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74)

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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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투옥 중 기독교로 개종 신앙인의 삶

우리나라는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 하에 남한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5월 31일 개회됐고, 이승만과 신익희가 정·부의장으로 선출됐다. 국회는 헌법 제정에 착수해 헌법기초위원이 제정한 전문 및 본문 103조의 대한민국 헌법을 7월 12일 국회 의결을 거쳐 7월 17일 공포했다. 헌법 절차에 따라 7월 20일 국회 제32차 본회의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고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 이시영이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7월 24일에는 정·부통령 취임식을 거행하고 8월 3일에는 국무총리를 임명했다. 또 국무위원, 처장, 대법원장이 차례로 임명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됐다. 그해 12월 12일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는 찬성 41표, 반대 6표라는 절대다수로 대한민국 정부가 한국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어 개별적인 승인이 뒤따라 자유 우방 50여개국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은 60년까지 12년간 집권하고 4·19혁명으로 하야했다. 그의 치세기간의 공과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를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元勳)이자 우리 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숭상하는가 하면, 한반도의 통일국가 건설을 저해하고 민주주의 발달을 가로막은 독재자로 규탄하기도 한다.

이견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반공 노선을 취한 것은 가장 큰 공헌으로 간주되고 있다. 46년 8월 미 군정이 조사한 여론조사, ‘귀하가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8453명의 응답자 중 70%에 해당하는 6037명이 사회주의를, 7%에 해당하는 574명이 공산주의를 찬성했다. 곧 77%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찬성했고 자본주의를 선택한 이는 1189명으로 14%에 불과했다.

이승만은 좌익이 유리한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반공 노선을 고수했다.

46년 6월 11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독립촉성국민회 전국대표자대회 연설에서 이승만은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 땅에 발 못 붙이게 하자”고 역설했다. 이 일로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늙은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승만은 북한의 공산정권과 달리 남한에서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반공 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광복에서 6·25전쟁 이전까지 월남한 인구는 약 1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은 남한에서의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시켜 주었다. 사상이나 이념적 공간을 연결하는 사상 연쇄(idea-chains)에 주목할 때 자유민주주의나 반공사상은 이승만 자신의 기독교 신앙이 그 토대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배재학당 출신인 이승만은 한성감옥에 투옥돼 있을 당시(1899.1∼1904.8) 기독교로 개종했고 일생동안 기독교 신자로 살았다. 그에게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국가 건설에 대한 이상이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이승만은 사실상 정교분리 원칙을 무시하면서 기독교인을 대거 등용했다.

국회의원 가운데서도 기독교 신자율이 높았다. 제헌국회의 경우 북한에 배정된 100석을 제외하고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는데 그중 25%에 해당하는 50명 정도가 기독교 신자였다. 그 가운데 4명은 목사(이윤영 오택관 이남규 오석주)였다. 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 21개 부·처의 장 가운데 기독교 신자가 9명이었고 그중 2명은 목사였다. 그의 집권기 정부의 19개 부 장차관 242명 가운데 38%, 그리고 국회의원 200명 중 약 25%가 기독교 신자였다. 자유당 정권 때 정부 요직을 맡고 있던 사람들의 종교적 배경을 보면 개신교 39.1%, 유교 17.6%, 불교 16.2% 천주고 7.4%순이었다. 실제로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자유당 정권에 참여하고 있었고 기독교적 의식이 공공연히 시위되기도 했다. 이런 점 때문에 이만열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을 ‘기독교(적) 정권’이라고 불렀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기독교적 가치에 근거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 점은 칭송받을 만하다. 문제는 이 시기 한국 교회는 국가권력에 대한 정당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기독교 신자이고 그의 정부가 친기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 맹목적 지지를 보내고, 교회와 국가 간의 경계선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없었다는 점은 부끄러운 역사의 단면이다.

당시 교회는 이 대통령을 이 민족에 보낸 모세로 받들고 그가 이끄는 정권에 무조건의 갈채를 보내는 오류를 범했다. 교계 인사들이 그의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후원할 뿐만 아니라 52년과 56년 그리고 60년의 정·부통령 선거 때 그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52년 8월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교계 지도자들은 5명의 입후보자 중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지지하기로 결의하고 권연호(權蓮鎬)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주목’으로 변경한 것, 군목 제도를 도입한 것 등을 지지 이유로 들었다.

56년 선거를 앞두고 있을 때 이승만은 서울 정동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됐다. 그해 5월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교계는 이승만 장로를 대통령으로, 이기붕 권사를 부통령으로 추대하기 위한 ‘정·부통령 선거추진 기독교중앙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장은 전필순(全弼淳) 목사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공개적으로 선거운동에 가담했고 그 정부의 불의에 대해 눈감았다. 이 시대 교회가 권력에로의 경도 때문에 의와 공평에 둔감하고,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에 대한 경계를 허문 일은 뼈아픈 교훈으로 남아 있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 역사신학)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8.2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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