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68)

남한에서 교회재건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日기독교에 편입됐던 교파 복원운동 활발

해방 후 북한에서 교회재건운동이 전개되었듯 서울에서도 교회재건운동이 일어났다. 서울에서의 교회재건은 앞에서 언급했던 북한이나 후에 언급할 경남 일원에서의 재건운동 성격과는 다른 것이었다. 북한에서의 경우, 교회재건은 ‘교회쇄신운동’의 성격이 있었으나 서울에서의 경우는 교회조직, 곧 치리회의 정비와 재조직이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해방이 되자 서울에서는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을 그대로 존속시키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란 일제의 압력에 의해 통합돼 일본기독교에 편입됐던 교회 조직이었다. 성결교 안식교 동아기독교 등이 강제 해산된 가운데 장로교는 ‘일본 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1943.5), 감리교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1943.8) 예속돼 있었다. 그러나 45년 7월19일에는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등의 교파를 망라하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돼 일본기독교에 완전히 예속됐다. 중앙 조직은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통리와 부통리를 맡았다. 통리는 김관식(金觀植·1888-1948) 목사, 부통리는 김응태(金應泰·1890-1971) 목사였다. 지방에는 교구장을 두었고, 조선 8도 외에 중국에도 지부를 두었다. 이들이 업무를 시작했을 때는 8월1일이었다. 해방되기 꼭 15일 전이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인사들은 이 조직을 유지하기위해 45년 9월8일 새문안교회에서 남부대회란 이름으로 교단대회를 소집했다. 이 대회에 참석한 중심인물이 장로교의 김관식 김영주 송창근 목사, 감리교의 변홍규 박연서 이규갑 목사 등이었다. 감리교 대표들이 조선교단의 존속을 반대하고 자파환원을 원해 모임은 논란에 휩싸였다. 통리 김관식은 그해 10월 18일과 19일 서울에서 총회를 소집하고 이전의 명칭인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조선기독교회’로 변경, 존속을 시도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모임에 참석한 41인은 ‘남한기독교대회’를 준비해 한달여 후인 11월27일과 28일 서울에서 다시 모였다. 참석자는 200여 명에 달했다. 김관식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는 등 남한 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재기하고자 시도했으나 46년 4월30일 회의를 끝으로 사실상 해산되고 말았다. 이 모임에서 각 교파로의 환원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해체는 남한에서의 각 교파 복원운동으로 발전했다. 45년 9월 말까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침례교, 안식교 등 각 교파의 복원작업이 진행됐다. 장로교의 경우 46년말까지 지방별로 노회가 재건됐다. 그해 6월에는 ‘남부총회’가 소집됐다.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11개 노회 54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 승동교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남부총회’가 조직된 것이다. 남한지역에서만이라도 총회를 구성하여 한국장로교회를 재건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때 재야 교역자였던 배은희(裵恩希· 1888-1966) 목사가 회장으로, 함태영(咸台永·1873-1964) 목사가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김양선은 이에 대해 “일견 교회의 주도권이 이전의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지도자들의 손에서 떠난 것 같이 보였으나 교회의 주도권에는 실제적 변화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 총회에서 가결된 중요한 두 가지 결의가 있었다. 장로교 제27회 총회가 범과(犯過)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다는 것과 1940년에 설립된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신학교로 가결한 것 이었다. 조선신학교에 대한 결의는 후일 논란의 불씨가 되었다.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취소는 그 후 제34회 총회(1948)와 제38회 총회(1952)에서 반복됐다.

47년 4월18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열린 제2회 남부총회에서는 남북통일의 조속한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보아 ‘남부총회’를 ‘총회’로 개칭키로 했다. 그래서 42년 10월16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31회 총회를 끝으로 일제의 강압으로 해체되었던 이전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계승, 제1회 남부총회(1946)를 32회 총회로, 제2회 남부총회를 제33회 총회로 개칭하기로 결의했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해방 후 서울에서 전개된 교회 재건을 위한 시도는 일제 강점 하에서 해산되거나 통폐합됐던 기구의 재건에 지나지 않았고 영적 갱신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해방 후 교회의 재건과 더불어 교회 부속 기관들의 재건도 이루어졌다. 신사참배 반대로 폐쇄됐던 학교와 병원들이 재건되거나 신설됐다. 서울의 연희대학은 전쟁기에 경제전문학교로 개편되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이전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46년 1월에는 백낙준 박사가 연희전문학교 학장에 취임했다. 세브란스의과대학도 전쟁 중 아시아 의학전문학교로 전락되었다가 해방 후 복구됐다. 후일 연희전문학교와 병합되어 연세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는 45년 4월부터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불리다가 해방 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복구되었고 46년 8월15일 문교부 승인 제1호로 종합대학교 인가를 받았다. 또 이북에 있던 학교들이 남한에서 복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숭실대학이었다. 숭실전문학교는 38년 폐교됐으나 16년 만인 54년 서울영락교회당에서 재건되었다. 감리교계 학교인 평양의 광성 중·고등학교가 서울에서, 개성의 호스돈여학교가 전주에서 각각 재건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지역의 기독교 학교가 재건되거나 신설되었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 역사신학)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7.16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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