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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각오, 순교자 주기철 목사
한국교회사에 영원히 빛날 순교자, 지극히 평범한 인간 주기철
2017년 02월 28일 (화) 11:40:27 박용규 교수
   
 
  ▲ 순교자 주기철 목사  
 

일사각오, 순교자 주기철 목사
한국교회사에 영원히 빛날 순교자
지극히 평범한 인간 주기철

 

1935년 12월 19일 목요일 주기철은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피를 토하며 설교했다. 손양원, 한상동, 방지일, 김양선을 비롯한 120여명의 신학생들은 숨을 죽이며 그의 설교를 들었다. 그 설교가 그 유명한 ‘일사각오’였다. 평안남도 도지사 야스다케가 평남 공사립학교 교장들을 모아놓고 신사참배를 강요한지 1달이 조금 지난 때였다. 주기철은 신사참배 바람이 거세게 평양에 몰아칠 것을 예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끝내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숭실학교 교장 조지 매큔이 1936년 3월 21일 미국으로 강제 퇴거당했고, 5월 25일 교황청이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다행히 7월 1일 북장로교선교회가 69대 16으로 미션스쿨을 철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신사참배 바람이 얼마나 무섭게 불어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기철이 평양산정현교회에 부임했다. 돌이켜 보면 그는 하나님이 이 민족과 한국교회를 위해 예비해두신 인물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

주기철은 확실히 남달랐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목회지가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목양지를 찾았다. 그는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에 부임했다. 참 어려운 목회지였지만 교회가 곧 안정을 찾고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어느 날 마산문창교회가 참으로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배 목회자들은 주목사가 가야 해결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은 후 어렵게 안정을 찾고 도약하는 교회를 뒤로 하고 문창교회로 옮겼다.

자신의 보신이나 안주보다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했다. 1931년 갈기갈기 찢어진 문창교회에 부임한 후 주기철은 한올 한올 정성을 다해 꿰매고 다듬어 전보다 더 활기차고 역동적인 교회로 만들었다. 보통 목회자는 안정된 곳에서 목회하기를 원한다. 더구나 어려운 교회에 부임해서 안정과 회복을 이뤘다면 그곳을 자신의 임지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주기철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곳, 서야할 곳을 임지로 택했다. 그가 산정현교회 당회로부터 초빙을 받고 1936년 7월 평양으로 올라온 것도 그 이유였다.

   
▲ 1937년 1월 1일, 주기철 목사와 평양 산정현교회 제직회원들이 신년을 맞아 함께 촬영한 사진. 당시 제직회원들은 주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일제로부터 모진 수난을 받았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주기철의 산정현교회 부임은 너무도 시의적절했다. 김인서는 감격에 겨워 “주기철 목사! 산정현교회 임목”이라고 전했다. 그는 산정현교회 담임이자 이성휘의 말대로 “평양의 주인 목사, 조선의 주인 목사, 세계의 주인목사”로 부임했다. 부임 첫 주 수요기도회 때 오정모 사모는 이렇게 예언적인 기도를 드렸다. “주님! 주 목사가 대신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징계를 내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뜻대로 하옵소서!”

부임 후 교회는 날로 달라졌다. 온 교우들은 은혜롭고 능력 있는 그의 설교, 뛰어난 목회 리더십, 한국교회를 향한 시대적 각성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가 산정현교회를 목회하면서 가장 강조한 것이 ‘성령의 충만’이었다. 그는 김익두에게 은혜를 받은 대로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촉구했다. 그가 볼 때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동참하는 길은 바로 개인의 회심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힘입는 것이고 그 채널은 성령이었다.

일제의 무서운 도전 앞에 각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성령충만을 통해서다. 성령의 충만과 능력을 힘입는 것이야 말로 사탄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비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은 성령의 능력과 권능을 힘입을 때 가능하다.

   
▲ 1935년 12월 19일 주기철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피를 토하며 '일사각오'를 주제로 설교했다. 설교를 마친 다음날 촬영한 사진으로 앞줄 가운데가 주기철 목사이며 주 목사 왼쪽이 박형룡 박사, 오른쪽이 김인준 평양신학교 교수이다.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1935년 길선주가 세상을 떠나고 마포삼열 역시 한국을 떠난 상황에서 게다가 한국천주교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상황에서 주기철이 평양에 올라온 것이다. 그는 1936년 11월 18일부터 22일까지 평양신학교 특별새벽기도회를 인도했고, 이듬해 1937년 8월 17일부터 24일까지 평양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평양노회 도사경회 저녁집회 강사로 섬겼으며, 그해 9월 10일부터 16일까지 대구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제 26회 총회 새벽기도회를 전담했다. 그는 총대들에게 성신의 능력, 성신 받는 길, 십자가의 길,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죄, 그리고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설교했다.

그가 볼 때 한국교회가 시대를 극복하고 앞으로 닥칠 신사참배강요에 맞서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앞으로 닥칠 영적 위기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1937년과 1938년 각종신문과 잡지에 실린 그에 관한 기사는 그가 얼마나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는가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는 전혀 인기에 영압하거나 교만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걸었다.

   
▲ 1943년 8월 25일자 '기독교신문' 1면에 실린 사설. 일본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교회 종까지 바치라는 이 내용은 당시 신사참배를 수용한 한국교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신사참배반대운동의 구심점

1937년 감리교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일제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장로교 노회와 총회를 압박하며 참배를 강요했다. 총회 산하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참배를 결정했고, 1938년 9월 총회마저 무릎을 꿇었다. 신사참배 결정 후 한국감리교와 장로교는 정통성을 잃었다.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이를 교단의 입장으로 정하고 여기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징계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이 미션스쿨을 폐쇄하더라도 신사참배를 반대한 것과는 극명하게 다른 길을 걸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선 것은 교단이 아니라 소수의 개인이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기철이 있었다. 그는 온 몸으로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다. 산정현교회 목회 현장에서, 전국의 각종 집회에서, 노회와 총회 총대들 앞에서 신사참배가 죄라는 사실을 분명히 선포했다. 6년이 넘는 긴 투옥, 무서운 고문, 일제의 회유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믿는대로 실천하고 살았던, 언행이 일치했던 지도자도 드물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안이숙,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이기선, 박관준, 박영창이 나올 수 있었다.

   
▲ 현재 부산 초량교회 사료관에 전시되어 있는 주기철 목사가 부산 초량교회에서 사용했던 강대상.

 

지극히 평범한 인간 주기철

필자는 그가 남다른 신앙의 길, 고난의 길을 걸어 간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가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 주기철이었다는 사실을 더 주목한다.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 일경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사택에 들이닥치자 그는 후다닥 부엌문으로 도망가서는 기둥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옥중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고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온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순교 직전 오정모 사모에게 마지막 한 말은 “여보, 나 숭늉 한 그릇 먹고 싶소.”였다. 평양 감옥에서 안이숙 여사에게 수화로 어느 날에는 쑥갓을 실컷 흰밥과 함께 마음껏 먹고 싶다는 의사도 피력했다.

1944년에 접어들어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한 주기철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아들 영진의 결혼과 광조의 장래를 부탁하고 ‘나를 대신해서 어머님을 부탁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주기철, 그는 순교자이기 전에 지극히 평범한 목사요, 남편이요, 아버지였다. 그는 강인한 정신력과 신앙을 소유했지만 이 땅을 살았던 인간 주기철이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했던 겟세마네 주님처럼 그의 고난이 더욱 아름답고 값진지 모른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한국교회가 진리의 교회가 되길 소망했다. 주기철 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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