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 선교사 이기풍의 제주행전

<기획특집> 장로교 총회 조직 100년을 기념하며

뉴스파워 강경구 기자  

제주도 모슬포로 가는 길

제주도의 오래된 옛 길을 걷는다. 8월 폭염을 식혀주는 바닷바람이 반갑고 고마울 뿐이다.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운치와 풍광은 제법이다. 100년전 이 길을 걸었을 누군가의 삶이 노래처럼 마음을 우러나오고 100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 우리는 그를 생각하고 그의 삶과 기도에 한국교회 회복이라는 여지를 담는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인 1908년 4월 이기풍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로 명명되있던 제주도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한국인 최초 선교사로 명명되어 파송된 제주도를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다녔다. 가는 곳마다 세워지는 교회와 하나님을 향한 갈망 이면에는 그를 죽이려는 핍박과 죽기살기로 버티는 오랜 관습이 견고한 저 한라산처럼 우뚝 서있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여파를 몰고 제주도로 입성했지만 제주도는 1899년 천주교 전래이후 1901년 이재수의 난으로도 알려진 신축교난으로 인한 천주교 박해로 관덕정에서 170여 명이 몽둥이에 맞아죽은 것을 포함해 900여 명이 칼과 몽둥이로 도륙되어 죽는 등 당시 이기풍 선교사의 선교적 고뇌는 끝이 없었을 것이지만 위대한 선교적 결과는 역사로 남아 우리들의 무딘 가슴을 흔든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평양의 악명 높은 난봉꾼이자, 다멕섹을 향해가는 살기(殺氣)로 분기탱천한 사울처럼 그는 언제나 복음의 훼방꾼이었다. 평양의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 선교사를 향해 돌멩이를 집어던져 턱을 부숴뜨렸던 그에게 예수님은 사도행전의 사울처럼 불렀고 사용하셨다. 청년 이기풍은 깡패이기도 했지만 6살에 사서오경을 읽었고, 12살에 붓글씨로 장원, 30세에 묵화를 그려 주변으로부터 총명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청일전쟁(1894-1895)이후 피난한 원산에서도 여전히 복음의 박해자로 기록되어 있다. 평양대박해 기간이기도 한 1894년에 예수를 영접했고, 1903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08년 제주도 입성후 1911년 10월에 전라노회가 결성되었고, 1912년 9월 1일, 한국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었던 때와 이기풍의 삶은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  

그가 제주도에 첫발을 내딛은 이후 제주도에는 성내교회 건립과 삼양, 내도, 금성, 한림, 협제 등지에 복음이 전파됐다. 거침없이 바위를 부숴내리는 파도처럼 복음은 질풍노도가 되어 순식간에 제주도엔 교인 410명과 예배당 3개, 기도회 처소가 5곳으로 늘어나는 등 매주 3백여 명이 제주와 민족복음화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조선인 선교사로, 한국인 장로교 선교사로 기억되는 이기풍 목사, 그렇지만 그의 제주도 선교기간동안 사준과 사영 그리고 사라 등의 자녀들을 먼저 하나님께 보내는 뼈아픈 통한의 시간을 보냈으며 극심한 영양실조와 텃세로 죽을고비를 수없이 여러번 넘겼다.

장로교 총회 조직 100주년 제주도 이기풍 선교사가 남긴 것  

청일전쟁의 와중에 하나님은 이기풍를 부르셨다.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조선을 흔들고도 남을 거대한 폭풍우를 준비하신 것이다.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 선교사의 콧등을 휘갈긴 이기풍의 돌팔매는 자신의 마음속으로 깊은 자책과 회심의 순간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 무지몽매한 청년의 마음속을 복잡하게 했던 양심의 가책은 성령의 강한 역사로 이어졌으며 그를 제주도와 대한민국 복음화의 초석으로 만들어 놓았다. 무언가? 이 대한민국을 역동할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누구로부터 시작되는가? 한국교회의 산적한 문제와 끝없이 파고드는 분열의 씨앗들을 잠식할 성령의 강한 역사는 어디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걸까?

어쩌면 이기풍이 걸었을 모슬포의 한적한 해안가에서, 저 멀리 그의 흔적이 묻어나는 100년된 모슬포교회를 바라보면서, 한국교회 장로회 100년이 주는 역사적 의미와 이제 어떻게든 하나를 지향해야 할 선교적, 아니 순교적 사명이 필요할 때는 아닌가... 그저 생각할 뿐이다. 아무튼 이기풍 목사는 한국장로교가 1912년 9월 1일 첫 총회를 조직하면서, 중국 산동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기폭제가 됐으며, 그가 떠난 제주도엔 30개 교회가 설립되었고, 1930년에는 제주노회가 조직됐다. 2012년 올 해로 제주도는 60만명을 상회하는 인구가 살고 있으며, 기독교 인구는 7%로 5만명에 이르는 크리스챤이 살고 있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8.22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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