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전야

1. 극에 달한 종교개혁 전야 교회 타락

중세 말엽처럼 종교적인 시대는 없었습니다. 종교는 일상이었고 종교는 삶이었고 종교는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랬던 그 시대 교회에 수많은 악폐와 타락이 범람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교황으로부터 가장 말단에 있는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교황은 교회 재정을 유용하고 착복하고 사회적 지위와 정치권력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교황 알렉산더 6세 (1492-1503)는 몇 명의 정부를 거느렸고 알려진 사생아만도 7명에 이르는 참으로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뇌물을 뿌려 1492년 교황 선거에 승리했습니다. 돈 선거가 판을 친 것입니다. 돈으로 성직을 사는 성직 매매가 부끄럽지 않게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는 자질과 도덕성에 의해 판단되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가문의 영향력과 재력, 권력에 의해 임명되는 경우가 비일 비재했습니다. 1451년 사보이공 아마데오 8세는 불과 8살 된 자기 아들을 제네바 시 주교에 임명했습니다. 하위직의 성직자들의 타락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수도원은 이가 득실대는 동성애 소굴이었습니다. 교황과 고위직은 어디에 부를 축적할지 모를 정도로 재산가였지만 이들 말단 신부들의 수입은 미숙한 노동자의 수입보다도 적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중세의 타락은 그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타락 속에서 어떻게 교회가 회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까요? 전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 맥그레이스는 자신의 책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에서 종교개혁 전야의 역사를 잘 진단하고 핵심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습니다. 맥그레이스에 따르면 중세의 타락은 신부와 평신도의 격리, 곧 거리두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이 교회에 있다고 하면서 신부들은 성경해석을 독점했고, 성찬에서 평신도들은 떡만 주고 자신들은 떡과 포도주를 받았습니다. 성찬이 진정으로 평등하게 시행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평신도들은 성경에 무지했고, 교회의 예식이 강화되었으며, 교권은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그 결과 자연히 교권주의가 형성되었습니다. 교권주의 형성은 신부의 권위와 교회 권력화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영적 타락의 어둠 속에서 놀랍게도 그 길을 제시한 것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였습니다. 그는 종교 지도자들이 도덕적으로 타락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 교회의 미래가 성경을 아는 평신도들의 등장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아는 평신도들이 등장할 때 교회가 살아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당시 부패한 교회의 타락상을 목도하면서 그는 성경을 잘 아는 평신도들의 등장을 통한 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담은 책들을 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인쇄술이 등장하여 책의 출간이 용이해졌고 평신도들은 그런 개혁 사상을 접하면서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천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곧 ‘아드 폰테스(ad fontes)라는 라틴어 표어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과 고전을 연구하면서도 당시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안목이 생겼습니다. 자연히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갱신과 개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과연 기독교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초대교회 교부들의 문헌과 신약성경 연구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시대를 뛰어넘어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도전을 주었고, 성경에 대한 안목은 자연히 시대를 읽을 수 있는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당대의 시대상을 읽고 진단하는 표준을 제공해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은 고대 교부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였는가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인문주의자들은 희랍어, 히브리어, 라틴어에 능통한 자들이었습니다. 원어로 성경을 읽어가던 그들은 당시 불가타 성경 번역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성경에서 복음의 본래 정신을 발견하는 안목을 점점 더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불가타 성경은 예를 들어 마태복음 4장 17절을 “참회(고해)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에라스무스와 다른 인문주의자들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해와 회개는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고해하라’로 번역한 것은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번역이었습니다. 불가타 성경은 성경번역을 성경 원문이 말하는 것을 옮기려고 하기보다 천주교의 교리적 틀에 맞추려고 한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에서 자신의 죄 문제를 영적으로,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외쳤고 주님이 외쳤던 회개의 복음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진정한 회개가 오순절 성령강림 때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청중들의 심령을 깊이 파고들었고 그 말씀을 매개로 성령께서 각 심령 안에 역사하셔서 그들의 숨겨진 내면의 죄악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원문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했습니다. 한글성경 번역은 과거부터 우수하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한글성경을 영어성경과 대조하고 불어성경과 독일어 성경과 대조하여 읽어 가다보면 그 의미가 상당히 더 깊고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물며 헬라어 원문과 비교하며 성경본문을 검토하는 것은 해당 구절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너무도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문주의자들의 헬라어 성경번역은 일종의 혁명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Novum Instrumentum omne)이 1516년에 출간되자 목마르게 성경을 찾고 있던 수많은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물론 당시 해박한 헬라어 지식을 갖고 있던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1년 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닙니다. “인문주의자들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없었을 것이다”는 슬로건은 정확한 평가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청중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을 결단케 하며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도록 한국교회 강단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한 존중, 그 말씀의 담대한 선포 없이는 한국교회 갱신과 회복은 요원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아는 평신도들의 등장이 교회의 부패를 개혁시킬 것이라는 기독교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진단은 너무도 정확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1521년 5월 프레드릭 백작의 보호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면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성경번역을 진행해 불과 11주 만에 신약번역을 완성했습니다. 1522년 9월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출간하여 사제들의 손에 들려 있던 성경을 평신도들의 손에 들려주고, 평신도들에게 만인제사상원리를 심어주자 개혁의 불길이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습니다. 신약성경 출간과 만인제사상원리는 평신도들의 눈을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절대적인 표준이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외침과 우리의 진정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뿐이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신부나 평신도 모두가 차별 없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다는 사상은 일종의 혁명이었습니다.

  • 기자명 박용규
  • 입력 2016.12.01 09:56
  • 수정 2020.12.1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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