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73)

선교사들의 귀환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美 군정 자문관 소임 언더우드 ‘귀환 1호’

한국에서 외국선교사의 역할은 대단히 컸다. 해방 전에는 말할 것도 없지만 해방 이후에도 선교사들은 한국교회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해방과 함께 한국교회 재건과 동시에 교회 부속 기관들도 재조직 됐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신사참배 문제로 폐쇄됐던 학교와 병원들도 재건되거나 신설됐다. 이 과정에서 한국을 떠났던 선교사들도 다시 돌아와 이 작업에 동참하게 된다.

해방이전까지 선교사 총수는 1500여명에 달했다. 이중 장로교 선교사는 690명으로 전체선교사의 45%를 차지했다. 감리교는 430여명으로 28%, 구세군이 125명으로 8%에 였다. 그러나 1930년대 말부터 선교사 수는 서서히 줄었다.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하자 휴가 혹은 안식년이란 이름으로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났고, 40년 이후에는 파송되는 선교사가 없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 또한 강화됐다. 설교 내용을 감시하고 일부 찬송가를 금지하는 등 목회가 제한을 받으면서 외국 선교부는 더 이상 한국에서 활동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주한 미국총영사 마취(G March)는 자국민의 철수를 권고했고, 40년 11월 16일에는 미국 정부가 특별히 준비한 마리포사(S S Mariposa)호로 미국인 선교사와 자녀들 219명이 한국을 떠났다. 그해 말에는 이미 90%의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을 떠났다. 끝까지 남아 있던 선교사들은 일제에 의해 추방되기도 했고 ‘적성국 국민교환’이라는 이름으로 가택 연금되었다가 42년 6월 이후에야 추방형식으로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주한 선교사들의 활동은 중단됐고 평양외국인 학교와 같은 부속 기관도 40년 11월 이후 폐쇄됐다.

이후 해방이 돼 선교사들이 귀환하기 시작하면서 선교사업이 재개 된다.

45년 9월 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그해 11월 미국 정부에 선교사들의 귀환을 청원했다. 미 국무부는 한국으로 갈 수 있는 운송수단 제공을 약속했다. 혼란한 해방 공간에서 미 군정을 지원해줄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내한한 첫 선교사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장로교의 언더우드(H H Underwood)였다. 그는 45년 10월 26일 입국했다. 이듬해 1월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이자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육학을 가르쳤던 제임스 피셔(James E Fisher)가 입국했다. 이들은 선교사 신분을 유지하면서도 미 군정청의 인사와 교육부분 자문관이었다. 또 같은 시기에 남장로교의 의사 윌슨(Dr R M Wilson)이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입국해 동행했던 감리교의 아펜젤러(H D Appenzeller)와 함께 2월부터 미 군정청에서 일했다. 해방 전 서울에서 활동했던 윌리엄 커(William Kerr) 또한 미 군정창 관리로 비슷한 시기에 입국했다.

이들을 통해 한국에서 외국 선교사들의 존재 가치는 확인됐다.

효과적인 군정을 위해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언어와 풍습을 이해하는 선교사들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하지 중장은 선교사들의 귀환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해외선교단체들로 구성된 ‘해외선교대회한국위원회’(The Korea Committee of the Foreign Mission Conference)는 45년 10월 15일 회합에서 한국선교를 재개하기로 공식적으로 합의했다.

46년 4월에는 처치 월드 서비스(Church World Service)를 대표하여 빌링스(B W Billings) 박사가 내한했다. 곧 이어 감리교의 벡커(A L Becker) 젠슨(A K Jensen) 스나이더(L H Snyder)가 장로교 및 다른 선교단체 대표와 함께 그해 여름에 입국했다. 11월에는 미국의 앤더슨(L P Anderson) 브란넌(L C Brannon) 아멘트(C C Amendt) 사워(C A Sauer)가 입국했다. 또 북장로교 선교사들인 플레쳐(A G Fletcher) 코엔(R C Coen) 램프(H W Lampe) 아담스(E A Adams) 보켈(H Voelkel) 로즈(H A Rhodes) 블렝(W N Blair) 등이 1946년 내한하여 북장로교 한국선교부를 재건했다.

남장로교의 경우 46년 1월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들어온 윌슨 의사를 시작으로 린튼(W A Linton) 커밍(D J Cumming) 하퍼(J Harper) 등이 입국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부가 재건됐다. 남장로교의 경우 48년까지 이전에 한국에서 활동했던 17명의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선교에 동참했다. 49년까지 총 29명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입국했다.

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 윌리엄 스캇(W Scott)과 프레이져(E J Fraser)도 46년 여름 입국하여 이전의 선교 사업을 계승하였다. 곧 여의사 프로렌스 머레이(F Murra)를 포함한 세 사람의 여선교사가 다음해 여름 미군이 제공한 수송수단을 통해 입국했다.

부산·경남지방에서 일했던 호주선교사들도 내한을 준비했다. 해방 후 첫 두 선교사, 곧 조지 앤더슨(G. Anderson)과 헤롤드 레인(H Lane)이 46년 10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앤더슨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52년 다시 왔다. 47년 5월에 던(E W Dunn) 레가트(D F Leggatt) 위더스(M Withers) 커닝햄(F W Cunningham)이 내한하기까지 6개월 간 레인은 한국에서의 유일한 호주장로교 소속 선교사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이 5명의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일했다. 그 외에도 구세군, 성공회, 침례교, 성결교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선교 사업을 재개했다. 이들은 해방 후 한국교회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 역사신학)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8.2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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