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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개혁과 부흥 종교개혁에 길을 묻다 4
종교개혁 500주년 전야
2016년 12월 01일 (목) 11:48:33 박용규

 3. 더 나은 개혁을 진행해 나간 개혁자들
지금까지 종교개혁의 긍정적인 측면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만 종교개혁은 중세의 부패를 개혁한 위대한 개혁운동이었지만 결코 후대인들이 평가하는 것처럼 완벽한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개인주의 발흥으로 인한 전체 공동체 의식의 부족을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해석권이 교회에 있다는 중세에 대항하여 성경을 사제의 손에서 평신도의 손으로 옮겼지만 성경해석이 종교개혁 지도자들마다 달랐습니다. 게다가 어느 특정 분야에서는 서로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아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종교개혁자 루터와 쯔빙글리 그리고 급진적 개혁자 토마스 뮌처 모두 견해가 달랐습니다. 개혁자들 중에는 급진적인 개혁자들이 등장하면서 차이는 더욱 심각하게 벌어졌습니다. 분명 루터는 개혁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루터는 교황, 종교회의, 교회의 전통 등 가톨릭 특유의 권위를 배제하며, 목사를 제사장이라는 사제주의, 교계주의, 교회법을 신성시하는 것, 연옥을 믿는 신앙, 미사의 제물 사상, 가톨릭의 성례개념, 세례와 성찬을 제외한 가톨릭의 다른 성례들, 그리고 이차적인 종교적 질서들, 즉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것과 성상 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순례, 예배시의 행렬, 성수, 부적 등을 제거하였으며, 공로 쌓는 일, 수도원, 환상을 보거나 황홀을 추구하는 일, 풍유적인 성경해석 등을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혁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예배를 적극적으로 갱신하지 않았고 미사를 폐지하는 대신 수정하여 보존했으며, 설교와 성찬을 예배의 두 정점으로 삼으면서도 교인들 모두가 성찬식에 참여하 도록 강권하지 않았고, 교회 내에 제단(alter)과 성상과 오르간을 그대로 두고 세례시에 행하는 축귀의 관행도 그대로 실시했습니다. 그는 비록 가톨릭의 고해성사와 의미를 달리했지만 1519년 세례와 성찬과 함께 고해를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급진개혁자 칼쉬타트는 루터의 개혁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사건건 루터와 대립했습니다. 칼쉬타트는 성경을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읽고 예배를 드렸고 떡과 포도주를 과감하게 나누어주었으며 성직자들이 입는 가운을 입지 않고 간소한 옷을 입고 설교했습니다. 그가 볼 때 루터는 타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시각에서 볼 때 루터는 개혁을 시작하고는 정작 개혁이 진행되자 개혁에 제동을 건 인물로 비추어졌습니다.

 

반면 루터는 칼쉬타트와 다른 급진적 개혁자들을 광신자들로 몰아 세웠습니다. 뮌쩌는 사회와 정치 개혁을 명실상부한 개혁의 필수 요소로 이해하고 성경에 비추어 정당한 사회적 행동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이해했지만 루터는 개혁을 주로 사상의 문제로 이해했습니다. 뮌쩌의 사상은 1525년 농민전쟁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종교개혁의 방향을 놓고 루터, 칼쉬타트, 뮌쩌가 의견을 달리 한 것입니다. 급진개혁은 농민전쟁을 부추겼습니다. 1525년 5월 15일 농민들이 프랑켄하우젠의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농민전쟁은 실패로 끝났고, 토마스 뮌쩌는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 해 루터는 에라스무스와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 인문주의자들과도 결별했습니다. 종교개혁은 너무도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루터의 개혁 사상은 쯔빙글리와도 달랐습니다. 쯔빙글리는 사제주의를 반대하고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의식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사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루터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그의 개혁방향은 루터의 종교개혁의 방향과 달랐고 예정론에서도 견해를 달리했습니다. 죄를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았고 국가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국가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과 율법을 적절하게 실행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새롭게 살도록 독려”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중요한 과업”이며, 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 “시민들이 항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상당히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주창한 것입니다. 이런 쯔빙글리의 국가관은 국가가 기독교인들에게 핍박을 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당국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루터의 견해와 달랐습니다.
이 모든 것보다도 쯔빙글리가 루터와 견해가 달랐던 것은 성만찬 해석이었습니다. 쯔빙글리는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기념사건으로 이해한 반면 루터는 공재설로 이해했습니다.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태복음 26장 26절)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떡이 그리스도라고 이해한 반면 쯔빙글리는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떡이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고 이해했습니다. 떡을 직접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말씀인지 서로 견해 차가 생긴 것입니다. 포도주 역시 그리스도의 피인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인지 이해가 달랐습니다. 쯔빙글리는 포도주도 그리스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반면 루터는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로 받아들였습니다. 1524년부터 1529년까지 5년 동안 성찬에 대해서 서로 양보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을 고집하는 바람에 종교개혁은 균열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둘은 긴밀하게 의견을 나누었지만 결국 일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영적인 임재와 향유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렀지만 육체적인 임재와 구두 섭취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습니다.
부처의 노력으로 헤센의 필립 공은 성찬의 다양한 견해를 해결하기 위해 1529년 루터, 멜랑히톤, 요나스, 브렌쯔, 오지안더, 쯔빙글리, 외콜람파디우스, 부처, 헤디오가 참석한 가운데 마르부르크 종교회담을 열었습니다. 회담에서 15개 조항 중 14개 조항에 일치를 보았으나 성찬의 고백을 담은 마지막 조항에서 일치를 보지 못하고 결국 회담이 결렬되어 루터와 쯔빙글리 간에 견해를 좁히려는 부처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루터는 쯔빙글리가 논쟁가로서 뛰어난 능력과 함께 신사로서의 최상의 예의와 관대함을 보여주어 “매우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지만 “끝내 눈물을 흘리며 내미는 쯔빙글리의 교제의 손을 뿌리쳤습니다.” 거대한 종교개혁의 포문을 연 루터가 성만찬 견해에서 양보하지 않음으로 결국 종교개혁운동은 성만찬 갈등으로 통일성이 심각하게 위협받았습니다.
성만찬 견해의 차이가 남긴 상처는 너무도 깊고 컸습니다. 이제 종교개혁 세력이 취해야 할 행동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에 일치한다면 공감대를 형성하며 일치를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루터와 쯔빙글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행위의 최상의 규범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에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모토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라는 말을 쯔빙글리와 루터 모두 “성경적이라는 말은 성경이 명시적으로 말씀하거나 성경이 명시한 이 말씀과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했습니다. 둘 모두 교회의 사상과 생활이 성경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데도 일치했습니다. 둘 다 좋은 점은 그대로 지켜가야 하고 나쁜 점은 개혁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그 접근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쯔빙글리는 신약성경과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 문화로부터 자신의 신학을 이끌어냈고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그의 신학은 신비주의를 배격했으며 명쾌하고 단순하고 경건하고 실천적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이 구원을 위한 유일하고 확실한 길이라고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고 확신했으며, 그리스도가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시고, 성령의 활동과 구원의 은혜가 가시적인 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둘의 사상과 생활은 과거의 유력하고 신뢰할만한 성경해석자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었습니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우월함을 주장한 반면 쯔빙글리는 오리겐의 우월함을 주장했습니다. 쯔빙글리가 헬라교부들에게 지나치게 기울었던 것과 달리 루터는 자신을 어거스틴주의자라고 부를 만큼 어거스틴에 천착했습니다. 결국 둘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각자 스승으로 삼았던 교부 어거스틴과 오리겐의 신학 방법론의 접근이 상당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루터와 쯔빙글리의 상이한 의견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촉구하고 나선 인물이 바로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 마틴 부처였습니다. 부처는 오직 성경만이 신앙의 규범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일치한다면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상은 요한 칼빈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538년 9월 초부터 3년 동안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부처와 동역하는 동안 칼빈은 부처의 교회론과 다른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기간 그는 좀 더 전체적인 시각 속에서 종교개혁운동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필립 샤프는 이렇게 평했습니다.

칼빈이 이 도시에 체류했던 기간은 그의 생애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보람있는 시기였으며 제네바에서의 보다 성공적인 사역을 위한 하나의 훈련기이기도 하였다. 그의 시야는 더욱 넓어지고 깊어졌다. 그는 루터파 교회와 그 지도자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치리가 부족하고 세속 통치자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데 대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목회자, 교수, 저술가로 열심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일하였다.

칼빈은 루터를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루터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는 쯔빙글리보다 루터를 더 존경했으며, 심지어 다음과 같은 고백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가 나를 마귀라고 부르더라도 나는 그가 하나님의 귀한 종임을 시인하며 존경을 표해 마지 않을 것입니다.” 칼빈은 부처의 소개로 1539년 2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신학회의에서 루터의 후계자 멜랑히톤을 만난 후 깊은 교제를 지속했습니다.
훗날 칼빈이 본질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에서는 관용을 외칠 수 있었던 것도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무는 기간에 부처와 루터파들과의 교제를 통해 축척된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신의 기독교 강요 신앙을 현장에 접목하는 일종의 훈련 기간이었고, 피난민 목회를 하면서 그는 자신의 목회자로서의 소양도 더욱 풍부하게 갖출 수 있었습니다. 칼빈이 위대한 종교개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여기 있었습니다.
칼빈은 성경만이 신앙의 규범이라는 대 전제를 받아들이면서도 서로 다른 의견에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실천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칼빈은 루터에게 상당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칼빈 또한 루터파 신학자들로부터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멜랑톤과의 깊은 교류를 나누며 칼빈은 루터파들과도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도 필립 샤프가 지적한 대로 “칼빈은 쯔빙글리의 사역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완성시켜 나갔으며 그 중요성을 더욱 확대시켰습니다.” 성만찬에서도 칼빈은 루터의 견해와 쯔빙글리의 견해를 절충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칼빈은 성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은혜의 방편이며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영으로 임재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칼빈은 성도들이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셔서 그와 연합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단순히 영적인 연합 그 이상이라고 본 것입니다. 쯔빙글리가 성찬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을, 루터가 성찬에서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 속에, 밑에, 그리고 함께 계신다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강조했다면 칼빈은 성찬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면서도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를 주창함으로써 단순히 루터와 쯔빙글리의 절충을 넘어 성찬에 대한 이해를 더 한층 발전시킨 것입니다.
루터나 그의 후계자들이 엄격한 성찬관을 주장한 반면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표준으로 삼는다는 기본 원칙에 충실하다면 관용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루터가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으며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관심을 쏟았고 쯔빙글리가 인간의 죄와 교회 밖의 예정까지 포괄하는 하나님의 작정을 강조했다면 칼빈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높이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루터와 쯔빙글리가 “채석장에서 돌을 잘랐다면” 칼빈은 그 돌들을 작업장에서 갈고 닦아 작품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루터와 쯔빙글리가 “새로운 사상을 양산해 냈다면 칼빈은 그것을 체계화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칼빈은 루터를 존경하고 쯔빙글리의 전통을 중시하며 종교개혁의 이상을 하나의 거대한 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갔습니다. 후대에 칼빈을 칼로 베는 사람처럼 전혀 융통성이 없는 타협하지 않는 원칙론자로 범주화시키는 것은 칼빈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아니었습니다. 칼빈이 성경을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철저하게 삼았다는 사실은 그가 출간한 1536년 5월 기독교 강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가 1529년에 나온 루터의 요리문답과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교회의 바벨론 유수와 같은 루터의 저술을 인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개혁파의 기본 요소들을 명료하고 체계적이며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위한 권위 있는 지침서로 제시하려고 한 점입니다.
“내가 이 책을 쓴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자 거룩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준비시키고 훈련시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다가가고 어려움 없이 그 말씀 안에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기독교 강요를 읽는 자들은 이 책이 성경에 견고한 토대를 두고 기독교 중심 가르침들을 논리적으로 변호하면서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어거스틴이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제시함으로 독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변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그런 생각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라틴어 판(1536)에 이어 이 책을 불어로 번역하여 출간(1541)하고 이어 네덜란드어판(1560), 영어판(1561), 독일어판(1572), 에스파냐어판(1597)이 이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1530년대 이후 루터파의 개혁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1530년 멜랑히톤이 작성하고 개신교 제후들이 서명한 루터파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1531년 2월 결성된 슈말칼덴(Schumalkalden) 동맹, 그리고 이어 작성된 슈말칼덴 신조는 루터파의 큰 수확이었습니다. 루터파는 1530년대, 황제가 10년 동안 터키 및 프랑스와의 전쟁에 휘말려 국내 문제에 관여할 수 없는 동안 개신교 교세를 정비하고 신앙고백을 비롯한 교리적 틀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신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역사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것은 1537년부터 1555년까지 독일 내에서 진행된 종교개혁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1537년 황제 카를 5세의 요청에 따라서 교황 바울 3세가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화해를 위해서 그해 5월 이태리의 만투아에서 열 예정이던 교회공의회가 무산되고, 루터가 1546년 2월 18일 세상을 떠나는 등 여러 환경들이 개신교에 불리한 쪽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게다가 1546- 1547년에 일어난 슈말칼덴 전쟁에서 개신교가 가톨릭에 대패했습니다. 그러나 한때 황제에게 충성했던 작센의 모리츠와 몇몇 제후들이 황제에 반기를 들면서 개신교를 반대하려는 황제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1555년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의 신앙을 인정하는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가 맺어졌습니다. 영주는 신앙을 선택할 자유를 가질 수 있고 대신 그 영지 내의 모든 주민들은 영주의 신앙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만약 영주를 따르지 않을 경우 영지를 떠날 자유도 명시하였습니다.
칼빈의 제네바는 곧 “개혁주의(개혁파) 세계의 중심지로 등장”합니다. 최초의 개혁자 쯔빙글리와 그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 때문에 취리히가 한 때 그 중심이었다가 베른이 그리고 1550년대에 이르러 제네바가 개혁주의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개혁파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을 개혁하는데” 전념했음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다른 한편으로 루터주의와 제네바 개혁을 구별하려는 목적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칼빈주의라는 말의 등장은 개혁파운동에 미친 칼빈의 영향력 때문에 생겨났지만 개혁파라는 말이 학자들의 세계에서 더욱 더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맥그레이스에 따르면 칼빈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칼빈의 반대자들이 개혁파가 독일 밖에서 유래한 것임을 강조하고자 개혁파를 가리키는 말로 칼빈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면서였습니다. 칼빈주의라는 말은 1552년 경 루터파 진영의 신학 논쟁가인 요아힘 베스트팔(Joachim Westpahl)이 널리 스위스 개혁자들, 그중에서 특히 칼빈의 신학적 견해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성례와 관련된 견해를 가리키는 말로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칼빈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한 이후 이 용어는 루터파 교회 내에서 급속도로 저변 확대되었습니다.
칼빈의 개혁파 사상은 한편으로 프랑스 본토에서, 존 낙스를 통해 스코틀랜드에서 그리고 에스파냐 령이었던 네덜란드에서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존 낙스에 의해 스코틀랜드에서 공격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1545년 종교개혁의 대의를 받아들인 낙스는 제네바에서 돌아온 후 바로 1559년 칼빈의 개혁파 사상에 기초하여 제 1치리서(First Book of Discipline)를 만들었습니다. 거의 동시대에 네덜란드에서 칼빈주의가 꽃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신앙고백이 작성된 것도 바로 그 즈음이었습니다.
루터주의와 칼빈주의는 두 가지 교리에서 선명하게 구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예정교리와 성만찬 교리였습니다. 루터가 공재설을 주장한 반면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주장했습니다. 칼빈은 자신의 입장이 분명했지만 성만찬 교리로 종교개혁자들이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본질에서는 일치를 비 본질에서는 다른 입장과 견해를 관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이 모든 신앙과 신학과 삶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일치한다면 그 외에는 다양한 견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성경에 기초하여 자신의 신학을 집대성하여 나갔지만 성경해석상의 차이를 인정하고 종교개혁 시대 교리로 인해 사분오열된 것을 제일 안타깝게 고민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에서 그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웨스터민스터의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에게 보낸 편지에서 칼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교회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들 간에는 현세적이거나 인간적인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습니다. 신자들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찢겨 있다면 그 몸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저에게 큰 관심거리이므로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리고 필요한 일로 여겨진다면 저는 이 일로 인해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너기에 인색치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목적이 모든 선한 지도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합하는 것이므로 성경의 법칙에 따라 분리된 교회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나 수고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칼빈은 신학적 입장이 분명했지만 전체 종교개혁의 거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운동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연합하고 협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필립 샤프의 지적대로 그는 어떤 분열주의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칼빈을 본 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강조하고 성경적인 기독교를 주장하다보면 그 교리를 이데올로기로 삼고 다른 의견들을 정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요한 칼빈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근본적인 문제에서 일치한다면 지엽적인 의견 차이는 관용해야 한다는 부처의 입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틴 루터의 후계자 멜랑톤과의 관계입니다. 그는 루터의 후계자였던 멜랑톤과 깊은 유대관계를 가졌고 심지어 멜랑톤의 책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멜랑톤은 자신의 스승 루터보다 칼빈을 더욱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칼빈을 가리켜 종교개혁의 대표적 ‘신학자’(the theologian)란 말을 붙였습니다. 칼빈은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확고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비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관용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루터 역시 사익보다 늘 공익을 우선했고, 복음의 대 사회-문화적 변혁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성만찬 문제에서는 타협하지 않았지만 문화와 예술에 대한 상당한 식견과 안목을 갖추고 사회 문화 전반의 개혁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루터만큼 시와 음악과 회화와 모든 순수 예술을 사랑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게다가 루터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팔아 돈을 벌기를 거부했습니다. 만약 그가 인세를 챙겼다면 독일어 성경 인쇄만으로도 거액을 벌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루터를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은 루터가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만 드러내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루터의 추종자들이 루터파로 불리기를 원했지만 정작 루터는 이를 강하게 말렸습니다.

제발 당부하건대 내 이름을 그냥 놔두시오. 여러분들을 루터파라고 부르지 말고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르시오. 루터가 누구입니까? 나의 교리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느 누구 한 사람을 위해서도 십자가게 못 박히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자신들을 바울파 혹은 베드로파라 하고 부르는 것을 원치 않고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럴진대 하물며 나 같이 먼지와 재에 덮인 누추한 자루 같은 나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자녀들에게 붙이는 것이 가당키라도 한 일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더 이상 파벌의 이름에 집착하지 말고 그런 이름들은 모두 없애 버리십시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우리의 교리의 근원이신 분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릅시다. 교황파가 자신들의 파벌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교훈으로 만족하지 않고 교황파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그냥 교황을 자기들의 주인으로 섬기도록 내버려둡시다. 다만 나는 누구의 주인도 아니고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나는 유일한 주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단으로 만족합니다.

루터 역시 그리스도의 주권을 높이며 연합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파벌과 교파가 형성되는 것을 얼마나 우려했는지를 그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칼빈이 강조하고 루터도 동의한 바이지만 개혁자들은 만약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에 일치한다면 서로 관용하고 이해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다양한 개신교 교단이 역사에 등장했지만 그것이 교파의 분열이라고 단죄해서는 안됩니다. 그 다양한 개신교 교단의 등장은 로마 가톨릭이 비판하는 것처럼 개신교가 분열의 종교가 아니라 다양성 속의 통일성, 통일성 속의 다양성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다양한 교파가 프로테스탄트의 신앙, 곧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절대적 규범이라는 성경의 우위성,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론,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이 사제를 통하지 않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로 직접 나갈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원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런 가운데 각 교단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적 기독교를 구현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개신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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