벗고 나섰다. 들판 한 가운데 선 그는 영국교회를 향해 외쳤다. “이 시대에 기독교가 존재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덧 68세의 노인이 된 웨슬리는 바다 건너 미국 형제들을 구원하려고 프랜시스 에즈베리라는 특별한 젊은이를 파송하였다. 당시 미국 13개 주는 동부해안을 따라 길게 띠를 이루고 있었다. 애팔래치아 산맥이 금성철벽처럼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1750년에 산맥을 넘어 켄터키로 들어가는 협곡이 발견되었다. 수많은 개척민들이 비옥한 토지를 찾아 서부 변경으로 이동하였다. 대평원 깊숙이 흩어져 들어간 개척민들에게는 야생의 땅을 일구는 일보다 더 큰 외로움과 고통이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잊혀져가고 있다는 절망적인 불안감이었다.

1771년, 필라델피아 항구에 내린 에즈베리는 정착민들을 찾아 서둘러 서부로 달려갔다. 계곡과 산지로 단절된 개척지에 성직자가 찾아온다는 것은 대지를 약동케 하는 사건이었다. 미루어 왔던 결혼예식과 세례와 성만찬을 준비하고 외부 세계의 소식을 듣기 위해 며칠 길을 마다않고 모여 들었다. 에즈베리는 흩어진 가정들을 찾아 한 해에 8천 km를 달렸으며, 험준한 엘리게니 산맥을 60회나 넘나들어야 했다. 길 없는 덤불숲을 헤치며 때로는 철길 곁에 앉아 풀을 뜯어 먹어야 했다. 폭우에 젖고 찬바람에 노출되기를 반복한 그의 무릎은 만성 류마티스가 되었다. 말년에는 흉하게 휘어져 누군가가 말안장 위로 들어 올려 앉혀 주어야만 했다.

에즈베리는 젊은이들을 찾아냈다. 왕의 명령을 전달할 강인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순회전도자(circuit rider)로 훈련시켰다. 한 달 씩 걸리는 순회지역을 설정하여 정기적인 설교 순회를 담당하게 하고 역량에 따라 기동력 있게 이동배치하였다. 그들의 안장에는 3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성경책, 찬송가, 교리와 장전(Manual)”이다. 그들은 차라리 훈련된 전사들이었다. 에즈베리는 그들에게 미개척지 변경을 향해 전진하도록 명령하였다. 질병과 사고는 사계절 도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악의에 찬 인디언과의 조우, 강도의 위험과 불한당들의 조소, 폭설과 홍수, 낭떠러지와 맹수들을 돌파해 나가야 했다. 초기의 전도자들은 6명 중의 1명이 순회 중에 사망하였다. 지휘관들 뿐 아니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젊은 순회전도자들의 투혼은 아름답기만 하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하기 위해 말에서 내려 나무 아래 들어선 전도자의 시야에는 며칠 걸려 넘어야 할 험산준령이 다가선다. 말고삐를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려온다.

에즈베리가 안수하여 파송한 순회전도자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은 피터 카트라이트였다. 거친 정착지 출신으로 순회 목회 6년 만에 지방감독(DS)의 임무가 주어졌다. 주로 켄터키, 테네시, 일리노이주를 돌며 설교하였는데 3시간이나 계속되는 그의 설교를 들으러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수천 번의 설교에 12,000명의 회심자들이 세례를 받았다. 카트라이트는 노예제도에 반대하기 위하여 현실 정치에도 관여하여 순회전도자로서 주의회 하원의원이 되어 오랜 의정활동을 하였다. 1846년에 미연방 하원의원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일리노이주의 한 키 큰 변호사에게 석패하였는데 그는 나중에 미국의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카트라이트 자신은 비록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다음 세대 설교자 교육을 증진시키는 일에는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모범적인 기독교대학 3개교를 설립하였으니 오늘날의 맥켄드리대학, 맥머레이대학, 일리노이웨슬리대학이다.

에즈베리가 선교를 시작할 당시 신대륙에 300명의 감리교인들이 있었다. 그가 사역을 마칠 무렵에는 21만 명의 미국인들이 웨슬리안 크리스천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대장간 견습공으로 삶을 시작하였으나 말년에는 편지 겉봉에 “미합중국, 애즈베리 감독”이라고만 적어도 편지가 배달되었다. 청교도 시대 이후 미국의 주류교단은 회중교회, 장로교회, 성공회들이었다. 그러나 웨슬리안들은 선교 100년 만에 주류교단을 앞질러 감리교회를 최대교단으로 정착시켰다. 성령께서 젊은 전도자들의 순수한 영혼을 통해 이룩하신 부흥이었다. 지금은 잊혀 졌지만 복음 들고 산을 넘던 그들은 정녕 천국의 용병들이었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2.15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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