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인 복음 전도자 존 웨슬리

영국교회 부흥의 주역과 현장의 역사 (9)

뉴스파워

김현배 목사 

존 웨슬리의 회심

동시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던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는 1703년 6월 17일 노스 링컨셔에 있는 엡워스 (Epworth)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영국 국교회 목사였다. 그는 학식과 재능, 신앙 면에서 비범하였던 그의 어머니 수잔나(Susanna)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기본고전 교육의 기초를 잘 닦았고 특히 히브리어를 빨리 터득하였다. 1720년, 17세가 되었을 때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경건운동을 (Holy Club)을 일으키면서 회원들과 함께 규칙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매일 성경 읽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며, 희랍어 신약 공부와 고전 연구하며, 매주일 성찬식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했다. 또한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의 모든 죄악을 경계하면서 올바르고 순결한 생활을 할려고 노력했으며,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감옥에 있는 자들을 방문하고 선행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의를 쌓기에 열중하였다. 그는 그야말로 율법 아래에 있었지 은혜 아래에 있지 않았으며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칭의 없이 성화를 이룰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그의 가슴 속에서는 늘 영적싸움이 있었다. 또한 어느 날 선교 여행 중 배 안에서 폭풍 가운데서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모라비아 교도들을 보면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웨슬리 자신은 아직 죽음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고 구원의 확신도 없었음을 느끼게 된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런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에 있는 모라비안 교인들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 속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변화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것을 듣는 도중에 웨슬리는 그의 마음이 성령으로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는 자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해야 한다는 진리에 눈이 떠졌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사하셨으며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는 구원에 대한 확증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해서 오는 것이라는 진리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을 때 웨슬리는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회심을 체험했던 웨슬리를 사용하시기 시작했다. 그의 회심 체험은 18세기 영국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의 특징이 되었다.

영혼 구원에 대한 비전 - "온 세계가 나의 교구"

웨슬리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스가랴 3: 2절인 “이는 불에서 꺼낸 거슬린 나무가 아니냐?”이다. 왜냐하면 웨슬리 나이 6세 때 엡워스의 목사관에서 큰 불이 났을 때 그가 기적적으로 불에 데이지 않고 구조 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먼 훗날 감리교를 태동시키도록 그를 준비시킨 하나님의 섭리였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구출되었던 웨슬리는 회심 후 하나님께서 영국의 복음 전도 사역을 하도록 자신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었다. 33세의 나이에 목사가 된 웨슬리는 그의 비전인 “온 세계가 나의 교구” 라고 외치면서 유럽과 세계를 향한 그의 복음 전도 사업과 선교에 힘찬 시동을 걸었다. 그의 비전은 오늘날까지 수 많은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주고 있다. 그는 비전을 이루기 위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기도하였다. 런던 웨슬리 기념교회에 그의 기도실이 있는데 필자는 웨슬리가 새벽마다 기도했던 그의 기도실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유럽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웨슬리는 목표를 향한 한결같은 마음과 지칠 줄 모르는 끈기와 집념, 불굴의 정신, 타오르는 열정으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항상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도하는 일에 열중했다. 웨슬리는 마음 속에 불붙은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순회하면서 하루에도 4-5번씩 설교하였으며, 일년에 4-5천 마일 가량을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하고 설교하며 교구를 방문하였다. 웨슬리는 순회 설교자로 해마다 런던, 브리스톨, 글로스터,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영국의 방방곡곡에서 설교했다. 그는 특히 아일랜드를 사랑하여 무려 42회나 해협을 건너서 그들을 방문하여 설교하였다. 웨슬리는 18세기 말까지 영국에서 복음 전도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영적거인이었다.

열정적인 웨슬리의 설교 - "죽기까지 외쳤던 예수그리스도의 피"

회심 후 구원의 확신을 얻은 웨슬리는 1738년부터 어디서든 복음적인 설교를 했고 논리적이면서 감동 있는 따뜻한 설교를 했다. 웨슬리는 이러한 영적 경험을 한 후 옥스퍼드 대학에서 “당신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유명한 설교를 하였는데 이것이 그날로부터 웨슬리의 일생 동안의 설교의 중심이었다. 그는 조지휫필드 처럼 언제나 위대한 진리만을 열정적으로 전했다. 웨슬리의 설교 주요 주제는 죄, 하나님을 향한 회개, 회심의 절대적 필요성, 칭의, 원죄, 예수 그리스도의 피, 성령으로 인한 거듭남, 구속, 믿음, 십자가, 거룩함, 성령의 사역, 거저 받은 하나님의 은총 등이었다. 불붙은 웨슬리는 런던 시내나 시외를 막론하고 어디든지 강단을 빌려 주기만 하면 열심히 설교하였다.

그 당시 앵글리칸 교회는 웨슬리의 부흥 설교를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아 강단을 내어 주지 않았다. 이처럼 영국 국교회로부터 설교하는 일을 거절 당하자 그는 조지휫필드 처럼 옥외로 나가 들판이나 공원, 잔디밭, 광산, 거리, 들, 시장 등 회중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기쁨으로 설교했다. 야외에 모인 청중들 대부분은 교회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인 광부, 베짜는 직공, 철공소 사람들이었다. 그는 모든 사회 계층으로부터 모여든 회중 앞에서 항상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웨슬리는 어디를 가든지 맨 처음 하는 일은 항상 설교였는데 이른 아침이든, 늦은 밤이든, 교회당에서든, 채플에서든, 혹은 방에서든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놀라운 부흥의 현상

웨슬리가 설교할 때 마다 청중들 가운데 다수는 크게 감명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크게 부르짖기도 했다. 또한 설교자들을 조롱했던 사람들과 매우 방탕한 사람들 가운데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브리스톨에 있는 야외에서 웨슬리의 설교를 들은 회중들은 대략 1,000명에서 5,000명이 되었다. 설교를 듣고 은혜 받은 회중들은 무릎을 꿇고 회개하기도 하며, 눈물을 흘리며 쓰러졌다.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타락한 행위들을 치유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기쁨과 사랑에 완전히 사로 잡혔다. 어떤 때는 그가 설교하기로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여 보면 3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 회중들은 점점 늘어났다. 모인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개종하였으며, 20년동안 이나 무신론자였던 자가 회개했다. 방탕하고 타락했던 영혼들이 회개하고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꺼져 가는 등불처럼 메말라가는 영국교회에 부흥이 일어나면서 영국의회가 살아나고, 정치, 경제, 문화, 도덕, 윤리가 다시 살아났다. 이것이 18세기 영국 교회 부흥이며 웨슬리는 부흥의 주역이 되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

웨슬리는 자신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게 되고 또한 그의 설교를 듣고 많은 개종자가 생기게 되자 한 단체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개종자들을 바르게 교육하고 싶은 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개종자들이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서 더 깊은 영적 생활을 하고 자신의 협력자들과 능률있게 활동할 수 있게 하며 더 나아가 세계복음화를 위해 평신도를 훈련 양육시키기 위하여 연합된 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1740년부터 웨슬리는 구체적으로 교회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조직된 각 신도회를 여러 속회로 나누어 양떼를 보살피는 지도자를 한 사람씩 두었으며 그 감독이 각 지역을 돌며 설교하게 했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한 개의 완전한 교회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이 조직이 감리교회의 시작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조직과 체계는 그의 목적을 수행해 나아가는데 아주 적합했다. 설교자, 평신도, 교사, 찬양 인도자, 순회 구역, 양육 체계와 찬양팀, 애찬식, 철야예배 등은 그 당시 부흥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그는 120,000명의 인정받는 교인들로 구성된 협회들을 세우고 또 확장하도록 300명의 순회 설교자들과 1,000명의 지역 설교자들을 두고 떠났다. 그는 감리교 창시자이며, 그 사역 속에 많은 열매가 나타났다. 오늘날의 감리교회는 웨슬리가 남긴 유산으로서 진정 세계 교회 속에 큰 흔적을 남겨 놓았다.

지칠줄 모르던 웨슬리가 영원한 안식을 취함

18세기 영국교회와 사회가 어두운 때 능력있게, 열정적으로 사역한 작은 거인 웨슬리는 82세가 될 때 까지 지칠줄 몰랐으며 복음 전도의 선구자로서 목표를 향해 평생을 달려 갔다. 그는 죽기 며칠 전까지도 분명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거룩함으로 가는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웨슬리가 임종 시 남긴 마지막 몇 마디가 런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새겨져 있다. “이 세상에서의 최상의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마침내 지칠 줄 모르던 그의 삶의 바퀴는 움직임을 멈추었는데 1791년 88세를 일기로 65년간의 긴 사역을 접고 영원한 안식을 취했다. 그는 88년을 살면서 실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았다. 그는 회심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요, 말씀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요, 비전의 사람이요, 조직의 사람이요, 열정의 사람이다. 웨슬리 한 사람의 분명한 회심으로 인해 소망 없던 영국 교회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그는 18세기 영국 교회 부흥의 불씨이다.

또 다른 부흥을 소망하며

오늘날 교회가 점점 침체해져 가고 있는 이 시대에 뜨겁게 회심하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 회심을 경험한 후 변화되고 능력있는 설교자를 통하여 이 땅에 부흥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부흥 이전에 반드시 회심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은 부흥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적원리이다. 오늘날 웨슬리처럼 회심한 평신도는 어디에 있는가, 웨슬리처럼 회심한 교사는 어디 있는가, 웨슬리처럼 회심하여 불꽃같은 열정적인 삶을 사는 사역자가 어디 있는가, 웨슬리처럼 회심하여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전하는 선교사가 어디 있는가, 웨슬리처럼 회심하여 강단에서 진리의 불을 뿜어대는 설교자가 어디 있는가, 웨슬리처럼 회심하여 영혼 구원에 목숨을 건 복음 전도자가 어디 있는가, 사도 시대이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구령자는 웨슬리이다. 이것이 웨슬리를 통한 부흥이다.

오늘 우리들은 제 2의, 제 3의 회심한 웨슬리가 정말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왜 웨슬리의 새벽기도의 영성이 우리들에게 리바이벌 되지 않는가, 왜 웨슬리의 회심의 영성이 우리들에게 리바이벌 되지 않는가, 왜 웨슬리의 불타는 복음 전도의 영성이 우리들에게 리바이벌 되지 않는가, 왜 웨슬리의 불꽃같은 설교의 영성이 우리들에게 리바이벌 되지 않는가, 왜 웨슬리의 구령의 열정이 우리들에게 리바이벌 되지 않는가, 제 2의 웨슬리를 통해 이 땅에 참된 부흥이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웨슬리의 신앙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다시 리바이블 되어 이 땅에 참된 부흥이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또 다른 부흥은 성시화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김현배 목사/독일 함부르크 한인선교교회 담임목사.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겸 독일 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뉴스파워 유럽 본부장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3.03.0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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