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예비해 두셨던 일꾼, 이 땅의 밀알이 되다

▲ 아펜젤러의 프랭클린마샬대학 졸업 사진.

미국 정치 문화 문학의 프론티어 광장
미국 민주주의 요람 프랭클린 마샬대학,
아펜젤러가 그 이상을 한국에 심다.

 

걸출한 영성의 거장들의 발자취는 남달랐다. 때로는 도전으로 때로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알렌을 추적할 때도 그랬고 언더우드를 추적할 때도 그랬다. 한국 감리교의 아버지 아펜젤러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복음에 불타는 열정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부터 남다른 준비가 있었다. 아펜젤러의 행적을 추척하며 얻은 감동은 참으로 대단했다. 자료를 통해서 접했던 그를 다시 그가 지나간 발자취를 추적하며 현장에서 직접 체험적으로 만난 것은 너무도 큰 축복이었다. 아펜젤러의 전반적인 비전은 이미 대학 때 형성되었다. 부모의 뜻에 따라 선택한 대학이었지만 프랭크린 마샬대학은 아펜젤러의 지성과 이성과 감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필자가 그 대학 고문서실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는 모든 졸업생들의 졸업사진은 물론 인적사항 활동내역 그리고 심지어 신체 사이즈와 정치 성향까지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겨져 있었다.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대학생활은 그의 인격형성과 사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국내외의 절대 다수의 학자들이 아펜젤러의 대학시절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데 실패했다.

 

1. 괴테 문학회 회장으로 탁월한 리더십 발휘

프랭클린 마샬대학에는 가장 유서 깊은 2개의 문학회가 있다. 하나는 디오그노티안(Diognothian)이고 다른 하나는 괴티안(Geothean)이다. 이 둘의 이름으로 대학 건물도 세워졌다. 두 건물은 1975년 미국 문화재 건물로도 등록되었다. 괴테 문학회는 이 대학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학회로 오늘날의 대학 서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긍심이 대단했다. 회원자격도 엄격했다. 32명과 함께 대학에 입학한 아펜젤러는 바로 괴테 문학회에 가입했다. 독일어에 남달리 조예가 깊었던 아펜젤러에게 괴테문학회는 적격이었다. 3학년과 4학년 2년 동안 그는 괴테문학회 회장으로 그 학교 재학생 반수가 가입한 학회를 이끌며 학회 정기총회 때 사회를 보았다.

1882년 6월 졸업식 때 가진 괴테문학회 홈 커밍데이에서는 발전 보고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난해 발전 상황을 보고해 채택되었다. 당시 모든 학생들이 졸업연설을 했는데 아펜젤러는 “연설자 데모스데네스”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는 고대 헬라철학자 디모스트헤네스를 통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깊은 관심은 훗날 선교지 한국에서 학교 설립, 성경번역, 문서선교, 저널 출간을 태동시킨 중요한 동력이었다. 그가 중심이 되어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와 1890년 셩교셔회가 발족되었고, 죠션 그리스도인 회보와 영문잡지 코리아 리파지토리가 창간되었다. 아펜젤러는 평생 일기를 썼고, 설교문을 작성하고, 자신이 보낸 편지나 자기에게 온 편지 사본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일기와 설교 원고가 뉴욕 유니온 신학교 도서관에 잘 보관되었다. 이 같은 기록이 있기 때문에 세월이 가도 여전히 학자들은 그에게 깊은 매력을 느낀다.

 

▲ 아펜젤러를 한국에 파송한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

 

2. 열린 민주주의 논의의 장

펜실바니아는 미국 민주주의 요람이다. 미국 민주주의가 근대적인 형태의 옷을 입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곳이다. 아펜젤러의 졸업 동료 23명 가운데 3명을 제외하곤 펜실바니아 출신이었다. 게다가 랑케스타는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가 지적한 것처럼 식민지, 혁명, 노예폐지, 그리고 시민전쟁에 가장 강력한 영감을 불어넣어준 지역이고, 그런 영웅들이 배출된 곳이었다.

펜실바니아 랑카스터에 위치한 프랭클린 마샬대학은 1787년에 설립된 프랭클린 대학과 1836년에 설립된 마샬대학이 1853년 합쳐져 만들어졌다. ‘빛과 법’("Lux et Lex)이 교훈이다. 미국 민주주의 발전에 신화적 존재 같은 프랭클린과 마샬은 이곳에서는 상징적 존재다. ‘후회없는 인생’을 저술하고 정치이론, 정치, 인쇄기술, 다초점 렌즈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프랭클린의 영향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지대하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독일계 이민자들은 미국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미국 정치와 사회 민주주의 발전에 주변적 존재들이 아니라 주역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이민사회를 형성했다. 필라델피아 랑카스터는 지금도 미국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잘 보존하고 있다.


아펜젤러의 졸업생 동료 23명의 정치 성향은 분명했다. 이들은 각자가 자신의 정치 성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것은 학교의 전통이었다. 당시 아펜젤러 졸업 동료 23명 가운데 공화당이 12명이었고 민주당이 11명이었다. 미국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 발전을 위해 자신들이 무언가 일익을 감당하겠다는 자의식을 이들처럼 분명히 가진 존재들도 드물었다. 장래의 목표도 각자 분명했다. 23명의 졸업생 가운데 9명이 신학을 지망했고 6명이 법을 4명이 의학을 3명이 저널리즘을 그리고 1명이 교사를 지망했다.

아펜젤러는 대학에서 프랭클린 마샬로부터 내려온 미국 민주주의 발전을 피부로 체험하고, 3살 때 일어난 남북전쟁과 노예제도 폐지, 그리고 이후 진행된 미국 민주주의 발전을 온 몸으로 체험했다. 때문에 일제의 신민 정책에 침묵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에 선교사로 부임한 후 그저 선교사로서 복음만 전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배재학당 설립은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자, 민족운동 지도자들을 양성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춘생문 사건에 개입하고, 고종황제를 위한 구국기도회를 주도하며, 코리아 리파지토리를 통해 일본의 한국 침략 정책에 대한 비판도 서슴치 않았다. 확실히 아펜젤러는 한국의 복음화만 아니라 민주화와 근대화를 자신의 선교 비전으로 삼고 실천했다.

 

▲ 아펜젤러가 졸업한 뉴저지 드루신학교로 아펜젤러 흉상이 건물 측면에 세워져 있다(위쪽). 아펜젤러가 다녔던 프랭클린마샬대학으로 당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아래쪽).

 

3. 다양성이 혈맥처럼 파도치는 곳

재학생들은 정치성향이 서로 달랐다. 누구는 공화당을 지지하는가 하면 누구는 민주당을 지지했다. 공화당의 장점과 문제점, 민주당의 장점과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때문에 서로는 서로를 존중했다. 괴테 문학회에 참여하는 자들은 괴테를 찬양하면서도 디아그노티안의 문학 전통도 존중하고 서로를 통해서 마음을 열고 배웠다. 졸업생들의 장래 지망도 9명이 신학을 지망했지만 법학 지망과 의사지망 그리고 저널리즘을 지망하는 다양한 젊은이들이 함께 공존하며 거룩한 꿈을 꾸었다.

아펜젤러가 20살에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곳에 신입생 동료 가운데 13살 짜리가 있었고, 자기보다 3살이 많은 27살의 형도 있었다. 나이가 작은 동료와 나이 많은 동료의 나이 차이가 10살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연령을 초월하여 함께 대학의 낭만을 만끽하는 것을 배웠다. 교파도 다양했다. 물론 대부분이 독일개혁교단이었지만 감리교, 장로교, 루터파도 있었다. 키도 몸무게도 서로 달랐다. 졸업당시 아펜젤러는 5피트 10인치의 키에 146파운드의 몸무게를 지닌 24살의 젊은이였다. 졸업 때 졸업생의 평균 나이가 21살 9개월이었음을 감안할 때 다소 나이가 많았다. 아펜젤러는 대학에서 교파의 다양성, 정치 성향의 다양성, 연령의 다양성, 지역 출신의 다양성, 신체 조건의 다양성을 몸으로 배우며 “다름”을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 아펜젤러의 사역과 순교,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를 기록한 미국 신문 기사(왼쪽)와 광무 2년인 1898년 아펜젤러가 조선 정부와 주고받은 서신(오른쪽).

 

4. 한국, 일본, 중국 개척선교사 배출

1882년 프랭클린 마샬대학은 아펜젤러 외에 또 한명의 아시아 개척 선교사를 배출했다. 일본선교와 중국 선교를 개척한 윌리엄 에드윈 호이(William Edwin Hoy)가 그들이다.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가 한국선교사를 개척한 주역이었다면 그의 대학 동료 호이는 일본과 중국 선교를 개척한 주역이었다. 윌리엄 호이는 아펜젤러와 같이 1882년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졸업하고 이어 1885년 랑카스터 신학교를 마친 후 바로 독일개혁교단의 일본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일본 북부 센다이에 宮城学院女子大学(Miyagi Gakuin Women's University)과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고 저팬 이반젤리스트(The Japan Evangelist)를 발간하는 등 활발하게 선교했다. 1900년부터는 중국 호난성에 선교지를 옮기고 192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복음전도, 학교설립, 병원 설립을 비롯한 중국에서의 그의 사역은 한 마디로 경이적이었다. 아펜젤러와 호이는 학교설립, 복음전도, 병원설립, 민주화와 근대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저명한 일본의 개척선교사 데이빗 보우맨 쉬네더(David Bowman Schneder, 1887-1938)도 아펜젤러의 프랭클린 마샬대학 3년 선배이다. 쉬네더는 1883년에 일본에 파송을 받고 1936년까지 일본에서 대학교육, 신학교육,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 수립 지원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랑카스터의 프랭클린 마샬대학은 1882년 아시아 선교를 빛낸 세 명의 아시아 선교의 아버지를 배출한 셈이다.

5. 틀리게 사용되고 있는 아펜젤러 이름

아펜젤러의 정확한 이름은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다. 미들 네임은 보통 어머니쪽의 성을 물려받는 것이 보통이다. 아펜젤러의 역시 어머니 마리아 게르하르트(Maria Gerhart)의 성을 자신의 미들 네임으로 물려받았다. 따라서 그의 미들 네임은 게르하르트(Gerhart)다. 그런데 놀랍게도 너무도 오랫동안 아펜젤러의 미들 네임이 게르하르드(Gerhard)로 잘못 사용되어 왔다. 오늘날 그의 미들 네임이 Gerhart가 아니라 Gerhard로 통용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필자는 아펜젤러의 미들 네임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아펜젤러의 아버지와 어머니 계보를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아펜젤러의 어머니는 마리아 게르하트트(Maria Gerhart, 1820-1898)고 아버지는 기드온 게르하르트(Gideon Appenzeller, 1823-1901)였다. 아펜젤러는 위 아래로 한 명씩 두 명의 형제가 있었다. 위의 형은 제이곱(Jacob Gerhart Appenzeller, 1856 – 1920)이었고, 아래는 밀톤(Milton Gerhart Appenzeller, 1860 – 1918)이었다. 다른 두 형제도 어머니의 성을 미들 네임으로 물려받았다.(https:// findagrave.com/cgi-bin/fg.cgi?page=gr&GRid= 107986836)


아펜젤러의 어머니 마리아 게르하르트는 필립 게르하르트(Phillip Hertzel Gerhart, 1799-1852)와 세라 보이어(Sarah Boyer Gerhart, 1801-1874) 사이에 첫째 딸로 태어났다. 마리아 게르하르트에게는 여섯 명의 동생들이 있었으며, 막내와는 20살이 차이가 있었다.(https://findagrave.com/cgi-bin/ fg.cgi? page=gr&GRid=19111963) 외할아버지 필립 게르하르트(Phillip Hertzel Gerhart)의 아버지 곧 아펜젤러의 증조 외 할아버지는 요하네스 게르하르트(Johannes Gerhart, 1755–1829)고 증조 외할머니는 마리아 하르첼(Maria Magdalena Hartzel Gerhart, 1758 – 1846)이었다. 요하네스 게르하르트는 펜실바니아 몽고베리 카운티에서 1755년 8월 15일에 태어나 1829년 8월 25일 몽고메리 카운티에서 세상을 떠났다.(https://findagrave.com/cgi-bin/fg.cgi?page=gr&GRid=19116151)


요하네스 게르하르트의 부친, 곧 아펜젤러의 외 고조할아버지는 존 게르하르트(Johann Peter Gerhart, 1716–1766)였고, 외 고조할머니는 엘리자벳 슈미트(Elisabeth Schmidt Gerhart, 1723– 1805)였다. 외 고조 할아버지는 1716년 독일에서 태어나 1766년 12월 30일 펜실바니아 몽고메리 카운티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펜젤러의 어머니 마리아 게르하르트의 조상은 미국에 1차 대각성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730-40년 전후를 해서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것이다. 선조들이 독일개혁교회 묘지에 묻힌 것을 보면 독일개혁교회 신앙 전통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아펜젤러 할아버지 제이콥 아펜젤러(1783-1863)와 할머니 수잔나 아펜젤러(Susanna Appenzeller (1786 – 1863)는 록힐 메노나이트 교회 묘지에 묻혀 있다. 메노나이트 신앙을 가진 것이다. 개혁교회와 메노나이트는 아펜젤러의 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필자는 아펜젤러 미들 네임의 정확한 확인을 위해 아펜젤러 어머니 마리아 게르하르트 형제 계보를 추적해 보았다. 그녀의 막내 동생 요한 게르하르트(John A Gerhart (1840 – 1912) 사망진단서에도 게르하르드가 아니라 게르하르트로 정확히 기록되었다.(https://findagrave.com/cgi-bin/fg.cgi? page=pv&GRid =43515227&PIpi=144454810)
요한 게르하르트의 아들, 아펜젤러의 어머니의 조카 헨리 게르하르트(Henry J. Gerhart, 1871-1933) 역시 사망진단서에 게르하르트로 기록되었다.(https://findagrave.com/cgi-bin/fg.cgi?page=pv&GRid=43515226&PIpi=144455728)


아펜젤러의 어머니는 마리아 게르하르트(Maria Gerhart)의 성을 자신의 미들 네임으로 받아 그의 미들 네임은 Gerhard가 아니라 Gerhart다. 그런데도 아펜젤러가 졸업한 드루신학교와 아펜젤러 자료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뉴욕 유니온신학교 고문서실은 물론 거의 모든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아펜젤러 의 미들 네님을 Gerhard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필자는 프랭클린 마샬 대학과 드루 신학교의 졸업관련 자료를 통해서도 아펜젤러의 미들 네임이 게르하르트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곳에 남아 있는 아펜젤러의 모든 당시 문헌은 모두가 그의 미들 네임을 게르하르드가 아니라 게르하르트로 기록했다.

[1] Catalog of Franklin & Marshall College 1882 (1)
[2] Catalog of Franklin & Marshall College 1882 (2)
[3] Catalog of Drew Theological Seminary 1885

아펜젤러의 대학과 신학교 졸업관련 3개의 위 역사 사료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듯이 아펜젤러의 미들 네임은 게르하르트(Henry Gerhart Appenzeller)이다. 당시 독일계 이민자들 가운데 게르하르트라는 성을 가진 이들이 꽤 많았고, 당시 프랭클린 마샬대학 기록을 통해서도 게르하르트라는 성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1882년 6월 아펜젤러가 프랭크린 마샬대학을 졸업할 당시 그 대학 실천 및 조직신학교수가 게르하르트(E. V. Gerhart)였고, 바로 그 졸업식에 참석한 방문객 가운데 게르하르트 성을 가진 사람 세 명(C. S. Gerhart, Leighton Gerhart, D. W. Gerhart)이나 있었다.


언제부터 이와 같은 미들 네임이 게르하르트가 아니라 게르하르드로 기록되기 시작했는지 관심을 가지고 추적해 봤다. 아펜젤러의 미들 네임이 Gerhart가 아니라 Gerhard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둘 모두 개인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어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놀랍게도 그런 실수를 제일 먼저 한 사람은 아펜젤러 전기를 출간한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였다. 그리피스는 아펜젤러에 대한 자신의 책에서 둘을 혼용해서 사용했다.


아펜젤러 사진 밑에는 정확히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라고 쓰고는 정작 본문(p.56, 60)에서는 헨리 게르하르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라고 썼다. 그리피스는 아펜젤러의 어머니 마리아 게르하르트(Maria Gerhart) 이름도 마리아 게르하르드(Maria Gerhard)로 오기했다(p.60-61). 그러면서도 88쪽에서는 아펜젤러의 어머니를 Maria Gerhart로 정확히 기록했다. 결국 그리피스는 아펜젤러의 미들 네임으로 Gerhart와 Gerhard를 혼용해서 사용했고 아펜젤러의 어머니의 이름도 마리아 게르하르드와 마리아 게르하르트를 혼용해서 썼다. 이것이 출판사의 실수인지 저자의 실수인지 잘 모르겠지만 여러 곳에서 오기가 나타난 것으로 볼 때 저자의 실수로 보인다.


그리피스의 아펜젤러 전기가 출간된 후 후대 학자들과 언론들은 그리피스의 책을 인용하여 전혀 의심을 하지 않고 게르하르트가 아닌 게르하르드로 아펜젤러의 미들 네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그 이전에는 아펜젤러의 미들 네임이 게르하르트로 정확히 기록되었다. 1911년 이전에는 어떤 아펜젤러 관련 기록도 게르하르드로 아펜젤러의 미들 네임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한 인물의 이름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여권에 있는 이름 그대로가 아니면 철자 하나 틀려도 비행기에 탑승할 수 없다. 게르하드트와 게르하르드는 다르다. 이름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은 역사 기록의 첫 단추와 같고 한 개인에 대한 진심어린 존중의 출발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아펜젤러의 미들 네임을 바르게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양화진에는 그의 이름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어 다행이다.

 

맺는 말

프랭클린 마샬대학에서 받은 고전어와 고전문학에 대한 사랑, 자유의 정신,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중요성의 인식,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의 함양은 한국에서의 아펜젤러의 선교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 선교 내내 여느 선교사보다도 더 한국기독교에 민주주의, 근대화, 문화 정신을 불어 넣어 주려고 했던 인물이 아펜젤러였다. 그가 신학을 하겠다는 자의식을 가진 것도, 선교사로서의 비전을 가슴에 품기 시작한 것도 대학에서부터였다.

프랭클린 마샬대학은 아펜젤러 외에 2명의 걸출한 아시아 선교사를 배출했다. 아펜젤러의 동료 호이는 일본으로, 3년 선배 슈나이더는 일본 선교의 아버지로 통할 정도로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 민주주의의 요람 펜실바니아 그것도 그 중심인 랑카스터 프랭클린 마샬대학의 빛과 법의 정신,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깊은 사랑을 통한 한국의 민주화와 근대화 그리고 기독교 이상에 기초한 민족운동을 선교지 한국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인물이 바로 아펜젤러였다. 우리는 그에 걸 맞는 자리를 그에게 제공해야 할 것이다. 그 출발은 그의 이름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야 한다.(*)

  • 기자명 박용규 교수
  • 입력 2017.02.2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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