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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의 거두 서광범의 성경번역(요 3: 16) 원고 발굴의 역사적 의의
서광범이 번역한 성경 친필원고
2017년 02월 23일 (목) 11:27:15 박용규 교수
   
 
  ▲ 서광범  
 

개화파의 거두 서광범의 성경번역(요 3: 16) 원고 발굴의 역사적 의의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역사신학)


서광범은 언더우드가 출생하던 1859(철종 10년)년 11월 8일에 태어나 1897년(광무 1년) 8월 14일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서광범은 비록 짧은 생애를 살다갔지만 조선의 개화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조선 왕조의 고위 관료를 지냈다. 영의정 용보(龍輔)가 증조부였고, 이조참판을 지낸 상익(相翊)이 부친이었다. 1880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서광범은 개화사상가 유대치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광범은 1879년부터 김옥균 박영효와 함께 개화정치세력을 형성하고 국내에서 개화사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과 더불어 개화파의 거두로 활동했으며 개화파 중에서도 상당히 급진적일만큼 개화사상에 깊숙이 물들었다. 그와 박영효는 기독교를 도입하려한다는 의혹을 받고 한 때 대원군으로부터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서광범의 개화 사상은 임오군란 이후 일본을 방문해 일본의 개화사상과 일본에 소개된 서구문물을 접하고 더 한층 강화되었다.

1882년 9월 임오군란이 발생한 후 배상금 청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신사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서광범은 김옥균과 함께 일본에서 개화사상을 접하고 1883년 3월에 귀국했다. 같은 해 6월 전권대사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보빙사(報聘使) 일행이 사절로 미국에 파송될 때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보빙사 일행에 합류했다. 이들 보빙사 일행은 일본에 들려 요코하마에서 주 일본주재 미국공사의 신임장을 받아가지고 22일 동안 태평양을 항해를 한후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서광범은 보빙사 일행으로 1883년 6월부터 이듬해 6월 귀국할 때까지 거의 1년 동안 미국과 유럽을 순회하며 당시의 국제 동향과 흐름을 배울 수 있었다. 1884년 12월 4일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엎고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구데타 갑신정변이 실패 한후 서광범은 박영효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는 개화파 중에서 기독교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했던 인물이다. 본고에서는 서광범의 기독교와의 접촉을 중심으로 그가 남긴 요한복음 3장 16절 성경번역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언더우드와 서광범의 만남(1885년 2월-1885년 4월)

갑신정변 실패 후 퇴각하는 일본군 틈에 끼어 1884년 12월 일본으로 망명한 서광범은 박영효 서재필과 함께 1885년 5월 미국으로 망명을 떠날 때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이들 일행이 일본에 머물던 1885년 2월 언더우드 선교사가 일본에 도착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2개월을 일본에 머물며 한국선교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은 언더우드, 스크랜튼, 루미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그들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이미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언어적 재능이 뛰어난 서광범은 보빙사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어느 정도 기본 영어를 습득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언더우드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그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어느 정도 의사 소통을 하며 교분을 쌓아간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사교적이었던 서광범은 언더우드와의 교분을 통해 매우 친밀해졌다. 언더우드는 그해 5월 서광범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날 때 그를 자신의 형 존 언더우드에게 소개하는 편지를 들려주며 그의 미국 망명을 적극 지원했다. 이들 망명객들은 서화를 그려 판 돈으로 망명 여비를 마련했다.


2. 1885년 서광범의 미국 망명과 성경 번역(요 3:16)

1885년 5월 서광범은 박영효, 서재필과 함께 “The City of Peking” 호를 타고 미국 망명 길에 올라 그해 6월 1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미국의 유수 일간지는 그들의 도착 소식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렸다. 미국에 도착한 이들 일행은 너무도 힘든 경제난과 싸워야 했다. 너무도 힘든 나머지 박영효는 망명 2개월 만에 일본으로 돌아갔고, 서광범은 언더우드가 써준 편지를 가지고 그를 초청한 언더우드의 형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달려갔다.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이사로 섬기고 있던 존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서광범은 미국에서 어렵지 않게 정착할 수 있었다. 1885년 7월 19일 알렌이 미국 북장로교해외선교부 엔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서광범은 미국에 도착한지 불과 한 달만에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 옥 중에 있는 자신의 집안 여인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쳐 줄 것을 부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서광범은 기독교 신앙으로 귀의하고 세례까지 받았다.
서광범은 1894년 12월 귀국한 후에 작성한 1895년 1월 6일자 편지에서 친히 언급한 대로 적어도 1894년까지 세례교인으로 워싱턴의 웨슬리교회라는 감리교회를 출석했다. 박영효나 김옥균보다 기독교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서광범이 세례교인으로 기성교회를 출석한 것이 분명해 진 것이다. 하지만 귀국 2년 전부터 신지학회 관리인으로 일하고 신지학회지에 한국의 민담에 대해 발표한 것을 보면 그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당시 불교계 신흥종교인 신지협회 (神智協會; the Theosophical Society)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세례를 받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오랫동안 불교에 심취해 있던 서광범은 불교의 향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서광범은 뉴욕 도착해 존 언더우드를 만나고 얼마 지난 후 뉴저지 뉴브룬스위크에 위치한 러커스대학에 입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브룬스위크는 언더우드의 체취가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언더우드가 졸업한 뉴브룬스위크 신학교가 위치해 있고,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화란계 명문 러커스 대학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서광범은 1883년 11월 27일 뉴욕 빅토리아 호텔에서 만난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를 다시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피스가 신문보도나 한국 주재 선교사들로부터 한국의 젊은 망명객들이 미국에 입국했고 그 중에서 서광범이 뉴저지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광범을 찾아갔던 것으로 추론된다.

   
▲ 제 21대 체스터 A. 아더(Chester A. Arthur) 미 대통령을 알현하기 위해 준비하는 보빙사출처: The Griffis Collection

보빙사 일행으로 게다가 민영익 변수와 함께 빅토리아 호텔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망명자로 미국에 와서 자유의 몸으로 만난 서광범과의 두 번째 만남은 훨씬 더 자유가 있었을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상당히 사교적이었던 서광범은 언더우드의 가족들과 자주 접촉하고, 교회를 출석하며 그리피스와도 긴밀한 교제를 지속적으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서광범의 요한 복음 3장 16절 번역은 바로 이 기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광범은 <한국: 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 <한국의 안팎>(Corea, Without and Within)을 저술한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와 두 번 째 역사적인 만남을 가지며 깊은 교제를 나누는 동안 그에게 자기가 번역한 요한복음 3장 16절을 건네 준 것으로 보인다.

늘 일기를 쓰는 그리피스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과 있었던 사건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명함이나 그들로부터 받은 어떤 작은 물건이라도, 심지어 관련 메모라도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 그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가 얼마나 자료들을 보관하는 일에 혼신을 다했는지는 그리피스가 넘긴 콜렉션의 내용물들을 보아서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피스는 1883년 11월 27일 뉴욕 빅토리아 호텔에서 민영익, 서광범, 변수와 첫만남을 가질 때도 그들의 친필 이름 메모를 받아냈다. 칼 귀츨라프나 존 로스도 마찬가지였지만 한국에 깊은 관심 가지고 있던 이들은 한국인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주어지면 과연 그들이 기독교를 알고 있는지를 먼저 타진했고 할 수 있는 대로 주기도문이나 복음서의 일부를 한글로 받아내려는 시도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리피스가 서광범을 미국에서 두 번째 만났을 때 너무 반가웠고, 서광범도 망명객으로 미국에 정착해야 하는 상황에서 훨씬 더 자유스럽게 그리피스와의 만남을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둘 사이의 의사 소통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광범이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했고 그리피스 역시 상당한 일본어 식견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학적 재능이 뛰어난 서광범은 적극적으로 영어를 배우고 있는 중이어서 영어로의 의사 소통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그리피스가 요한복음 3장 16절의 번역을 의뢰하자 서광범은 주저하지 않고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서광범이 번역한 요한복음 3장 16절은 다음과 같다.

   
▲ 서광범이 번역한 요한복음 3장 16절출처: The Griffis Collection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시는 고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려 보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옳은 말로 인도하여 지옥의 괴로움을 면하고 반대로 극락세계로 인도함을 미리 알려주시니라.”

서광범의 요한복음 3장 16절 성구번역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비록 성경 한 구절이의 번역이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인에 의한 성경번역 원고라는 사실이다. 개화파들과 기독교와의 관련성은 많이 이야기가 되어 왔지만 이들에 의한 성경번역 원고는 처음 발굴된 것이다.
둘째, 이것은 개화파와 기독교의 신앙접촉 관련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사실이다. 개화파가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 가치가 한국의 개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모두 종교적으로는 불교신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기독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이들이 보낸 편지에 쓰여진 기록을 통해서 암시를 받을 수 있고,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의 확산을 직간접으로 도운 이들의 활동을 통해서도 암시를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단순히 기독교를 개화사상의 확산을 위한 도구로만 여겼는지 기독교 신앙 입문 과정에 이들이 비록 일정 기간이지만 기독교로 귀의했었는지 하는 것이다.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언더우드가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셋 중에서 특별히 서광범에게만 자기 가족에게 그를 소개하는 편지를 써주면서까지 그의 미국 망명을 도우려고 했던 것은 서광범이 다른 이들과 달리 기독교에 대해 더 열린 마음을 넘어 기독교로의 귀의의사를 보였거나 그런 행동을 취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1894년 12월 한국에 돌아온 후 서광범이 워싱톤 소재 감리교단의 웨슬리 교회를 출석했다는 사실을 직접 밝힌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셋째, 이것은 서광범의 요한복음 3장 16절에 담긴 당시 기독교 용어들을 통해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과 일반인들이 성경의 기독교 용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번역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존 로스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했던 God을 서광범은 '하누님'으로 번역했다. 이것은 당시 하나님과 하누님이 지역에 따라 같은 명칭을 달리 사용하고 있던 때문으로 여겨진다. 독생자를 서광범은 ‘사제’로 로스는 ‘외아달’로, 멸망치 않고를 서광범은 ‘지옥 움을 면고’로 로스는 ‘망물을 면고’로 번역했으며, 그리고 영생을 서광범은 ‘극낙세게로 튀이기을’로 로스는 ‘길이 살물 엇게 하미니’로 번역했다. 로스 역이 서광범의 역본에 비해 본문의 의미를 더 잘 드러내고 있다. 서광범의 요한복음 3장 16절 번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옥에 내려가는 것을 면하고 극낙 세계로 올라가는 길을 제시했지만 정작 중요한 그 혜택을 정작 받을 ‘믿는 자마다’가 생략되었다. 

넷째, 이것은 서광범의 신앙세계를 이해하는데도 상당히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단순히 위 번역으로만 서광범이 어떤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가졌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힌트를 위 번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적어도 그 당시까지 그가 불교 용어를 기독교 용어로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극락세계로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믿는 자들이 영생을 소유하고 영원히 사는 곳이 천국인데 서광범은 천국가는 것이나 영생을 얻는 것을 극락세계에 가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본다. 주지하듯이 극낙(極樂)이라는 말은 대표적인 불교 용어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뜻하는 ‘창생’(蒼生)도 전형적인 불교 용어이다. 서광범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잠재적으로 그렇게 번역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천국을 극락이라는 말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창생’으로 선교사들과 초기 한국 교인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 번역은 서광범이 기독교 신앙을 갖기 시작한 아주 초기에 번역된 것이거나 아니면 서광범이 비록 기독교로 귀의했지만 그가 여전히 불교적인 용어와 시각을 가지고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려고 한 것으로 판단된다. 적어도 그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번역할 당시에는 서광범이 불교 신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기독교를 단순히 종교적인 체계의 하나로 이해하는 정도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광범의 요한복음 3장 16절의 성구번역은 현존하는 한국인 최초의 성경번역본 원고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도 그가 개화파의 거두였고, 기독교 전파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한국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어학선생을 하고 전직 한국의 고위관리로 언더우드의 입국을 직간접으로 도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 한구절의 성구 번역을 지나치게 과장할 필요는 없지만 초기 번역과정이나 기독교 접촉과의 과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현 상황에서 서광범의 요한복음 3장 16절의 번역은 당시 기독교 용어를 이해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사료라 아니할 수 없다.
미국에서 망명하는 동안 서광범이 이룩한 또 하나의 중요한 족적은 1891년 정부 기관지에 ‘한국에서의 교육’(Education in Korea)이라는 논고와 신지학회지 The Path지에 ‘한국의 민담’(Korean Stories)을 기고해 민담 4편을 소개한 일이다. 서광범은 매우 긍정적으로 한국교육제도를 소개하고 있고, 중국과 일본과 다른 점도 비교적 잘 드러내고 있다. 1890년대에 접어들어 그는 동양연구에 대한 학자로서도 상당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890년 6월 19일 서재필에 이어 1892년 11월 18일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미국시민권을 취득한 서광범은 미국 연방정부 교육국 인종학과에서 번역관으로 종사하는 기회를 가졌지만 곧 해고 당해 교육국 사환, 신지학회 관리인 일을 하며 어렵게 생활했다.

3. 서광범의 조국의 부름과 말년

서광범은 서재필이 미국 여인과 결혼하고 시민권을 취득하고 미국에서 그래도 개업의로 어느 정보 기반을 갖춘 것과 달리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고국의 부름이 있다면 언제든지 조국의 발전을 위해 섬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서재필과의 만남에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피력했다. 갑신정변 발생 꼭 10년이 지난 1894년 12월 서광범은 일본 외무성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12월초 귀국해서 그달의 내각개편 때 법무대신에 등용되었다. 그는 내무대신에 임명된 박영효와 함께 사법개혁을 단행해 여러 가지 가시적인 족적을 남겼다. 그가 이룩한 사법개혁 가운데는 의금부를 법무아문권설재판소(法務衙門權設裁判所)로 바꾸고 모든 재판업무를 관할하게 만들었으며, 고등재판소제도를 새로 만들어 그 자신이 고등재판소장을 역임하였고 선교사에 대한 제한도 철폐시켰다. 그러나 서광범은 법무대신으로 민비의 폐서인 문서에 서명한 후 이 문제로 인해 민비학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게되자 복권 불과 1년 만인 1895년 12월 주미특명전권공사로 자원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왔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갑오내각이 무너져 서광범 역시 부임 7개월 만에 공사직에서 해임당했다. 이후 중추원일등의관에 임명되었지만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미국에 남아 있다 그 이듬해 1897년 8월 14일 지병인 폐병으로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쉽게도 서광범은 신지학회 회원으로 세상을 마감했고, 신지학회장이 그의 장례를 집례했으며 그의 유해는 자신의 유언대로 화장되었다. 화장은 당시 미국 장례문화로는 일반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맺는 말

1885년 6월 새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불과 2개월 만에 일본으로 돌아간 박영효와 달리 서광범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에 남아 정착했고 시민권까지 취득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분명 언더우드의 형 존 언더우드와 그리피스도를 비롯한 미국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헨리 루미스도 그의 미국 정착을 적극적인 지원했을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 볼 때 확실히 서광범은 김옥균이나 박영효보다도 기독교에 대해 더 수용적인 자세를 가졌다. 그는 본래 사교적인데다 개화사상 수용에 매우 적극적이서 미국인들과 사귐을 어렵지 않게 가졌다. 존 언더우드와 그리피스도를 비롯한 지인들은 그의 미국 정착을 도우며 그가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세례도 받고 와싱톤에 있는 감리교단 웨슬리교회에도 정기적으로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는 1894년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교회의 세례교인으로 주일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번역 요청이 자발적인 것인지 그리피스가 요구한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서광범은 그를 만나 교류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한글로 번역한 요한복음 3장 16절을 건네주었고, 그리피스는 늘 하던 습관대로 그것을 일생동안 자신의 스크랩북에 붙여 잘 보관해왔다. 사실 서광범의 요한복음 3장 16절의 역본원고가 발굴된 것도 그가 그 성구를 잘 보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단 한 구절이지만 그 성구가 기독교 핵심 사상을 담은 복음의 요체인 요한복음 3장 16절이고 그것을 번역한 인물이 개화파의 거두이자 한국 입국을 앞두고 일본에서 한국선교를 준비하고 있던 언더우드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서광범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또한 그 한글 번역 성경원고를 일생동안 보관해온 인물이 <한국 은둔의 나라>를 저술한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라는 사실과 그 원고가 당시 기독교 용어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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