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처럼 설교한 데이비드 몰간

영국교회 부흥의 주역과 현장의 역사 (18)

뉴스파워 김현배 목사


1859 웨일즈 부흥의 역사를 일으킨 데이비드 몰간과 험프리 존스

부흥의 땅 웨일즈 교회는 다시 침체되어 있었고, 기도모임은 생명이 없고 약화되어 있고, 설교는 정통적이지만 별로 영향력은 없었다. 이러한 때에 1858년부터 1860년까지 웨일즈에 불어온 부흥의 불길은 1859년에 절정을 맞이하였기에 지금까지 ‘1859 웨일즈 부흥’으로 부르고 있다. 웨일즈 부흥의 역사를 일으킨 주역으로는 데이비드 몰간 (Dafydd Morgan) 목사와 험프리 존스 (Humphrey Jones)목사이다.

존스는 감리교 (Wesleyan Methodist) 출신으로 미국에 잠시 있다가 돌아온 후 1856년 6월부터 웨일즈 트레돌 (Tre'r-ddol) 에서 '부흥 모임(revival meetings)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858년 10월에 험프리 존스가 설교하는 것을 데이비드 몰간 목사가 듣게 되고 그는 자신의 영적 궁핍함을 깨닫고 마음의 찔림을 받는다. 그는 그 후 자신의 영혼과 씨름하게 되고 며칠 후 그는 신비한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몰간 목사에게 새로운 생명력과 새 권능을 부어주셨다. 그리하여 몰간 목사와 존스 목사는 웨일즈 전역을 다니며 부흥의 불길을 지피게 된다.

사자처럼 설교했던 평범한 목회자 데이비드 몰간


데이비드 몰간 (Dafydd Morgan, 1814-1883)은 웨일즈 카디간 주 보드콜 밀 (Bodcoll Mill) 에서 태어나 칼빈주의 감리교인 (Cavlinistic Methodist) 으로 경건하게 성장했다. 그는 어떠한 은사도 지니지 아니했고 매우 평범하고 잘 알려지지 않는 목회자로서 아무도 그 사람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 임하였다. 그는 2년 동안 사자처럼 설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붙잡고 사용하셔서 1859년 웨일즈 부흥의 주역이 되게 하셨다. 그는 1836년 에반 에반스 (Evan Evans) 교회에서 회심한 후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몰간은 1841년 그 지역에 일어났던 부흥으로 큰 영향을 받고서 설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1857년에 안수 받은 후 그는 부흥이 시작되기 전부터 성령 충만함을 구하고, 항상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위해 기도했다. 몰간의 설교 비법은 이중설교 (double sermon)이다. 그는 전통적인 설교를 했지만 그러면서 다른 부분들이 있었다. 예배 때 찬양을 하고 아주 뜨거운 설교를 전했다. 초신자들이 남으면 앞자리로 초정을 하고 몰간은 그들 한사람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가족관계, 직업들, 개인적인 것을 묻고 조금 친숙해지면 강력하게 그들에게 권면하고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판정하고 그에게 맞는 ‘처방’을 내려주고 기도해 주었다.

웨일즈 부흥의 전문가 에피온 에반스 (Eifion Evans) 박사는 그의 저서 ‘Two Welsh Revivalist’에서 “그는 칼빈주의 감리교인의 영성을 가지고 있었고, 설교는 자기 최대의 능력 안에서 예화를 잘 썼고, 기도는 부흥을 항상 염두해 두면서 기도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순회 설교자로서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며 그가 설교하는 곳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복이 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게 되었다.

웨일즈 부흥사 험프리 존스

험프리 존스 (Humphrey Jones, 1832-1895)는 웨일즈 가디건 주 트레 돌 (Tre'r-ddol)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1854년 이후로는 미국 뉴욕과 웨일즈 웨슬레안 공동체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27세의 감리교 목회자인 존스의 사역은 그 당시 미국에서 일어난 대각성 운동과 찰스 피니 (Charles Finney)의 부흥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 이후로는 부흥사 험프리 존스로 알려졌다. 1858년 여름, 존스는 그의 조국 웨일즈에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돌아와서 먼저 고향인 Tre’r-ddol에서 설교하였다. 그때 교회에 사람이 꽉 차고, 교회 주변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마차가 지나갈 수 없었다. 교회는 부흥하고 밤에는 기도 모임이 열렸다. 이것이 몇 주 동안 반복이 되었고, 그 마을에 51명이 회심했다. 하나님께서 매 예배 때 마다 그의 메시지에 기름을 부으셔서 능력있는 말씀이 선포되었다.

또한 그는 은밀한 중에 기도를 많이 하였으며 매번 기도할 때 마다 마치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열정적으로 기도하였다. 그의 설교와 충만한 기도생활과 열정은 이웃하고 있는 두 마을 들을 일깨우는데 사용되었다. 존스 설교의 핵심은 두 가지인데 즉 교인들을 깨우려는 의식적인 시도와 교회일이나 책임을 회피하거나 잘못하는 성도들을 설득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도와 말씀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여, 새로운 설득의 방법들을 구상하곤 했다. 존스가 영향을 끼친 곳들은 Mynydd-bach, Ysbyty Ystwyth, Ystumtuen, Pont-rhyd-y-groes 이다.

1859 웨일즈 부흥의 현상/특징

1859 웨일즈 부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기도의 회복이다. 성령께서는 몰간 목사와 존스 목사의 순회 설교 사역과 기도 모임에 큰 은혜를 부어주셨다. 하지만 동시에 웨일즈 전국에서는 많은 기도모임들이 생겨서 성도들이 기도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도 운동을 인도하고 주관한 사람은 없었다. 사람의 리더십이 드러나기 보다 성령의 역사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 당시 빅토리아 여왕이 웨일즈에 있는 채석장들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채석공들과 여러 직원들은 여왕을 보러가는 것이 아니라 연합 기도모임을 여러 곳에서 가지게 되었다. 어느 공립학교에서는 선생과 학생 모두가 정오까지 계속 기도하는 일도 벌어졌고, 개인과 가정 직장 학교 어디서나 기도회가 열렸다. 모든 기도회에 성령이 임재 하셨으나 특히 연합집회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셨다. 이렇듯 1859년 부흥은 두 목사의 설교 사역과 동시에 기도의 뜨거운 불길이 타올랐다.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모임과 예배 가운데 성도들과 회중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강력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영이 경이롭고 거듭된 축복의 홍수로 성찬예배 가운데 임하였다. 그들은 상당한 감동과 열정을 가지고 즐겁게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끝이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의 영광 앞에 사라진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것이다. 성도들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장엄함과 영광 앞에 항복하였으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되었다.

모든 부흥의 현장을 따르는 특징 중 하나는 물론 영적 생활의 생명력이다. 성도들의 '죽어 있던' 영적 생활과 신앙은 다시금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 또한 1859 웨일즈 부흥의 특징이다. 이 점은 성도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에게도 적용이 된다. 가장 중요한 예로 몰간 목사를 들 수 있다. 그는 신실한 좋은 목회자였지만 그의 설교가 특별히 뛰어나거나 '살아'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흥의 시기 때 그의 친구들은 그를 '불타는 공 (a ball of fire)' 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부흥의 불을 부어주실 때 죽어있고 잠자고 있던 모든 성도들은 살아나며 깨어난다.

1859 웨일즈 부흥의 결과

첫째, 풍성한 회심의 역사이다.

매 주일 그저 교회에 나와서 앉아있던 회중들부터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눈물 흘리며 진심으로 회심하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 또한 상상 할 수 없었던 죄인들과 술주정뱅이들, 부인을 폭행하는 자들, 욕쟁이, 도박꾼,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며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되었다. 웨일즈 부흥 시기였던 1858년부터 1860년 까지 2년 동안에 십 만명의 초신자가 새로 웨일즈 교회로 들어왔다. 카디간 지역에 있는 교파 한 곳에서만 약 8000명이 증가되었다. 카디간 지역에서의 부흥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웨일즈 전체가 부흥의 땅이 되었다.

둘째,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회심자들 때문에 웨일즈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확장공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아버리 스위쓰에서 500개, 폰티드팬디가이드에서 400개, 트래가론에서 400여개, 랑게스튜드에서 약 200여개, 랭드로드에서 약 200여개의 교회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각각 200여명 이상의 회심자들을 받아들였다.

셋째, 부흥은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범죄의 숫자는 웨일즈에서 크게 줄어들었다. 매우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 웨일즈에서는 주일날 술집(pub)이 영업을 할 수 없다는 법이 통과 되기도 하였다. 어떤 한 할머니는 "주일에는 새 하늘을 경험하고 평일에는 새 땅을 경험하고 있다'라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1859년 웨일즈 부흥의 부작용

1859 웨일즈 부흥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부흥들과 공통점들이 많다. 기도의 능력과 영적생활의 회복을 꼽을 수가 있다. 하지만 그전 부흥들과는 달리 1859 웨일즈 부흥에는 '불순물'들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찰스 피니의 부흥론' 때문이다. 미국에 있는 동안 존스 목사는 찰스 피니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방법들을 웨일즈에서 그대로 사용하였다. 찰스 피니는 원죄와 인간의 전적인 타락성을 부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 아니며 부흥 또한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이 아니라고 믿었다.

찰스 피니는 어떤 방법과 수단들을 사용하여 환경을 잘 조성하면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선택하고 결단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피니의 부흥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다. 신적인 요소보다는 인간적인 요소가 많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도, 그것에 반응하는 것은,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이고 권위다. 교회를 깨우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지만, 새로운 효과적인 방법들도 항상 필요하다고 말한다. 1859 웨일즈 부흥과 그전 부흥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교리와 성경의 진리들이 분명하고 올바르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험프리 존스 목사는 또한 늘 설교 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정하고 원하는 사람들은 강단으로 나오라'는 콜링을 하였으며 앞으로 나온 사람들의 숫자를 늘 기록하고 그들을 모두 거듭난 자로 간주하였다. 지난달에 살펴보았던 맥체인 목사는 '거듭난 성도들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야 할 특징은 거룩함이다' 라고 말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특별히 이 거룩함의 시작은 거듭남이며 이때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성도에게 새로운 마음,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 하지만 찰스 피니와 험프리 존스는 어떤 외적인, 형식적인 거룩함만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율법주의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많았다. 물론 존스나 피니를 통하여 거듭난 자들도 매우 많지만 그들은 올바르지 못한 교리와 가르침 가운데 신앙의 깊은 성숙을 이루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감정주의가 1859 웨일즈 부흥의 또 다른 부작용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 물론 이전 부흥들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매우 감정적으로 변하는 것을 살펴 볼 수 있지만 이전 부흥들을 '인도' 할 주역들은 감정주의의 위험을 인식하고 늘 넘치는 감정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하였다. 1859 웨일즈 부흥은 감정 그 자체를 부흥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갑자기 기뻐하고 노래 부르고 뛰기 시작해서 설교 시작을 방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자체를 부흥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존스의 가르침에 칼빈주의 감리교 출신이었던 몰간 목사는 반신반의하였지만 존스 목사의 열정 그리고 자신이 존스의 설교를 통하여 마음의 찔림을 받았다는 이유로 존스와 사역을 같이하게 된다.

데이비드 몰간과 험프리 존스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1859년에 데이비드 몰간과 험프리 존스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 졌다.

존스는 미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하며 편안하게, 성공적으로 목회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눈이 멀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웨일즈로 돌아왔다. 성경말씀을 해석하는데 조금 부족한 부분들이 있었더라도, 그의 열정과 진정성은 의심할 수 없다. 그는 진심으로 설교를 했고, 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는 간절했다. 몰간의 설교 사역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다. 변화된 사람들은 사회에도 영향을 끼치고 전 웨일즈가 바뀌면서 몰간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몰간의 경험과 목회에서는 배울 것이 아직도 많고 지금도 유효하다. 데이비드 몰간은 1859년 웨일즈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부흥 전도자이다.

둘째, 1859 웨일즈 부흥에는 '인간 중심적인' 요소들이 있었다.

이것은 1904년 부흥에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교훈이 되는 것은 어떤 지도자가 '성공'을 이끌어내고 그의 영성이 뛰어나 보여도 성경에 비추어 보아 그의 신학과 방법론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부흥은 우리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말씀에 확인해보아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부작용 속에서도 1859 웨일즈 부흥은 이전 부흥들의 현상과 비슷한 점이 많으며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의 기도 가운데, 그들의 삶 가운데, 그들의 예배 가운데, 그들의 설교 가운데 분명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셨다. 오늘날에도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며 성경에 깊이 뿌리 내린 올바른 교리들 또한 함께 필요한 시대이다.

또 다른 부흥을 소망하며

웨일즈 부흥의 움직임은 딱 한 사람과 함께 시작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평범한 목회자몰간이나 존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능한 역사를 웨일즈 교회 속에 보내셨다. 지금 우리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신실한 한 사람의 목회자요 설교자이다. 그 한 사람을 통해서 황무한 유럽 땅에 하나님의 성령이 물붓듯 다시 부어지고, 조국교회에 부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부흥이다. 우리는 이러한 부흥을 추구해야 한다. 1859년 영광스러운 부흥이 일어났던 웨일즈가 이제는 선교지가 되어 가고 있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웨일즈에 다시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데이비드 몰간과 같은 능력있는 설교자를 통하여 조국교회와 유럽교회와 더 나아가 온 열방에 놀라운 부흥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김현배 목사는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영국에서 영국 부흥운동사를 공부했다. 현재 독일 함부르크 한인선교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겸 독일 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을 맡아 유럽 재복음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뉴스파워 유럽 본부장도 맡고 있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3.07.2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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