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75·끝)

한국교회의 상황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동포 밀물… 광복 후 기독인구 연 25% 성장

지난 몇 주 동안 1945년 해방 이후의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재건에 대해 기술했다. 이번 글에서는 해방 이후부터 6·25 전쟁 발발 이전까지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을 기술함으로써 2011년3월4일부터 1년 6개월 간 연재해 왔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이야기를 마감하고자 한다.

6·25 전쟁 이후는 말할 것도 없고 해방 이후 5년간도 아주 혼란한 시기였다. 인구변동 추이만 보더라도 이같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될 당시 한반도 인구는 1300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해방 당시는 2500만 명에 달했다. 해방이 되자 해외 이주 한국인들이 귀환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조선때 한국인의 해외 이주는 다른 나라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잦았다. 해외 거주 동포가 전체인구의 12%를 상회하는 400만 명에 달했다. 이들 중 비정착 해외 한인들은 해방과 함께 귀환 길에 오르게 된다. 해방 3년간 공식 귀환자는 일본에서 100만 명, 중국에서 6만 명, 만주에서 1만 명 등을 포함하여 120만 명에 달했다. 이들 절대다수가 남한을 선택했다. 또 100만 명이 넘은 북한 주민이 월남했다. 따라서 남한 인구는 급증했다. 해방 당시 남한 인구는 1588만 명이었다. 그러나 1년 만에 350만 명이 증가해 거의 2000만 명에 육박하였다. 해방 당시 서울 인구는 100만 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3년만에 40여만명이 늘었다.

도시화·산업화가 이뤄지지 않는 가운데 인구의 급증은 경제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실질적인 실업자 수는 150만 명으로 인구의 10%에 이르렀다. 해방되던 해의 물가상승률은 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전년보다 25배가 높을 정도였다. 해방정국의 경제적 무질서는 정치적 혼란과 함께 사회혼란의 요인이었다.

이런 것들이 한국 기독교 ‘형성의 결정적인 시기’의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역할은 증대됐다. 선교 재개를 위해 내한한 다수의 선교사들은 ‘한국의 현실에서 교회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한국인들은 우리의 사랑과 구호 협력의 손길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해방 당시 한국교회 신자수는 약 40만 명에 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기독교 인구는 약 30만 명으로 추산된다. 북한을 장악한 공산정권이 의도적으로 1946년 11월 3일 주일 선거를 강행하려 했을 때 주일선거를 반대하는 ‘이북오도연합노회의’ ‘결의문’을 보면 “북한의 2000교회와 30만 기독교신도들은…”이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당시 북한의 기독교 인구를 3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김양선은 해방 당시 남북한 기독교 인구를 약 70만 명으로 보고 있다. 김양선은 “일제 말기 교회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뜻있는 신도들은 많이 지하에 숨어버렸음으로 일시 70만을 산(算)하던 프로테스탄트의 신도 수는 거의 반수로 줄었다”고 했다.

37년 당시 장로교인수만 34만6000명에 달했는데 기독교에 대한 탄압으로 교인수가 감소된 점을 고려하더라도 해방 당시 개신교 신자는 약 40만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남한의 기독교 인구는 약 1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해방 후 해외 거주 한국인의 귀환과 월남 기독교인들의 증가로 교회는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해방 후 6·25전쟁 초기까지 월남한 인구 중 기독교 신자는 약 8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북한 전체 기독교 인구의 27%에 해당한다. 북한 기독교 인구의 3분의 1이 남한으로의 이주를 선택한 것이다.

47년 봄에는 수 백 명 교역자들이 월남한 것으로 보고 됐다. 따라서 남한에서 기독교인구의 증가와 교회의 신설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 시기 설립된 대표적인 예가 45년 12월 베다니전도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영락(永樂)교회였다. 공산주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27명으로 시작했으나 교인수가 급증해 47년 1월부터는 한국 최초로 주일예배를 2부로 나눠 드리기 시작했다. 영락교회는 한국 최초의 ‘대형교회’로 발전해 갔다. 이 교회는 한국에서 성장지향의 모델교회로 인식되었다. 후일 영락교회 교인들이 피난지에서 교회를 설립하여 부산영락교회(51.1), 대구영락교회(51.2), 제주영락교회(52.1)로 발전했다.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서는 귀국 동포들, 그리고 월남 크리스천들을 수용하는 교회들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사회적 혼란은 종교적 열성을 강화시켰다. 그 결과 기독교 신자는 55년에는 60만, 50년대 말에는 100만 명으로 늘었다. 해방 후 15년 동안 개신교신자 수는 연평균 25% 이상 성장했다.

한국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해방 정국에서부터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수적 우위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이 한국의 엘리트집단의 다수를 점했고 사회 지도층을 형성했다. 한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을 매개로 한 서구문화의 유입은 홍의섭 박사에 의해 이미 확인된 바 있다. 해방 후부터 50년대까지 한국사회 모든 영역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던 이들은 미국유학 출신의 엘리트집단이거나 과거 기독교 교육을 받았던 인물들이었다. 한국교회는 이들 지식층 집단의 다수를 포함했다. 따라서 정계와 관료집단, 국회, 교육, 의료, 언론계 등 각계각층에 기독교의 영향력은 심화됐다.

해방 이후 한국기독교는 새로운 과제 앞에 부름 받고 있었다. 이 시기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은 확대되었으나 사회적 신뢰는 점차 실추되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뒤돌아보는 역사는 언제는 반성을 요구한다 하지 않았던가! 부족한 소품을 사랑으로 덮고 격려해 준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 역사신학)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2.09.0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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