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대면하는 영성 (09)

눌시아 베네딕트 (480~550년)의 영성 

조대준 목사 (필라델피아 WTS, Ph. D. )

 

눌시아 베네딕트는 서방 교회 수도원 제도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베네딕트는 지금까지 내려오는 가톨릭 교회의 베네딕트 수도회의 창시자이다. 그가 저술한 「베네딕트의 규범」은 이 후에 가톨릭 교회에 일어난 모든 수도회의 규범에 큰 영향을 주는 지침서가 되었다. 우리가 기독교 영성을 배우고자 하면 제도적으로는 가톨릭 교회에 속해 있지만 그 안에서 바르고 깊은 영성을 가졌던 신자들의 가르침과 체험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 안에서 깊은 영성을 추구하였던 일부 신자들의 삶도 무시할 수 없다. 마르틴 루터도 종교개혁 전에는 가톨릭교의 수도사였고 칼빈도 가톨릭교 신자였다. 칼빈은 그의 대작 「기독교 강요」에서 어거스틴을 제일 많이 인용하고, 다음에는 크리소스톰을 인용하며, 그 다음에는 베네딕트를 많이 인용한다.

 

베네딕트는 흥미있는 인물이다. 이것은 절대로 그가 우스꽝스럽거나 코미디언 같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삶은 평생 엄숙하고 진지했다. 베네딕트는 로마에서 동북쪽으로 70마일 떨어진 눌시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교육을 받고 출세하기 위하여 로마로 갔다. 로마로 간 그는 학우들의 문란한 삶과 피상적인 교육에 실망하여 공부를 포기하고 지방에 내려와서 굴에 독거하는 은자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성을 추구하였다.

그의 깊은 영성의 삶이 주위에 알려지게 되면서 비코바로라는 데서 수도사들이 와서 그에게 비코바로의 수도원장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만약 그렇게 되면 그들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사들의 간청으로 그는 비코바로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얼마 지나자 수도사들은 베네딕트의 엄격한 규범에 견디다 못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가 저녁에 마실 포도주에 독약을 넣었다. 저녁 식사 전에 베네딕트가 축복기도를 하는데 포도주 병이 깨졌다. 수도사들은 만지지도 않은 포도주 병이 저절로 깨지는 것에 너무 당황하고 깜짝 놀랐다.

결국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수도원을 떠나서 수비아코라는 곳에서 독거하며 은자의 삶을 살았다. 거기서도 명성이 자자해서 그의 주위에 많은 수도사들이 몰려들었다. 이것을 본 수비아코의 수도원장이 그를 시기하여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독약이 섞인 빵을 베네딕트에게 축하하는 의미로 보냈다. 베네딕트가 그 빵을 먹기 전 까마귀가 날아와서 그 빵을 물어다가 산 위의 먼 곳에 갖다 버렸다. 여기서도 독이 든 빵을 먹고 죽었어야 했던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베네딕트는 몬테카시노로 향하였다. 베네딕트는 자신을 죽이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을 추종할 것 같은 몇 명의 수도사들을 데리고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을 세웠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는 독약 사건은 없었고, 베네딕트는 저술을 하며 수도사들의 영성의 삶을 지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베네딕트는 깊은 영성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순종과 고요와 겸손의 삶을 매일같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특별히 고요를 강조한다. 베네딕트는 "우리의 영적인 삶은 많은 경우에 많은 말을 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여기에 우리의 영성이 메마르고 무력한 첫 번째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고요는 신자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베네딕트는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고요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고요 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고요는 나에게 주목하고 기다리고 경청하라고 요구한다.

고요 속에 들어가는 훈련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고요는 그저 조용한 침묵이 아니다. 고요는 내적인 고요이며, 고요는 경청하는 내적 자세이다. 베네딕트는 신자가 고요 속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들어가는 첫 걸음이라고 말한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12). 고요는 우리가 변화될 때까지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고 베네딕트는 말한다. 약 1,100년 후에 살았던 파스칼도 고요를 강조하였고, 1,300년 후에 살았던 키에르케고르도 고요를 강조하였으며, 1,400년 후에 살았던 토마스 머톤도 고요를 강조하였다.

현대 신자들에게는 고요는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운전을 하고 다니고, 집에서는 텔레비전을 켜놓아 시끄럽게 만들고, 교회에서는 주여, 주여 소리지르며 기도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는 시간만 빼 놓고는 휴대폰을 하나씩 들고 다니면서 누군가와 항상 이야기한다. 도대체 현대 신자들에게 언제부터 시끄러운 것이 정상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이런 상태에서 깊은 영성의 삶을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베네딕트가 가르치는 다음과 같은 고요 속에 들어가는 훈련을 해 보아야 한다.

첫째, 지속적으로, 한두 시간도 괜찮다. 조용히 혼자 있는 것을 연습해 보라. 고요의 외적인 결을 살펴보라. 고요의 맛과 촉감과 모양을 느낄 수 있나 보라. 고요를 인간인 것처럼 맞이하라.

둘째, 여기서는 혀의 고요뿐 아니라 몸의 고요를 연습해 보라. 몸을 부드럽고 사뿐하게 움직여 보라. 할 수 있는 대로 바람 소리나 신음 소리를 내지 말라. 그리고 기억과 상상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의 고요를 할 수 있는 만큼 연습해 보라. '주여,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도와주시옵소서'라는 무언의 기도를 하면서 연습해 보라. 그리고 영혼의 고요를 연습해 보라. 성령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자신을 열라.

셋째, 지금부터는 능동적인 내적 고요를 연습해 보라. 한두 시간 동안 조용히 혼자 있을 수 있는 환경을 정하여 고요한 중에 자신의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 보라. 15분마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적어 보는 것도 괜찮다. 어떤 패턴이 있는가 보라. 그리고 안에서 부정적인 소리가 들려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답을 해 보도록 하라. 가령 "나는 이기주의자이다"라는 내적 소리가 들리면 "나의 옛 사람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대답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하라.

넷째, 어떤 작업을 30분 이상 할 때 그 시간을 작업의 리듬 안에서 고요에 들어가는 연습으로 사용하라. 자신을 작업의 리듬 안에 집어넣고 마음에 일어나는 잡념을 고요하게 하라. 자신의 전부를 작업에 집어넣는 의도로 작업을 하라. 언제라도 마음이 지금 하고 있는 작업 외에 다른 것에 쏠리고자 할 때면 부드럽게 그러나 확고하게 마음을 뒤로 당겨서 작업에 마음을 집중하도록 하라. 작업이 끝난 다음에는 자신 안에 일어난 내적 고요를 즐기기 위하여 몇 분 동안 조용한 시간을 가져라.

다섯째, 사람들이 모여 있는 분위기에서 고요에 들어가는 것을 연습하라. 여러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이야기할 때,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말을 하고자 하는 동기를 생각하라. 말을 하지 않고 그 동기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 예를 들어, 상대방의 건강을 물어보고 싶으면 그 대신에 그 사람을 위하여 조용히 기도하라. 이렇게 베네딕트는 외적인 고요에서 내적인 고요에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훈련을 통하여 고요에 들어가는 것에 성숙하게 된 사람은 어떤 환경에 있든지 환경에 관계 없이 고요에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즐긴다.

베네딕트의 고요에 들어가는 훈련을 우리가 다 따를 필요는 없으나, 소음에 시달리며 사는 우리가 일주일에 하루쯤은 텔레비전을 켜지 않고 조용히 지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전화가 와서 방해가 되면 전화선도 빼놓고 휴대폰도 끄도록 하라. 하루쯤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이상하고 괴롭기까지 하겠지만 계속하면 영성의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정과 교회는 조용하게 될 것이다.

베네딕트는 영성의 실천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약함을 잘 알고 심리를 잘 이해했다. 지금도 기독교에서 깊은 영성에 들어가기 위해서 고요를 필수 조건으로 가르치는 것은 베네딕트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도 많이 인용하여 가르쳤고, 청교도들도 삶에 깊이 옮겼던 고요한 명상의 비밀을, 이제는 현대 신자들도 찾아서 누릴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3.24 06:30
  • 수정 2020.12.1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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