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72)

장로교계 신학교의 설립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교회쇄신론자들 새로운 신학교 설립에 합의

해방 후 장로교계의 신학교 설립은 교회 분열과 무관하지 않았다. 감리교의 경우 해방 이듬해인 1946년 9월 ‘교회 지도자 양성’이라는 목표로 평양에 성화(聖化)신학교를 설립했으나 공산정권 하에서 폐쇄됐다. 남한에서는 소위 재건파에 의해 46년 2월 서울에 ‘감리교신학교’를 개교했고, 부흥 측에서는 48년 3월 ‘조선감리회 서울신학원’을 설립했다. 두 학교는 대립하는 듯했으나 양측은 49년 4월 무조건 통합, 하나의 신학교로 단일화됐다. 따라서 교회 분열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장로교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해방 후 가장 먼저 설립된 신학교는 46년 9월 20일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개교한 고려신학교였다. 신사참배 반대로 40년 7월 이래 투옥되어 있던 주남선(朱南善)과 한상동(韓尙東) 목사는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독립을 확신하고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구상했다. 이들은 한국교회 재건을 위해서는 ‘정통신학’에 기초한 신학교육이 긴요하다고 본 것이다. 해방 당시 장로교계 신학교는 40년에 설립된 조선신학교뿐이었다. 이 학교는 46년 6월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회집한 ‘남부총회’에서 장로교 직영 신학교로 승인됐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조선신학교를 현실 타협적인 신학교로 간주해 이 신학교에 한국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주남선 목사와 신학교 설립을 합의하고 박윤선의 협조를 받았다.

46년 7월 9일 진해읍교회당에서 개최된 경남노회 제47회 임시노회에서는 신학교 설립을 허락받았다. 그래서 박윤선 목사를 임시 교장으로 고려신학교를 개교하게 된 것이다. 첫 교수단은 박윤선 외에도 김진홍 한상동 한명동 등이었고, 곧 한부선(Bruce F Hunt) 함일돈(Floyd Hamilton) 마두원(馬斗元·Dwight L Malsbary) 최의손(William H Chisholm) 등의 도움을 입었다. 고려신학교는 출발부터 순탄치 못했다. 교회쇄신운동을 반대하는 이들이 고려신학교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논란 가운데 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모인 경남노회 제48회 정기노회는 고려신학교 인정 결의를 취소하고 학생 추천도 거절했다. 후일 고려신학교 문제는 총회 문제로까지 비화되면서 격한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47년 10월 14일에는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때 조선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학생 34명이 부산으로 내려와 고려신학교에 편입했다. 이들은 조선신학교의 신학교육에 반대했던 ‘신앙동지회’ 출신들이었다. 박형룡의 교장 취임으로 고려신학교는 조선신학교와 대립되는 보수적인 신학교로 인식된 것이다. 그러나 6개월 후인 1948년 4월 박형룡은 교장직을 사임했다.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와의 학교 운영에 대한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교장직을 버리게 되자 고려신학교에 대한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박형룡 박사도 수용하지 못하는 독선주의 집단으로 매도됐고, 48년 5월에 소집된 장로교 제34회 총회에서는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무관한 학교이고 노회는 학생을 천거할 필요가 없다’고 결의했다. 그해 9월 21일에 모인 경남노회는 다시 고려신학교 승인을 취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교회쇄신론자들과 이를 반대하는 친일 전력의 김길창 측의 대립이 심화된다.

고려신학교를 떠난 박형룡 박사는 48년 6월 20일 서울 창동교회에서 시작된 새로운 신학교에 가담해 임시교장에 취임했다. 박형룡이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을 때 따라왔던 34명의 학생 대부분이 다시 박형룡을 따라 이 학교로 옮겨왔다. 이 학교가 장로회신학교였다. 이 학교 설립을 주도한 이들이 권연호 계일승 김선두 김현정 이운형 이인식 전인선 등이었으나 사실상 이 학교는 고려신학교에서 따라 온 학생들을 첫 입학생으로 개교한 급조된 신학교였다. 이렇게 되자 장로교회에는 고려신학교 외에도 김재준이 이끄는 조선신학교와 박형룡이 중심이 된 장로회신학교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장로회신학교도 49년 4월 제35회 총회에서 직영신학교로 가결됨으로써 신학적 입장을 달리하는 두 신학교가 총회직영 학교로 가결된 것이다.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 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51년 5월 총회는 양 신학교의 직영을 취소, 양 신학교를 합동하여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정에 따라 51년 9월 18일 대구에서 신학교를 개교했다. 이것이 총회신학교였다. 감부열(Edwin Campbell) 선교사를 초대 교장으로, 인돈(William Linton) 권세열(Francis Kinsler) 조하파(Joseph Hopper) 선교사와 김치선 계일승 명신홍 박형룡 한경직 목사가 초대 교수로 추대됐다. 이때 조선신학교 측은 학교 통합에 응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신학교를 운영하다 53년 ‘기독교장로회’라는 이름으로 분립했다. 조선신학교는 이후 한신대학교로 발전했다.

대구에서 시작된 총회신학교는 53년 서울로 옮겨가 남산의 옛날 조선신궁 자리에서 수업했다. 이 자리가 적산(敵産)이었으므로 정부로부터 불하를 받아 교사 건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3000만환을 사기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에큐메니컬운동을 지지하는 측과 이를 반대하는 측이 대립했다. 이 싸움은 결국 59년 대전에서 모인 제44차 총회에서 폭발했다.

총회가 두 파로 나뉘어 에큐메니컬 측이라고 불린 연동 측은 서울 광장동 353번지에 1만9000평의 대지를 구입, 교사를 지어 ‘장로회신학교’로 새출발했다. 에큐메니컬운동을 반대하는 NAE 측인 승동 측은 사당동에 교사를 짓고 옛 이름 그대로 ‘총회신학교’로 출발했다. 전자가 지금의 장신대로, 후자가 총신대로 발전하고 있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 역사신학)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8.10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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