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70)

경남지방에서 교회재건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쇄신-교권파 갈등 ‘노회 분열’ 파국으로…

교회재건운동은 부산경남지역 교회를 관할하던 경남노회에서도 일어났다. 경남은 남한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중심지였다. 또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주기철 주남선 최상림 한상동 이인재 손명복 최덕지 등이 경남노회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지방에서의 교회 재건운동은 단순한 기구의 재건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경남 지방에서는 일제때 해산된 노회의 재조직과 함께 신사참배의 죄에 대한 회개운동과, 또 영적 쇄신을 추구했으나 친일전력 인사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이 대립은 결국 경남노회의 분열(1949)을 초래했고 결국 한국장로교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해방이 되자 부산 경남지방 교계 지도자들도 교회재건을 구상했다. 45년 9월 2일 부산진교회에서는 최재화 목사를 비롯하여 권남선 김길창 노진현 심문태 등 20여명이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과거의 모든 불손한 요소를 청산하고 순복음적 입장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를 재건 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최재화 심문태 두 사람의 이름으로 선언서를 발표했다. 9월18일에는 이들을 중심으로 부산진교회당에서 경남노회 재건을 위한 노회를 개최했다. 43년 5월5일 일제에 의해 장로회 총회가 해산됨에 따라 경남노회도 그해 5월 25일 “경남노회는 발전적으로 해소(解消)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타의에 의해 해산됐다. 이번에 해산된 노회를 다시 조직하게 된 것이다. 노회장에는 심문태, 부회장 최재화, 서기 강성갑, 회개 구영기 목사가 각각 선임됐다.

이때 ‘자숙안’(自肅案)이 상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목사, 전도사, 장로는 일제히 자숙하며 일단 교회를 사직할 것.

둘째, 자숙기간이 종료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한 시무투표를 시행해 그 진퇴를 결정할 것.

경남노회의 자숙안은 북한에서의 그것보다 더 엄격했다. 북한에서의 자숙안은 ‘2개월 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하는 것’이었으나 경남노회 안은 ‘일제히 자숙하고 일단 교회를 사임하는’ 것이었다. 이 안은 부산진교회의 최재화 목사를 중심으로 강주선 김상순 윤술용 목사 등에 의해 제안됐다. 이때는 주남선 한상동 목사 등 소위 출옥성도가 남하하기 이전이어서 자숙안은 출옥성도들에 의해 제안된 것이 아니었다. 자숙안이 출옥성도들의 교만과 독선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자숙안을 발표했으나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친일 전력의 인사들은 이 안을 거부했다. 이들은 “신사참배는 우리가 양심적으로 이미 해결한 것인데 해방이 되었다 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라며 자숙안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노회 주도권을 장악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들이 교권주의자라고 불리게 된 이유다. 이때부터 교회쇄신론자들과 친일 전력의 교권주의자들은 대립하게 된다.

45년 12월3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경남노회 제47회 정기노회가 개최됐다. 이때 제기된 자숙안에 대한 찬반 논란은 경남노회의 분열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노회원들은 재건노회 임원들의 총사퇴를 요구하고 출옥 인사인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 추대했다. 주 목사는 출옥성도로 자처하지 않고 겸손하게 ‘은혜로운 화합’을 주장했다. 그는 우선 손양원 전도사를 강사로 부흥집회를 한 후 노회를 개회하자고 제했다. 그러나 김길창 배성권 등은 자기들의 각성을 의도한 집회라 하여 참여치 않았다.

집회가 끝난 후 주남선은 보다 완화된 자숙안을 제시했고 그의 제안에 따라 경남노회 교역자 수양회가 46년 1월11일 부산 영도의 태종대에서 개최됐다. 해방된 지 5개월이 지난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150∼200여명이 모여 통회자복기도회를 개최하고 자숙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김길창 목사와 그 지지자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들은 노회주도권 장악을 시도, 46년 12월3일 진주 봉래동교회에서 모인 제48회 경남노회에서 김길창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임했다. 이 때 그는 신사참배에 대하여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도록 의결했다.

교회쇄신 운동은 심각한 반대에 직면했다. 당시 한상동 목사는 ‘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라는 단서를 붙여 잠정적인 노회 탈퇴를 선언했다. 이때부터 평신도들의 거센 항거가 일어났다. 47년 1월3일 부산의 초량 부산진 영도교회, 마산의 문창교회, 거창의 거창읍교회, 남해의 남해읍교회 등 6개 교회는 공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교회 쇄신운동을 지지했다. 부산노회 소속 67개 교회는 제48회 노회의 결의에 항거하고 한상동 목사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부산의 초량교회에서는 신도대회를 개최하며 철저한 회개와 자숙 등 교회개혁을 요구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47년 3월10일 구포교회에서 개최된 임시노회에서 김길창 노회장과 임원들은 총사퇴했다. 평신도들의 항거에 못이긴 잠정적인 후퇴였다. 그해 3월24일에는 마산 문창교회 등 68개 교회 평신도 대표 200여명이 모여 ‘경남노회의 부패성과 그 교권주의자들의 비양심적인 태도’를 규탄했다. 47년 12월9일 부산 광복교회에서 개최된 제49회 경남노회에서는 자숙안에 대해 불복한 목사들에게 사과서를 받도록 결의했다. 이처럼 경남노회에서 교회쇄신론자들은 수적 열세였으나 평신도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친일전력의 교권주의자들은 자기 보위(保衛)의 수단으로 교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쇄신운동은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못했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 역사신학)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7.30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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