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모델, 한국교회의 영원한 사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1902-1950)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모델
한국교회의 영원한 사표

 

“나는 이와 같은 사랑을 전에는 결코 들어보지 못했다. 그것은 내 상상을 초월한다.”

손양원 목사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겠다고 했을 때 계엄 사령관이 한 말이다. 1948년 10월 21일 여순반란 사건 때 손양원은 첫째 동인과 둘째 동신을 잃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요구를 거절하자 좌익 동료가 그들을 총살했다.

그는 부흥회를 인도하다 비보를 듣고 깊은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회복하고 두 아들의 장례식 때 아홉 종목의 감사기도를 드렸다.

“아들을 죽인 원수 회개시켜 아들 삼을 마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들의 순교 열매로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을 믿으니 감사합니다.”

그는 두 아들의 순교를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살인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했다. 단순한 용서로 그치지 않고 살인자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민족적 위기에 부름 받다

돌이켜 보면 손양원은 어두운 시대 민족을 밝힌 한국교회의 샛별이었다. 그는 우리 민족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을 때 태어나 성장하고 순교했다. 태어나 2년 후 러일전쟁이 발발했고, 다시 그 이듬해 1905년 을사늑약이, 그리고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했다. 손양원이 아버지 손종일을 따라 경남 함안 칠원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그 이듬해 1908년이었다.

1914년 학습을 받고 1917년 10월 3일 칠원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 맥래(F.J.L.Macrae, 맹호은) 선교사에게 세례 받았다. 이 때부터 시련이 떠나지 않았다. 동방요배를 거절해 퇴학을 당했다가 맥래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졸업했다. 1919년 서울에 올라와 고학을 하며 중동중학교를 다니다 아버지 손종일이 3.1운동으로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그는 자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부친이 출옥한 후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巢鴨)중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귀국했다가 이듬해 1월 결혼하고 곧 다시 도일했다. 그에게 영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일본에 건너간 손양원은 나카다 주이치 목사가 시무하는 성결교회에서 매일 저녁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다.

이 체험은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성령충만을 체험한 후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간절히 소망했고 조국의 복음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 1939년 애양원교회에 부임해 1950년 순교할 때까지 한센병자들을 사랑으로 섬긴 손양원 목사(앞줄 가운데)와 애양원교회 제직들.

 

평생의 멘토 주기철과의 만남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1924년 10월 일본에서 귀국한 손양원은 1926년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했다. 부산초량교회를 담임하면서 그곳에서 가르치던 주기철과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그는 주기철의 로마서 강의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주기철은 손양원을 아꼈고 손양원은 5살의 연상 주기철을 자신의 영적 멘토로 삼았다. 일본에서의 성령체험이 그에게 조국복음화의 소명을 일깨워 주었다면 주기철과의 만남은 그 소명을 어떻게 구현할지 방향을 제시했다.

이후 손양원은 성령에 이끌린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부산 감만동 나환자 수용소 교회 상애원 전도사를 시작으로 10년 동안 밀양 수산교회, 울산 방어진교회, 남창교회, 부산 남부민동교회, 양산 원동교회 등 십여개 교회를 개척했다. 1934년 4월 평신에 입학한 손양원은 성경 읽기와 기도생활에 전념하며 능라도 교회를 섬겼다. 신학교를 졸업 후 손양원은 부산지방 시찰회 강도사로 목회자가 없는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도 앞장섰다. 이로 인해 그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38년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경남노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손양원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고 강도 자격마저 박탈했다.

▲ 손양원 시신 앞에 선 유족과 양자 안재선(위 사진 오른쪽 두 번째). 아래 사진은 손 목사 아들인 동인과 동신.

 

애양원에 몰아친 혹독한 시련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나환자들이 모여 있는 애양원은 특수 목양지였다. 손양원은 1939년 7월 14일 애양원 교회에 부임한 후 195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애양원을 사랑으로 섬겼다. 그곳은 그에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너무도 훌륭한 장(場)이었다. 그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나환자,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그들을 사랑으로 품었다. 애양원에 부임한 후에도 신사참배와 타협하지 않았다. 1940년 9월 25일 연행된 손양원은 광주구치소와 경성구금소를 거쳐 1943년 10월 청주형무소로 이감된 후 언제 끝날지 모를 길고 긴 고난의 터널을 통과했다. 일제가 그를 독방에 가두고 감식의 벌을 가했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가 구속된 뒤 신사참배의 무서운 바람이 애양원에도 불어왔다. 1941년 미국인 윌슨 박사와 크레이그 박사가 애양원을 떠나면서 탈메이지 부부가 애양원을 지켰다. 일제는 1941년 12월 8일부터 121일 동안 탈메이지를 가로 6자 세로 10자 좁은 감옥에 가두고 애양원의 모든 법적 권한을 넘기라고 협박했지만 그는 끝내 불응했다.

 

▲ 현재 경남 함안군 칠원읍 칠원교회가 보관하고 있는 손양원 목사 세례증서.

 

진리를 위한 혹독한 대가

손양원은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너무도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차디찬 독방에서 외로움과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야 했고 그의 아내 정양순은 남편 없이 시부모를 모셔야 했으며 자녀들은 아버지 대신 가정을 꾸려갔다. 전쟁 말엽 동희와 동장은 구포 고아원에 보내졌고 동신은 애양원에서 쫒겨나 나환자들이 사는 산속으로 들어갔으며 아내는 동인과 동수를 데리고 남해산중으로 피신했다. 부친은 만주 할빈의 둘째 아들 손문주에게로 갔다. 손양원은 옥중에서 사랑하는 아내, 아들, 그리고 부모에게 편지로 이렇게 위로했다.

1942년 6월 13일 동인에게 환경에 좌절하지말고 틈틈이 공부하고 신앙의 인격을 쌓으며, 죄를 멀리할 것과 “고난을 피하려고 하지말고 도리어 감수하고 극복하라.” 1942년 11월 15일 부친에게는 하늘 아버지께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실테니 아들 걱정을 하지 마시라. 1943년 8월 18일 아내에게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의지하고 건강을 잃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서도 가족과 소통하며 편지로 사랑을 전했다. 그 혹독한 시련의 때 손양원의 가족은 사랑하는 아버지, 남편, 아들 손양원의 사랑을 먹고 버틸 수 있었다. 보통 당시 목회자들이 범하기 쉬운 자신-가족-하나님과 교회 사랑이 그에게는 괴리되지 않았다.

 

이념을 초월한 사랑의 순교자

민족의 기쁨 해방은 손양원 가족에게도 축복이었다. 그는 1945년 8월 17일 5년 만에 출옥해 가족과 재회하고 이듬해 3월 경남노회서 목사안수도 받았다. 그는 전국을 다니며 회개를 촉구했다. 1950년 4월 21-25일 대구에서 열린 제36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새벽기도회 때 그가 외친 설교도 '회개'였다. 동인과 동신도 각각 순천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행복은 너무도 짧았다.

여순반란이 일어나 1948년 10월 21일 동인과 동신이 좌익 친구들에게 총살을 당했고, 2년 후 1950년 9월 28일 자신도 공산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애양원의 양들을 버려두고 혼자 피신할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온 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마침내는 원수까지 사랑했다. 그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별개가 아니었다. 그 점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도 빼 닮았다.

안용준의 말대로 그는 ‘사랑의 원자탄’이었고, 세계교회사에서 “유가 드문 성자”였다. 박형룡이 그를 “위대한 경건인, 전도자, 신앙용사, 나환자의 친구, 원수 사랑자, 그리고 순교자”라고 예찬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념을 초월한 사랑의 사도 손양원, 그는 확실히 우리 민족과 한국교회의 자랑이요 사표다.

  • 기자명 박용규 교수
  • 입력 2017.03.07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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