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 전 재산 판 자금으로 독립운동

“가문 전 재산 판 자금으로 독립운동… 희생·섬김 기독교 신앙이 뿌리였다”
2014.02.25 02:32

           -국민일보 미션라이프(김경택 기자)


우당 이회영 선생의 믿음 &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사진)의 뜻을 기리는 흉상 제막식이 24일 서울 중구 명동11길 서울YWCA 앞에서 열렸다. 명문 양반가 자제인 우당은 형제들과 함께 가문의 전 재산을 처분한 자금으로 만주에서 항일독립투쟁을 한 한말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우당의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비해 그의 기독교 신앙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반상의 차별이 남아있던 시절 우당은 양반이면서도 남대문시장 상인들이 다니던 서울 상동교회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영의정과 병조판서 등을 배출한 집안의 후손이자 이조판서를 지낸 아버지를 두었던 우당이 상동교회에 드나든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상동교회 담임목사는 남대문시장 숯장수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인 전덕기 목사였다.

우당은 1907년 상동교회에서 전 목사와 안창호 윤치호 등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창립했다. 상동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상동청년학원의 학감(교감)도 맡았다.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 출신인 우당과 주시경 이동녕 김구 등은 ‘상동파’로 불리며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우당은 상동청년회 회원 등과 함께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하기도 했다.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권사 직분을 갖고 상동교회에 다닌 우당은 아래로부터의 민족운동을 실천했다”며 “그가 양반이면서도 엘리트 의식을 갖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서민들을 섬기고 민족을 위해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신앙의 영향”이라고 말했다.

우당은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뒤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후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동생 이시영 등 형제 5명과 가족 등 40여명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당시 가문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으며 1911년 6월 서간도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2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그들은 홍범도의 대한의용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에서 중심역할을 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신채호 이을규 이정규 등과 함께 민족운동 내 공산주의 및 파벌주의를 비판하며 무정부주의 운동을 벌였다. 만주에 항일의용군을 결성하는 등 무장투쟁 계획을 추진하던 우당은 일본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 끝에 감옥에서 소천했다. 그의 형제 중 3명도 만주 등지에서 독립투쟁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우당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서울 중구는 지난해 3월 우당기념사업회로부터 제안을 받고 서울YWCA 등과 협의, 1400여만원의 예산을 들여 우당의 옛 집터인 이곳에 흉상을 설치했다. 구 관계자는 “유동인구가 많은 곳인 만큼 그의 독립운동 활동과 사상이 널리 알려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4.02.25 11:39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