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과 신앙 이야기: <9>

예일의 부흥과 총장 이야기


한철희 교수  (나사렛대학교 기독교교육학)


부흥이란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영적 소생을 체험하는 변화의 순간이다. 때로는 개인에게서 시작된 부흥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때도 있었다. 예일대학과 드와이트 총장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1780년대의 미국은 집을 짓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온 세계가 본받을 거룩한 국가를 세운다는 “언덕 위의 도시”(마 5:14)가 그들의 건국이념이었다. 경건한 애국적 지성들은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국가의 청사진을 설득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개국의 현장에 때 아닌 역풍이 불어 왔다. 주둔 중인 유럽의 군대가 개척민들의 신앙을 비웃으며 무신론과 비기독적 철학을 신대륙에 풀어놓은 것이었다. 오랜 세월 부패해온 가톨릭을 무너뜨렸던 프랑스의 이신론이 방금 상량한 참나무 서까래에 옻칠도 마르지 않은 신생국 개신교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의 감수성은 민첩하였다. 5센트 계몽사상 소책자에 경도된 학생들은 여타의 제도나 권위에 대한 신뢰를 잃고 경박한 회의주의의 열병을 앓게 되었다. 경건의 산실이었던 예일대학 캠퍼스에는 술잔 부딪히는 소리와 밤새워 벌이는 도박판과 싸움의 소란함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개교 100년을 눈앞에 둔 기독교대학의 모습이다.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4년 전, 티모시 드와이트 목사는 43세의 나이에 총장으로 청빙되었다. 그는 신학자 요나단 에드워즈의 외손자이다. 17세에 예일을 졸업하였고 7년 동안 모교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시와 고전 과목을 교과과정으로 정착시켰다. 독립전쟁시 군목으로 복무하였고 주 의회 의원을 거쳐 사립학교 교장으로 교육개혁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시는 미국 서사문학의 효시가 되었으며 우리의 찬송가 208장을 작시하였다.

젊은 총장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새로운 사상에 대한 개방성을 가지고 있었다. 눈앞에서 난무하는 방종과 폭력과 혼란에 대하여 총장은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서 기독교인이 지녀야할 인격과 존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기존의 공개 토론회를 통해 성서의 진정성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 갔다. 학생들의 견해를 진지하게 듣고 간명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학생들은 그의 미소가 늘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매주의 총장 설교에서는 신앙의 본질을 소통하기 위하여 충분히 정제된 설교를 전달하였다. 4년을 주기로 반복되던 이 설교는 5권의 책으로 출판되어 이후 반세기 동안 미국 교육기관들의 주요 교과서가 되었다.

총장 관저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기도와 성서 연구로 4시간 이상 수면을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명이 불완전한 시절, 밤을 지새우던 그의 고독한 투쟁은 결국 심대한 시력 손상을 가져왔다. 학내에는 고요한 전선이 형성되었고 학생들과 벤자민 실리만을 비롯한 일부 교강사는 여전히 그를 ‘드와이트 교황’이라고 부르며 빈정거렸다. 그러나 머지않아 캠퍼스에 미세한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교수 사택 유리창을 깨부수는 일과 삼삼오오 둘러 앉아 카드 패를 돌리는 일, 그리고 소란하게 밤거리를 몰려다니는 일들이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수업이 진지해 지고, 대화의 주제가 바뀌었으며 기도실을 찾는 발걸음들이 이어졌다. 총장의 신실한 가르침과 합리적 행정, 그리고 품성적 고결함이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전기 작가 찰스 커닝햄에 따르면 그는 “건강한 이해력, 개방적이고 솔직하며 자연스러운 태도, 단정한 외모와 인자한 성품, 그리고 매력적인 예의”를 가진 사람이었다.

취임 후 7년이 되던 해에 드디어 부흥이 일어났다. 1802년 이른 봄 졸업반 학생 2명이 그동안 자신들의 경솔한 생각과 행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면서 회개의 영이 학교를 사로잡았다. 예일대 전교생 225명중 삼분의 일이 회심을 체험하였다. 부흥이 확산되면서 환희와 질서, 건강한 열정이 캠퍼스에서 되살아났다. 신대륙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던 선조들의 거룩한 꿈과 신생 조국의 미래에 헌신하는 일에 골몰하게 되었다.
드와이트는 탁월한 행정가이기도 하였다. 코네티컷 주정부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의원들로 하여금 국고를 열게 하였다. 도서관 장서를 3배로 늘렸고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법학 교수를 청빙하여 오늘날 명문 예일 법대의 단초를 열었다. 이듬해 고전어와 교회사 교수, 그리고 화학 교수좌를 신설하였고, 변호사로 개업한 벤자민 실리만을 찾아내어 미국과학의 개척자로 만들어냈다. 교수진과 재정 확보를 위한 힘겨운 전쟁 끝에 결국 1810년 예일 의과대학을 설립하였다. 그의 숙원이었던 신과대학은 기초석만 놓은 채 그의 사후 5년 후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는 신과대학으로 하여금 온갖 불신 철학으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보루로 삼기를 희망하였다. 그의 총장 재임 22년(1795-1817) 중 예일은 하버드, 프린스턴, 컬럼비아, 브라운, 펜실베니아 등 총 10개 미만의 미국 대학들 중에 가장 큰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해를 거듭하면서 부흥을 경험한 젊은 엘리트들이 목사와 설교자, 그리고 기독교교육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들은 변방으로 진출하여 대학을 세우거나 대학의 총장과 학장이 되었다. 예일의 영향으로 미국에는 갑작스러운 대학 설립의 붐이 일어났다. 10여개 남짓하던 대학이 그의 사후 수십년 만에 180여개로 증가하였다. 역사는 미국고등교육 발전의 동인을 예일과 드와이트에게 돌리고 있다. “이러한 증가의 핵심적 요인은 제이차 대각성운동이며, 티모시 드와이트 총장을 중심으로 예일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예일은 동부대학들의 선두에 서서 영적으로 각성된 졸업생들을 남부와 서부로 파송하여 대학을 설립하거나 기독교대학의 총장이 되게 하였으며, 따라서 이 당시 예일대학은 ‘대학들의 어머니(mother of colleges)’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예일대학교는 금년으로 개교 311년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일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지도자는 티모시 드와이트 한 사람 뿐이었다고 역사는 평가한다. 젊은 총장은 당대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두 눈을 희생하였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눈은 담장 너머로 뻗은 야곱의 축복을 꿈꾸고 있었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3.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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