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과 신앙 이야기: <10>

차가운 부흥과 뜨거운 부흥


한철희 교수 (나사렛대학교 기독교교육학)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고 한다. 레몬의 새콤한 향은 톡 쏘는 겨자의 매운 맛과 사뭇 다르다. 부흥도 다양한 색채를 띠고 발전해왔다. 다른 관점들로 인해 전쟁을 방불케하는 혼란을 가져왔다. 결국 1838년 미국 장로교단을 둘로 갈라놓은 후에야 현재와 같은 부흥회의 패턴이 정착되었다. 찰스 피니라는 목사가 시작한 험난한 변화였다.

연원을 밝히기 위해서 당시로부터 100년 전, 요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드워즈는 설교 준비를 위해 하루 평균 13시간을 성경과 씨름하던 목사였다. 그가 하나님을 신실히 증거하자 성령이 폭포수와 같이 임하였고 두려움과 각성, 회개와 확신, 그리고 넘치는 희열이 충만하게 되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원고를 읽었고 고개를 들었을 때에도 종탑에 매달린 빈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두려워 흐느낄 때마다 설교를 멈추고 회중을 진정시켰다. 설교의 결과와 영혼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보스턴제일교회 지성주의 설교자 찰스 촌시는 에드워즈의 부흥으로 야기된 감정적인 현상을 반대하는 사람들(Old Light)를 대표하고 있었다. 촌시는 설교자들이 선동적인 기도와 찬양으로 사람들의 정서적인 면을 자극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반하여 에드워즈는 새로운 빛(New Light)라고 부르는 칼빈주의적 부흥론을 대표하고 있었다. 신앙적 체험이란 이성을 통한 계시의 이해뿐만 아니라 감정과 의지의 영역까지 하나님의 권능이 고루 미치는 전인격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 새로운 빛은 정통신학으로 인정되어 프린스턴대학을 중심으로 점차 확장되어 갔다. 촌시를 따르던 사람들은 하버드대학을 진보적 유니테리언 신학의 중심지로 만들면서 미국적 개신교 운동에서 멀어지게 되고 결국은 역사의 소수자로 쇠퇴하였다.

정통적 부흥은 고요한 부흥이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이 주효한 칼빈주의적 운동이다. 하나님의 영은 언제나 교회에서 역사하시지만 성도들은 잠잠히 기다려야 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흥의 때가 되면 하나님이 특별하게 간섭하시면서 영적 생동감을 소생시키시고, 깊은 감동과 확연한 체험을 낳게 된다. 즉 부흥은 교회가 늘 유지해야 하는 일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섭리에 따라 시작과 마침이 있는 특별한 기간이었다. 부흥의 절차 또한 단순하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은혜를 신실하게 전달하였더니 부흥이 임하였다. 부흥의 증거들이 확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자 정작 놀라고 당황한 것은 설교자 자신이었다.

1800년대 초에는 대학 총장의 이름이 곧 부흥사의 이름이었다. 수학자이든 지질학자이든 천문학자이든 그들은 성직자였다. 조지아대학, 예일대학, 윌리엄스대학, 에머스트대학, 프린스턴대학의 총장들은 모두 부흥사들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부흥을 담을만한 신학적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칼빈신학의 중심교리인 예정론과 전적 타락은 부흥운동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부패한 속성을 가진 인간은 구원을 받으려는 어떠한 선한 의지도 영적인 소원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적 곤경을 깨뜨리고 자유의지의 길을 열어 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예일대학의 티모시 드와이트 총장이었다.

그는 외조부 에드워즈와는 달리 요한 웨슬리의 견해와 유사한 알미니안적 칼빈주의의 견해를 갖게 되었다. 성령이 때로는 봄비 같이 때로는 불길 같이 인간의 영혼 위로 내려와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만드는 수단들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이 은혜의 수단들(means of grace)을 통해서 영적 죽음의 상태를 깨닫게 되고, 죄를 발견하며, 마음의 빗장을 열고 성령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열게 된다는 것이다. 드와이트는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훈계하고 권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수제자 나다나엘 테일러가 예일대 신학부의 첫 교수로 임명되면서 이를 뉴헤이븐 신학(뉴잉글랜드 신학, 또는 New Divinity)으로 정착시켰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한 젊은이가 뉴욕 근교 숲 속에서 홀로 회심하였다. 당대의 지도자 드와이트가 소천한지 4년이 되던 1821년 가을이었다. 드와이트의 겉옷을 넘겨받은 29세의 청년 찰스 피니는 엘리사처럼 무명의 후계자였다. 그러나 큰 키에 빛나는 눈을 가진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즉시 수습변호사직을 떠나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피니의 부흥은 질풍노도였다. 뉴욕주 북서부에서부터 맨해튼까지 피니의 위대한 부흥의 시대는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그의 설교는 즉각적이었다. 동부의 유식한 성직자들의 화려한 문체와 현학적이며 수사적인 표현을 싫어하였다. 크고 푸른 눈은 강철처럼 차갑고 깊고 넓게 울리는 매력적인 목소리는 위엄을 더했다. 변호사의 논리와 극적인 제스처로 청중을 압도하면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였다.

피니의 이름과 함께 늘 따라붙는 “새로운 방법들”(new measures)이라는 말이 있다. 그는 일상적인 화법으로 강력하고 직설적이며 도전적인 표현의 설교를 하였다. 확신에 찬 그의 설교는 즉각적인 믿음과 회개를 강조하였다. 때로는 하나님께 대한 겸허한 순종을 표현하도록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하였다. 또 강당 초청(altar call)을 통해 앞으로 나오게 하거나, 애통하는 자들을 위해 마련된 “구도자의 자리”(anxious seat)에 앉게 하였다. 좀 더 강력한 자극이 필요한 경우에는 회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개인의 문제를 꾸짖거나,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기도하였다. 온 도시가 회개하여 주 앞에 나아오며 교회들이 기쁨과 감사로 열광하였다.

동부의 지식인 성직자들로부터 서서히 반대가 일기 시작하였다. 강단의 위엄을 손상시킨다고 하였다. 성도들의 반응은 과장된 흥분, 거짓된 열광, 위조된 감정이라고 폄하하였다. 설교 중 마룻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고, 예배 중에 여자가 말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설교를 여러 날 연장하거나 회심자의 숫자를 세는 일 등에 대하여 비난하였다. 무엇하나 고고하고 엄격한 칼빈주의 교리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인간이 회개를 야기시킬 수 있는가? 즉각적인 믿음이 가능한가? 교회 회원이 되는 조건이 너무 졸속적이지 않은가? 프린스턴대학의 저명한 석학들이 논리적 공격을 가하였으나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대한 변화의 흐름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결국 장로교회는 비슷한 교세의 두 교단으로 공식적으로 분열되었다.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의 적자(嫡子)들이다. 부흥이 낳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했고, 1800년대 중후반에 만들어진 부흥찬송가를 가장 많이 부르고 있는 교회들이다. 이미 세계적인 부흥을 체험한 평양의 기적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들을 형성하였다. 긴 부흥의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의 뜨거운 흐느낌이며, 저물어 가는 일몰의 시각에 세상을 향해 내보낼 신실한 일꾼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3.29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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