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선한 목자 사무엘 루터포드

영국교회 부흥의 주역과 현장의 역사 (6)

뉴스파워 김현배 목사

사무엘 루터포드의 회심

사무엘 루터포드 (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1600년 니스벳 (Nisbt)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617년 그는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하여 성경과 라틴어와 헬라어, 교회사, 개혁교회 신학, 논리학 및 수사학 등의 교육과정을 공부하였다. 1621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2년 뒤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그의 탁월한 사고와 능력으로 인해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회심 시기와 정황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1620년경 약 20세쯤으로 전해졌다. 그는 교수 사역 중 간음 사건으로 인해 인생의 어려운 시련을 겪으면서 자신의 심령 속에 있는 남아있는 죄의 부패함을 보게 되었고 몸소 낮아지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렵고, 어두운 인생의 시간 때 주님이 루터포드를 찾아 오셔서 그를 만나 주셨다. 이 사건 이후 교수직에서 물러난 루터포드는 주님을 영접하는 회심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회심 체험 사건 이후 루터포드는 완전히 변하게 되어 오직 주님만을 따르게 된다. 또한 그의 회심의 흔적은 그가 십자가 사건에 대한 감사와 감격에 사로잡힘과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순종하는 삶 속에 잘 나타났다.

회심을 체험했던 루터포드는 귀부인 켄 무어에게 “나의 왕 되신 예수를 위하여, 그의 왕권을 위하여, 그리고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그의 나라의 자유를 위하여 고난 받는 삶을 살게 하셨다”라는 글을 보내기도 하였다. 구원하는 믿음에 이른 그의 회심으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 앞에 굴복하였고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는 다른 영혼들에게 설교하며 돌보는데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며, 특히 교회 개혁과 스코틀랜드의 영혼을 깨우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루터포드 당시 시대적 상황 - “카톨릭 전통이 다시 살아남”

신학자로서의 루터포드는 종교개혁을 통해 기독교가 얻어낸 것들이 위협받던 시대에 살았다. 1560년 종교개혁시기에 스코틀랜드에 장로교 체계가 세워졌고 1592년에 의회에서는 장로교 체계를 법으로 한층 더 강화하였다. 하지만 영국 왕 제임스 6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소집하기를 계속하여 거부하고 있었고, 1606년 의회령에 의하여 감독주의가 부활되면서 가톨릭 전통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국왕은 감독제에 복종할 것을 결정하고, 이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을 귀양 보내었다. 그 당시 교회 예식서와 헌법은 왕이 교회 위에 군림하였으며 교회 안의 상당수 사람들은 왕권이 교회 위에 있다고 믿었다.

1618년 퍼스에서 열린 총회에서는 장로교회의 성례집전을 바꾸도록 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감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갈수록 강화하였다. 그 결과 성찬을 무릎 꿇고 받는 것, 세례식 때 십자가 모양을 긋는 것, 미사 드릴 때에 입는 제사장 복장, 나무 제단에 절하는 역겨운 행위들이 있게 되었다. 그들은 예배에 있어서 모든 미신의 온상이며 교리에 있어서 오류 투성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존재와 속성들을 희생시키고 인간의 본성과 이성을 드높였다.

이처럼 알미니안과 감독주의가 강한 시대에 살았던 루터포드는 장로교주의에 반대되는 잘못된 사상인 알미니아니즘 (Arminianism) 에 의해 위협받던 정통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이 부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왕이 강압적으로 로마 카톨릭적인 성공회식 예배를 스코틀랜드 교회에 적용시키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루터포드는 종교개혁시대에 누렸던 과거 찬란한 영광이 회복되기를 원하였다.

앤워스 교회에서의 목회 사역 -“자신이 목양했던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했던 목회자”

1627년 루터포드는 스코틀랜드 앤워스 (Anwoth)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교회에 목사로 청빙 받았다. 목회는 물러 설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교회는 정말 작은 교회였으며, 매우 작은 숫자들만 모이고 있었다. 그는 부임하여 성경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본격적인 목회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복음을 증거한 복음전도자로서 그의 목회 사역은 그의 수고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을 신앙의 바른 지식과 실천으로 이끌었다. 비록 시골의 작은 교회였지만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확산을 위하여 사력을 다해 사역에 임하였다. 그의 마음에는 도회지의 중요한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고자 하는 기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루터포드는 세상에서 어떤 명성을 얻고자 하는 것에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그리스도 때문에 온 몸을 던져 희생적 수고를 하였다. 성도들과 이웃교구에 속한 사람들이 루터포드의 설교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의 설교 사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신학적 확신들은 성경의 귄위이다.

루터포드는 목회 사역하는 동안 가르치는 일, 설교하는 일, 심방하는 일, 저술하는 일이 항상 그의 일이었다. 그는 항상 기도하고 있었고, 언제나 설교하고 있었고, 언제나 환자들을 심방하였으며, 언제나 교리문답 교육을 하였고 언제나 쓰고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사역을 하는 동안 항상 새벽 3시에 일어나 정오까지 기도와 말씀 묵상과 연구를 하였고, 오후에는 환자들이나 고통 중에 있는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을 심방하였다. 그리고 회중들의 경건생활을 점검하고 교리 교육으로 양 떼를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는 자신이 목양했던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성도들과 밀접한 사랑의 관계를 맺어갔다. 이처럼 그는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였던 신실한 목회자이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가르침과 설교사역을 통하여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난다.

또한 루터포드는 앤워스에서 목회 하는 동안 인간이 경험하는 슬픔과 고난을 겪게 된다. 그는 13개월 동안 투병 생활을 하다가 주님의 품으로 간 아내의 고통스런 모습을 지켜 보아야 했으며, 또한 딸 한명 제외하고 사랑하는 두 자녀를 잃게 되고 나중에는 어머니 마저 하나님의 나라로 가시게 되었다. 이러한 시련을 겪으면서 그는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깊은 동정심을 갖게 되면서 사랑의 선한 목자로 성장하게 된다. 안워스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자들 중에는 경건한 성도가 꽤 있었다.

그의 사역 기간 동안 18세기 처럼 숫자적인 부흥은 없었지만 루터포드는 말씀을 통해, 그의 영성으로 잠들어 있는 스코틀랜드의 영혼을 일깨우게 되었다. 혼탁한 시대에 영적 방향을 잡아주고 그들을 각성시켰던 것이다.

루터포드의 신앙의 시련과 승리 - “본 받아야 할 그의 영성”

루터포드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분투적인 믿음의 삶을 살았다. 그때 또 하나의 큰 시련이 다가왔다. 1645년에 신학적으로 알미니안주의자인 시세르프 (Sydserff)가 겔로웨이 (Galloway)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감독주의를 열렬히 옹호한 알미니안 주교였기 때문에 개혁 신앙의 후예이며 장로교주의자였던 루터포드에게 독을 뿜어대면서 감독권을 인정하라는 압력을 가하였다. 루터포드가 계속 알미니안 사상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장로회주의에 대한 확신은 감독 제도를 배격하였고 이것은 결국 왕의 지지를 받고 스코틀랜드에 감독교회를 세우려는 성공회주의자들과의 충돌을 자아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하시는 은혜요 불가항력적인 은혜임을 굳게 믿었다. 정부의 칙령에 의하여 교회당에서 모이지 못한 언약도들은 옥외집회를 감행하였는데 이 때 루터포드 목사는 남부 스코틀랜드의 주된 옥외집회 설교자로 나섰다.

그는 감독 제도를 부정하는 반역적인 설교를 했다고 해서 결국 1636년 7월 27일 종교 법원에 소환되어 목회직 박탈과 스코틀랜드 어디에도 설교할 수 없도록 금지 당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장로회주의 사상을 철회하지 않았으며, 감독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에버딘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 형벌을 받았다. 그는 9년 동안 섬겼던 교회와 교우들을 주님께 맡기고 그 당시 감독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요새였던 에버딘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의 유배생활은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신앙의 자유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들을 경계하여 깨어 기도하도록 가르쳤다. 1638년 루터포드는 에버딘에 있으면서 장로회주의 확산에 힘을 실었다. 그는 감독주의자들과 맞서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싸워야만 하였다. 그는 감독주의를 격렬히 반대하였으며, 특히 장로교주의를 훼손시키려는 자들에 대하여 예리하게 파고들어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단지 고난이나 온갖 핍박을 견딘 자가 아니라 그 고난 중에 기뻐한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과 정신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자유를 위한 큰 투쟁의 선봉에 선 사람이었다.

루터포드의 서한집 (Letters) - “개혁주의 교리와 신자의 영적 경험 강조”

에버딘에서 유배 중에 있는 동안에 루터포드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경험했다. 이 루터포드의 경건한 유업인 서한집은 그가 에버딘에 유배되어 있을 때 쓴 것들이다. 총 365편의 편지 가운데 220편의 편지를 약 2년에 걸쳐 유배 중에 썼다. 역경이 없이는 은혜도 시들고 만다. 그의 시련은 큰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위로와 독려는 보다 더 컸다.

루터포드는 그곳에서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의 핵심인 주일성수와 성만찬 준수, 기도생활, 말씀생활에 순종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권고하면서 정반대의 생활이 가져다 주는 위험성과 주님의 징계를 두려워하라고 전한다. 그 편지 주제들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과 혐오스러운 죄의 죄 됨에 대한 깊은 의식을 보여 준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향한 위로와 권면으로 가득하고, 근심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깊은 동정과 양떼들에 대한 깊은 사랑, 천국에 대한 그의 불타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루터포드의 서한집이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 서신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아름다움에 빠져 버린 그의 마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편지들은 개혁주의 교리와 신자의 영적 경험들을 아름답게 조화시키고 있다. 개혁주의 영성의 고전으로 알려진 그의 서신들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깨달음의 빛을 비추어 주는 책이 되고 있다.

루터포드가 남긴 마지막 말 - “영광, 임마누엘 땅에 거하는 영광이여!”

루터포드 목사는 심판과 사형집행을 위한 왕의 소환을 받고 가는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그는 교수형을 당하지 않았다. 루터포드 목사는 그를 데리러 온 군사들에게 병상에 누워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보다 더 높은 재판관과 법정으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다고 전하시오. 나는 곧 몇몇 왕들과 소수의 귀족들만이 올 수 있는 곳에 있게 될 것이오.’ 그는 그의 입술에 다음과 같은 말을 간직하고 숨을 거두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잘 것이오. 그리고 내가 깰 때에는 그와 같음을 보며 만족할 것이오.” 하늘에서 영생을 누릴 확신은 언약도들에게 고난과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하도록 힘을 주었다.

루터포드는 1661년 3월 29일, 아침에 태양이 성 앤드류 지평선에 떠 오르자 그의 영혼은 의로우신 태양의 품 안에 안기었다. 그가 오랫동안 사모하였던 “높고 복된 임마누엘의 땅”으로 돌아갔다. 루터포드 목사의 시신은 성 앤드류의 옛 성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다음과 같다:

“어떤 인간의 혀나 펜이나 솜씨가 그 유명한 루터포드에게 명령할 수 있을까? 그의 학식은 그의 유명세를 자아냈으며 참된 경건이 그의 이름을 흠모하였네. 그는 실로 위에 있는 것들을 구하였으며 임마누엘의 사랑을 획득하였다네. 그는 가장 정통적이고 건전한 신학자였으며 수많은 오류들이 좌절되었다네. 시온의 왕과 시온의 영화와 스코틀랜드의 언약적인 법조항들을 위하여 그의 시간이 다하는 날까지 가장 열성적으로 만족하며 살았다네. 그런 후에 그는 그가 환상 중에 보았던 풍성한 열매를 얻게 되었다네.”

루터포드의 세상적인 야망의 결핍은 지금 서구 사회에 침투해 들어오고 많은 교회 속에 잠식되어 있는 성공지상주의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복음사역자요, 그는 그 시대에 겸손하고 탁월한 사역을 감당하였던 언약도 설교자이다. 그는 학식이 깊은 칼빈주의 신학자요, 종교개혁을 위해 논쟁했던 논쟁자요, 개혁주의 신앙의 대표자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다 간 믿음의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가혹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교회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확고히 붙들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한 루터포드의 사역과 영성으로 수 많은 스코틀랜드의 영혼들을 깨우쳤고 그리고 영적으로나 신학으로나 교회적으로나 큰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영적 거인 중 한 사람이요, 교회의 진정한 보석 같은 사람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부흥의 불씨가 되었던 신실한 목회자이다.

사무엘 루터포드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

1. 루터포드의 삶과 목회 사역을 특징짓는 핵심적인 요소는 경건성이다.

그는 항상 새벽 3시에 일어나 정오까지 기도와 말씀 묵상과 연구를 하였다. 그는 항상 기도하고 있었고, 항상 성경을 묵상하고 있었고, 항상 설교하고 있었고, 항상 교리 문답을 가르치고 있었고, 저술하고 있었고, 항상 환자들을 심방하고 있었다. 그는 엄격하고도 철저하게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그의 사고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다. 그는 진리를 위하여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 주었던 경건한 목회자였다.

2. 루터포드의 또 다른 특징은 감동을 주는 설교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다.

그는 교회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감동을 주는 위대한 설교자이다. 그의 설교와 편지에 감동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흘러 넘치는 모습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영광으로 완전히 불탄 모습으로 가득하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는 자는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였다.

3. 루터포드는 자신의 양들을 끝까지 사랑했던 선한 목자이다.

그는 자신이 목양했던 교회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리고 그는 근심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깊은 동정과 고통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심방과 말씀으로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이처럼 루터포드는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였던 신실한 목회자이다. 그는 작은 교회였지만 도시교회로 부터의 청빙을 마음에 두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성도들을 사랑하면 목양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정말 신실하며 사랑이 많은 선한 목자이다.

또 다른 부흥을 소망하며

점점 세속화 되어 가고 기독교가 침체되어 가고 있는 이 시대는 루터포드와 같은 신실한 목회자, 감동을 주는 설교자를 갈망하고 있다. 또한 우리들에게 루터포드의 경건과 영성이 큰 도전을 주고 있으며, 루터포드처럼 교회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목회자를 그리워 하고 있다. 고통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자신이 목양하고 있는 양 떼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목회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 스코틀랜드 부흥의 불씨가 되었던 루터포드의 영성이 리바이벌되어야 한다.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루터포드와 같은 설교자를 통해 이 땅에 참된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김현배 목사/독일 함부르크 한인선교교회 담임목사.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겸 독일 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뉴스파워 유럽 본부장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3.02.04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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