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 신학지남 제83권 제2집 (2016.6): 107-170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저항운동 재평가
박용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신학지남 제83권 제2집 (2016.6): 107-170
 
목차
1. 1938년 총회 결정 전후 주기철과 평양산정현교회 저항
2. 주기철의 세 번 째 검속
3. 주기철 목사에 대한 1939년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
4. 산정현교회 폐쇄와 신사참배 저항운동
5. 마지막 검속과 주기철의 순교
6. 맺는 말
 
얼마 전 주기철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 “일사각오” 영상이 공영방송 KBS에서 방영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공영방송이 주기철을 순교자나 신앙의 지도자로서 보다는 민족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주기철의 족적을 추적하기는 했지만 손양원 목사에 이어 근래 기독교 인물을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연속해서 방영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주기철이 한국교회사에 차지하는 위치는 말 그대로 독보적이었다. 하나님과 역사 앞에 살았던 한 인물이 얼마나 교회와 신앙의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너무도 잘 보여준 인물이 바로 주기철 목사였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주기철에게 걸맞은 자리를 제공하지 못했다. 노회가 주도해서 주기철의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직 파면을 결정했고, 그가 섬기던 교회를 폐쇄하고, 아버지 주기철과 어머니 오정모가 투옥 중일 때 사택을 강탈하여 어린 자녀들과 노모를 집에서 쫓아냈다. 그런데도 해방 후 신사참배 죄과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채 신사참배에 앞장선 친일파들이 교권을 장악했고, 순교자의 자식들을 광야로 내 몰았다. 한국교회는 주기철을 이중 삼중으로 못 박은 것이다.
주기철이 구속된 상태에서 1938년 9월 9일 제 27회 총회가 서문밖교회에서 열렸고, 그 다음날 총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해마다 총대였지만 그해 주기철의 이름은 아예 총대 명단에서 조차 빠져 있었다. 신사참배를 결정한 제 27회 총회는 김인서의 말대로 “비극의 27회 총회”1였다. 총회 기간 선교사들이 신사참배 가결 무효를 주장하는 안을 제출하려고 했지만 총회가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이듬해부터 총회는 천황이 있는 궁성을 향해 궁성요배를 하고 총회를 시작했다. 이후 한국교회는 정통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교권은 타락하고 배도의 길을 걸어갔지만 하나님은 이 땅의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당신의 거룩한 종들을 세워주셔서 신앙의 정통의 맥을 이어가셨던 것이다.
필자는 1938년 한국장로교 제 27차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주기철이 순교하던 1944년까지 신사참배 강요가 교단 차원을 넘어 한국교회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을 때 그 거대한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저항운동을 전개했던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를 일차적인 자료를 가지고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하려고 한다.2
 
1. 1938년 총회 결정 전후 주기철과 평양산정현교회 저항
 
1938년 9월 7일 산정현교회 설립자 번하이젤 선교사가 안식년에서 돌아왔을 때 담임목사 주기철이 보이지 않았다. 총회를 앞두고 일제가 그를 두 번째로 검속해 투옥 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1년 전 지난 [1938년] 9월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교회 담임목사와 부목사, 그리고 교회가 지원하는 전도사 모두 정부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투옥되었습니다. 당회는 내게 주목사가 돌아올때까지 강단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3
 
첫 번째 검속 때는 주기철 목사만 검속되었으나 두 번째 검속 때는 부목사 송영길과 전도사로 섬기는 장로, 그리고 집사 한원준도 검속되어 산정현교회는 위기를 만났다. 주기철을 농우회 사건으로 엮어 송영길과 함께 주기철을 검속하고 의성으로 압송한 것이다.4 농우회 활동에 참여한 송영길과 한원준이 산정현교회 부목사와 집사였다. 주기철, 송영길, 한원준 이들 세 사람이 총회농촌부에서 함께 활동했는데 일제가 총회 자금 일부를 정치적인 목적에 사용했다는 혐의를 내세우며 구속한 것이다. 1939년 2월 20일 번하이젤은 이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세 사람 모두가 총회의 농촌부원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지만 경찰은 농촌부원들이 총회 자금 얼마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용했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행실을 조사해왔던 것입니다. 많은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한국의 동남부 해안에 위치한 의성으로 압송되어 그곳 감옥에 갇혔습니다. 지난 [1938년] 12월 같이 체포되었던 동행자 평양출신의 집사 한 사람은 풀려났습니다. 그는 그들의 혐의가 경찰에 의해 풀려져 만약 신사에 가겠다는 동의만 한다면 모두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해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집사는 동의했고, 그래서 풀려났습니다. 신사참배 요구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목사들은 계속 투옥되었습니다. 전체 사실로 볼 때 본래 적용한 혐의가 단지 속임수에 불과하고 그들을 체포한 실제 이유는 신사에 가서 참배하는 것을 그들이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총회가 열리기 바로 직전에 그들이 체포되었습니다.5
 
의성 경찰서에서 이들 세 사람에게 일제는 심한 고문을 가했다. 증거 자료를 찾으려고 했지만 일제는 총회 자금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한 적도 없는 이들에게서 혐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얼마나 가혹한 고문을 당했는지 권중하 전도사는 세상을 떠났고 박학진 목사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 이들은 몽둥이로 심하게 맞았고, 몸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에 물을 붓는 물고문을 당했다.6 많은 다른 목사들과 장로들이 지난 몇 년간 동일한 고문을 당했으며, 경찰은 죽음 직전까지 가서야 고문을 멈추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매주일 아침 11시에 주일 예배를 드렸고, 주기철은 매주일 오후 죄수들을 대상으로 말씀도 전했다.7
일제는 완강한 이들의 신사참배반대 입장을 회유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검속 5개월 만인 1939년 1월 29일 출옥시켰다. 번하이젤은 1939년 2월 20일 이렇게 기술했다:
 
지난해[1938년] 8월 말에 산정재교회 두 명의 목회자와 평양산정재교회 담임목사가 체포되었다가 출옥해서 성도 무리에 합류하였습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지난 토요일, 1월 28일에 집에 도착했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 이튿날 주일 아침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출옥하는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역까지 나가 이들은 교인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각기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했지만 회중들에게 몇마디 인사말만 하고 예배는 인도하지 않았습니다.8
 
주기철이 출옥한 이날 “오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유언적 설교를 했다고 알려진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일단 풀려나긴 했지만 일제가 이들을 회유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 사람이 풀려난 직후 평양경찰서에서 이들을 재 소환하여 조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평양경찰서는 이들을 소환하고는 신사는 국가에 대한 예의라는 정부측 자료를 주고 읽고 다시 와서 교육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최근 감옥에서 석방된 세 명의 평양 목사들은 월요일 아침 경찰서에 소환되어 신사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담대히 자신들의 입장을 천명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그들각자에게 신사에 대한 정부 측 가르침을 설명한 책을 주고는 그것들을 읽은 후 며칠 후에 다시 와서 더 교육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목사로서 자신들의 사역을 계속하도록 허락을 받지 못할 것 같아 염려됩니다.9
 
비록 잠시 풀려나기는 했지만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 목회를 계속할 수 있을지 번하이젤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일제는 지속적으로 주기철과 산정현교회를 압박한 것이다. 이런 일제의 강압 속에서도 주기철과 송영길 그리고 온 교우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번하이셀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교회는 신사 문제에 관한한 그[주기철 목사]와 전적으로 뜻을 같이했다.”10
주기철의 산정현교회 목회는 험난한 길이었다. 매주일 수십 명의 사복 경찰들이 예배 시간에 청중들 가운데 끼어 앉아 있는 상황에서 주기철 목사가 단독으로 단에 올라가 예배를 인도했다. 그는 행여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볼까봐 홀로 단에 올라갔다. 당시 주기철 목사가 풍기는 인상은 뭐라 형언할 수 없었다. 구금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단에서 담대히 외치는 그의 설교 모습은 회중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고, 참석한 이들에게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만들었다. 당시 산정현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한 안이숙은 그의 설교 모습을 훗날 회상하며 마치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그 자리에 서신 것 같은 큰 감동을 일으키며 섰는 것이 그렇게도 신비스러웠다.”고 이렇게 증언했다.
 
이처럼 진지하고 박력을 가진 설교에 나는 황홀해지며 내 심부를 꿰뚫는 것 같은 영력이 막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극도로 긴장을 시키면서 온 신경을 예민케 하고 흥분케 했다. 그는 자기도 흥분케 했다. 그는 자기도 흥분이 되어서 주먹으로 꽝 하고 강대를 쳤다. 동시에 벼락같은 웅장한 소리로, “이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상이 무서워 배반하는 행동을 하자는 모독배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떠나가라” 하고 고함을 질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가증스럽고 있을 수 없는 모독이다” 하고 또 고함을 쳤다. 그 소리는 벽력 소리였다.11
 
보통 사람 같으면 견디기 힘들텐데 주기철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일에 소명을 받은 사람처럼 흔들리지 않고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했다. 수많은 회유와 협박이 있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주일 강단에 서지 못하도록 일경이 설교를 금했지만 그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면 그만둘 것이라고 맞섰다. 산정현교회 안에 신사참배를 한 성도들도 있었지만 주기철의 신사참배 저항에 자신들의 모습이 부끄러웠고 주기철에 대해 여전히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주일에 일본(日本) 경찰대는 또 산정재 예배당을 포위하고 주(朱) 목사에게 “오늘부터 설교하지 마라.” 엄명한 즉 주(朱) 목사는 나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시면 그만둘 것이오. 내 설교권은 경찰서에서 받은 것이 아닌 즉 경찰서에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소. 경찰관이 금지함에도 불구하고 설교하면 체포하겠소. 주(朱) 목사. 설교하는 것은 내 할 일이오. 체포하는 것은 경관이 할 일이오. 나는 내 할 일을 하겠고, 경찰관.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경찰관의 명령에 불복하는가? 고 노호(怒號)함에 대하여 주(朱) 목사는 일본의 헌법은 예배 자유를 허락한 것이오. 당신들은 지금 예배 방해요, 헌법 위반이오. 단판의 말을 끊고 강단에 올라서는 주 목사의 기세는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이 엄엄숙숙 비장하였다.12
 
사실 이렇게 당당하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일제라는 무서운 공권력을 가진 국가권력이 힘없는 한 생명을 빼앗으려면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은 고난을 각오하지 않으면 가기 힘든 길이었다. 한두 번 신사참배를 반대할 수는 있어도, 정해진 어느 기간 동안 그럴 수 있어도, 지속적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타협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심지어 산정현교회 당회원 안에서도 신사참배를 한 이들이 있었다. 일제는 신사는 국가에 대한 예의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흔들리는 이들에게 명분을 주었다. 신사참배는 점점 더 대세가 되었다. 더구나 1936년 한국천주교, 1937년 한국감리교, 1938년 한국장로교 총회마저 신사참배를 수용한 상황에서 어느 개교회와 개인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은 고난을 각오하지 않는다면 가기 힘든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너무도 많은 이들이 타협의 길을 걸어갔다. 그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이미 제시했듯이 대부분 장로교 목사들은 지속적인 경찰의 압력에 견딜 수 없고 또 감옥에 가서 그들이 어떤 고문으로 고통을 당해야 할지를 잘 알기 때문에 감옥에 가기를 꺼리고 신사에 굴복하고 가서 그곳에 참배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들은 신사가 애국적 행위이지 종교적 의미가 없다는 정부 측 해석을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지만 일제의 압력에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배반하고 양들의 거짓 목자가 되었으며, 많은 교인들을 대단히 실망시켰습니다. 신사참배를 인준한 총회와 또한 여러 많은 노회들의 사례, 감리교나 천주교, 일본 그리스도인들 사례가 보여주듯 많은 교인들은 저항하는 것이 소용없고 그들 모두가 기꺼이 신사참배 대열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한국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에서는 신사에 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재난의 절정은 최근 장로교 총회장과 부총회장, 감리교 총리사와 그의 직전 전임자, 그리고 한국성결교 교단장 모두 그곳에 있는 유명한 국가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 도래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교회로부터 가도록 임명을 받은 것이 아니고 정부에 의해 압력을 받아 갔으며, 그들 각 사람들에게 각기 100엔의 경비가 지급되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정부 당국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교회를 통제하기로 결정한 듯하며, 외형적으로는 거의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13
 
이미 남궁혁과 박형룡은 망명의 길을 떠났고,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적극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분위기였으며, 평양신학교 마저 폐교된 상황에서 산정현교회가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중심에 선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길이었다. 한 때 주기철의 든든한 후원자들이었고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함께 했던 이들마저 하나둘씩 주기철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김인서는 싸움은 남았는데 친구가 주기철을 떠나갔다며 이렇게 안타까움을 글로 남겼다:
 
주(朱) 목사 박해받던 초기에는 결사(決死)의 전우(戰友)도 적지 않았고 추종자도 많았지만 날이 갈수록 한 사람 두 사람 이별이 되었다. 권련호(權連鎬) 목사 기양교회에서 자주 찾아다니다가 철산(鐵山)교회에 옮겼고 김상권(金尙權) 목사 신암교회 있어 급한 때 강단을 돕다가 원산(元山)에 가고 박병훈(朴柄勳) 목사 신학교에서 추종하다가 일본(日本) 중(中) 앙신학교(央神學校)에 전학하였다. 김명집(金明執) 목사는 주 목사가 “피신하라” 권하여 북지(北支)에 보내였다. 싸움은 남았는데 친구는 떠나갔다.14
 
엘리야 시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칠천이었다고 하지만 당시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고난의 길을 걸은 목회자들은 소수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그 주변의 인물로는 채정민(蔡廷敏), 최봉석(崔鳳奭) 목사, 이인재(李仁宰) 전도사, 산정현교회 방계성 전도사, 백인숙(白仁淑) 전도사가 여전히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선봉에 서서 주기철과 뜻을 같이했을 뿐이다.15
 
2. 주기철의 세 번 째 검속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가 일제의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담대히 주일강단을 지켜나가자 일제는 평양노회를 통해 주기철과 평양산정현교회를 제재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번하이젤이 편지에서 밝힌대로 주기철 목사는 1939년 10월 초에 세 번째로 또 다시 검속되었다. 16
주기철이 검속되어 주일 강단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강단을 맡은 사람은 번하이젤 선교사였다. 일제는 그에게 설교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한편 두 명의 선임장로들을 불러 먼저 솔선수범해서 신사참배 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면 교인들이 따라하지 않겠느냐고 회유한 것이다. 한편으로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전체 교우들이 신사참배를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번하이젤도 장로들도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번하이젤은 삼일운동 때도 그랬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때도 사명을 가지고 담임목사 투옥 중에 산정현 강단을 지키며 교인들을 독려했다. 1939년 12월 20일 그는 자신의 편지에서 이 사실을 밝혔다:
 
한 동안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그 주제[신사참배문제]에 관한 마지막 편지를 보낸 이후 지난 40일 동안 상당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경고를 받고도 산정현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한 후 경찰서에 다시 소환을 받았으며, 만약 내가 다시 설교한다면 내가 벌을 받거나 추방을 당할 것이며 모든 선교사들의 장래 사역도 제고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평양선교부와 여기 회기 중에 있는 실행위원회의 사람들과 상의를 하면서 특별히 나와 함께 같이 교회 사역을 감당하던 전도사 방[계성] 장로가 지금 체포된 상황에서 산정현교회 교인들을 광야에 내버려 둘 수 없다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실행위원회 위원들 뿐만 아니라 선교부 사람들은 산정현교회 사역을 계속하겠다는 나의 결심을 지지했습니다.17
 
여기 장로회 선교부 실행위원회는 북장로교선교회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 일이 있기 몇 년 전인 1935년 북장로교 선교회 실행위원회 홀트그로프트(허대전), 솔터(소열도), 해리 로즈(노해리)는 조지 매큔이 신사참배문제로 추방당할 때도 한 결 같이 호흡을 같이 했던 이들이었다. 평양의 선교사들은 번하이젤과 뜻을 같이 했다. 교회도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한 뜻으로 뭉쳤다. 지도적인 인물들만 아니라 교인들 하나하나까지 예의주시하며 감시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뭉쳤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담임 목사가 구속된 상황에서 번하이젤 선교사와 당회 그리고 교우들이 하나되어 신사참배 반대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노회도 이들을 회유할 수 없었다. 일제는 물리적인 방법을 쓰기로 결정하고 1939년 10월 21일 아침 산정현교회 장로와 집사 18명을 평양경찰서로 소환했다. 1939년 10월 22일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평양부내 산정현 예배당에서는 작년 봄 동 교회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절하여 평양 경찰서에 피검되어 지금까지 오는 중인데 그 동안 주 목사 대신 편하설(片夏卨)이란 서양 선교사가 교회 일을 맡어 보아 오는 동시에 동 교회에서는 몇 사람을 빼노코는 신사참배를 불이행하여 왔다. 그런데 이십일(二十一)일 아침 돌연 평양 경찰서에서 동 교회 장로, 집사 등 십팔(十八) 명을 호출하고, 일(一), 교회 위원은 전부 매 주일 한 번씩 신사참배를 이행할 것. 이(二), 설교 또는 기타 교회 사무는 위원들만이 집행하고 서양인과 기타인은 교회 일에 관여하지 말 것. 삼(三), 금일 오후 삼(三)시까지 회답할 일. 세 가지 항목을 지시하고 만일 불응하는 대에는 내일부터 교회를 폐쇄한다는 강경한 방침을 보였다. 동 교회에서는 타개책을 강구 중이며 경찰서에서 지시한 기간 내로는 회답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18
 
당시 〈동아일보〉가 주기철 목사와 평양산정현교회 상황을 상세히 보도한 것이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것처럼 기록했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동아일보〉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먼저 산정현교회 교우들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신사불참배를 이행하여 왔다는 사실과 경찰서에서 요구하는 사항이 무엇인지를 그 내용을 지상에서 밝힌 것이다. 이것은 당시 전국 곳곳에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격려와 용기를 제공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회답이 어려울 것 같다는 것도 교회가 신사참배문제에 있어서 쉽게 타협의 길을 걸어갈 것 같지는 않다는 평가를 덧붙인 것이다.
번하이젤은 최근 진행되고 있는 산정현교회의 소식을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소상하게 알렸다. 이 편지에서 번하이젤은 평양경찰서의 요구를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거절하고 교회가 폐쇄되는 한이 있더라고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했고, 적당한 목사를 새로 물색해 보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장로교는 교인들이 자기 목사를 선택한다는 사실을 들어 거절했음을 밝히고 있다.19
18명의 교회 제직들이 일제에 단호하게 맞선 것이다. 1939년 10월 24일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산정현교회 “제직회원의 대부분은 참배를 찬성치 아니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20 일제는 주기철 목사가 구속된 상황에서도 번하이젤 선교사와 방계성 전도사가 설교를 맡으며 당회와의 협력 속에 교회를 계속 안정되게 이끌어 가자 방 전도사를 불러 의도적으로 수요설교를 못하게 방해했다. 방 전도사는 번하이셀에게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이 일을 전해 주었다:
 
수요일 오후, 그날 저녁 수요 기도회를 인도해야 할 교회 전도사 방장로가 내게 와서는 그가 저녁 전에 체포될 것 같다고 말하면서 내게 수요 기도회를 인도할 준비를 하고 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물론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했습니다. 수요 기도회 시작 45분쯤 전에 경찰 한 사람이 찾아와 나에게 그들이 나를 보기를 원하니 잠시 경찰서로 와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내 아내와 나는 차를 타고 경찰서에 가서 바로 교회로 갈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경찰서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그녀는 차에 앉아 기다렸습니다. 나는 경찰 간부가 올 때까지 20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는 왜 그들이 주목사를 체포했는지 긴 설명을 늘어놓고는 산정현교회와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교회 제직들에게 지시가 내려졌다고 말하고는 중앙정부가 선언한 대로 신사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애국적인 행위라는 지난 수년 동안 지겹도록 반복해온 그것들을 말하면서 신사참배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회에 갈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여 그가 말을 중단할 때까지 참고 들었습니다. 그는 내가 교회에 지시를 내린 것들을 이해하고 동의해 주기를 희망했습니다. 나는 혹 그가 내가 그 교회에서 설교를 하지 않기를 말하려고 하는 의도는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말했습니다. “전혀 아니요, 당신은 그곳에서 어느 때든지 설교할 완전한 자유가 있습니다. 단지 나는 그 상황을 당신이 이해하기를 희망합니다.” … 8시 30분에 그는 말을 끝냈고 나는 경찰서를 나왔습니다.21
 
일제는 번하이젤이 정곡을 찌르자 얼버무려 대답했지만 번하이젤과 방계성이 더 이상 산정현교회 설교를 하지 않기를 바랬다. 또 노골적으로 못하게 지속적으로 협박하며 강요했다. 번하이젤은 제직 중에 대신 설교할 사람을 뽑을 것을 요구했고, 1939년 11월 4일 토요일 저녁에 열린 당회에서 오윤선 장로가 설교하도록 협의했다. 그 다음날 신사참배반대에 대해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는 오윤선 장로가 단에 올라 “예배를 인도하게 되자 교당 내는 긴장한 공기에 휩싸인 채 예배가 끝났다.”22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신사참배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강단에 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 주일 오후 산정현교회는 “전체 제직들이 모여 어떠한 경우에도 신사참배한 사람은 강단에 세우지 않겠다고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그들은 심지어 작년에 단 한 번 신사참배를 했던 장로 세 사람마저 설교자에서 제외시켰다. 왜냐하면 그들 중 한 명이라도 강단에 오르면 경찰은 신문에다 산정현교회가 마침내 굴복하고 신사참배자를 강단에 세웠다고 선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세 장로들도 교회가 곤경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런 결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런 결정 사항은 곧 바로 경찰에 알려졌다.”23
1939년 10월 중순 주기철 목사가 구속될 즈음부터 산정현교회는 매일 새벽 5시 30분에 모여 간절히 기도드렸다. 1939년 11월 14일 번하이젤은 지난 6주간 동안 매일 아내와 함께 새벽기도에 참석했다며 이 사실을 담담히 밝혔다:
 
지난 6주가 넘게 매일 새벽 5시 반에 교회에서 기도회가 모였습니다. 교인들이 잘 참석했고,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자의 발톱에서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했습니다. 아내와 나도 거의 모든 기도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단지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한다는 것이 육신적으로는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가 집에서 불과 1마일 가량 떨어져 있어 차로 가면 어려움 없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노회에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하라고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모든 노회원들이 어느 때에 가야 한다는 안내가 있었습니다. 140명의 노회원 가운데 단지 12사람만이 신사에 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 동안에 들은 가장 고무적인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24
 
산정현교회는 길고 긴 어두운 터널을 계속해서 통과해야 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산정현교회 교우들이 하나되어 거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흔들리지 않고 말이다. 일제는 소속 노회를 통해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 직에서 사면시키기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평양 노회장에게 임시노회 소집을 요청했고, 노회 소집통보경찰이 번하이셀과 방 전도사, 장로, 제직회원들을 소환하여 협박했지만 산정현교회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경찰은 노회를 이용하여 주기철 목사를 사면시키고 예배당을 폐쇄시킬 음모를 꾸몄다. 일제가 용의주도하게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를 떼어놓으려고 시도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일제는 1938년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부터 더욱 강하게 이 일을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한국장로교단은 일제의 요구에 순응하며 타협과 배도의 길을 가고 있었고, 일제는 한국교회 총회 지도자들을 이용해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노회가 이를 수용하는 상황에서 교회의 순결에서 참으로 중요한 성례집행과 치리를 집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일을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넘겼다. 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정부의 시책에 순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목회자들은 선교사들과 접촉하면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선교사들과의 접촉을 꺼렸다. 자연히 선교사들과 한국교회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많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이미 신사에 가서 참배하라는 명령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투옥 당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어려움과 협박과 고문으로 굴복을 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그들이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방향으로 호도하는 일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후에 우리 지역 노회가 열렸는데 노회장은 총회의 결정을 단지 발표하고 교회가 이에 순종해야 한다고 천명했습니다. 의사 결정 묻는 투표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결과로 우리 선교사들은 우리가 책임을 맡아오던 교회에 대한 모든 당회장 권한을 사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꺼이 교회들을 순회하고 복음을 전하고 사경회를 개최하지만 성례를 집례하고 치리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노회에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당회장 권은 한국인 목사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총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목사는 경찰이 금할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교회들을 순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작금의 상태입니다. 선한 많은 교회들이 선교사들의 방문을 여전히 환영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많은 교회들은 선교사가 그들을 방문하게 되면 그 후에 경찰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초대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25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총회와 교단은 신사참배를 수용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분명한 반기류가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회나 총회와 관련된 직책을 계속해서 수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모든 관련 직책을 내려 놓았다. 신사를 찬성하는 한국교회와 이를 반대하는 선교사들 사이가 점점 더 멀어졌다. 1939년 2월 번하이셀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는 이를 단적으로 증거해 준다:
 
경찰은 선교사들과 한국 목사들이나 다른 교회 사람들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모든 가진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집을 방문하지도 말고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갖지 말라고 지시 받았습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사들이 상호도움과 교제를 위해 한 달에 한번씩 모여 오던 평양의 목사회도 아마도 마지막 모임이 될 것 같습니다. 목사들은 목사회에서 멀어지라고 경고를 받았습니다. 오늘 한 목사가 업무차 필자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어두어진 뒤에야 돌아갔습니다. 그는 내게 명함을 주고는 다시 되돌려 달라고 내게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방문했다는 사실이 경찰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경찰이 싫어하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상태는 그 나라 전역에서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26
 
일제는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총회는 신사참배를 했고 선교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와 교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차단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용기 있는 선교사들의 행동과 신앙을 물리적으로 막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특별히 산정현교회, 번하이젤, 그리고 주기철은 혹독한 시련을 감수하면서도 전체가 하나 되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온 몸으로 저항했다.
 
3. 주기철 목사에 대한 1939년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
 
경찰이 산정현교회와 관계를 끊을 것을 강하게 요구하는 상황에서 번하이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일제의 요구를 무시하고 산정현교회 강단을 계속 지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분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산정현교회 당회를 소집했을 때 당회는 결의해서 그가 계속 강단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평양선교회 동료 선교사들은 그에게 오는 주일에는 강단에 서지 말라고 조언을 주었다. 비록 어느 정도 실망스러웠지만 그는 그들의 조언을 따랐다. 그런 후 그 다음 두 주간 다시 설교를 계속했다. 그러자 경찰은 그를 매번 경찰서로 소환당하여 꾸짖고는 만약 다시 설교한다면 그들이 설교를 금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번하이젤은 1939년 12월 20일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써서 산정현교회에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선교부에 다음과 같이 알렸다:
 
나는 설교를 계속했지만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지난 주 나는 다시 설교를 했습니다. 비록 몇몇 사복경찰이 참석했지만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경찰은 노회를 이용해 주 목사를 물러나게 하고 교회를 폐쇄하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평양노회 노회장을 소환해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교회를 다룰 평양노회 임시회를 소집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는 거절했고, 총 20번이나 소환을 당했지만 아직도 임시노회 소집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마지막에는 경찰이 노회의 네 다섯 노회원들의 소집청원 서명 날인을 받아 노회장에게 임시노회 개최를 요구해, 노회장은 교회 법에 따라 강압에 의해 마지 못해 임시노회 소집 지시를 내렸습니다.27
 
평양 노회장 최지화는 무려 20번이나 소환을 당하면서까지 임시노회 소집 요구를 거부했지만 일부 일경에 편승한 평양노회 소속 목회자들의 서명을 받아 노회 소집을 요구하자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회장의 임시노회 소집 지시가 내린 후 “경찰은 바삐 움직이며 모든 노회원들을 불러서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말해줬다. 그것은 주 목사를 [산정현교회 담임에서] 물러나게 하고 회중이 신사참배한 목사를 초청할 수 있을 때까지 임시로 교회를 폐쇄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노회원들이 그 안에 찬성표를 하도록 지시했고 아니면 적어도 그에 대해 반대표를 던지지 말 것과 신사참배에 불복종하는 경우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려줬다.”28 1939년 12월 19일 남문외교회당에서 개최한 제 37회 평양노회 임시노회가 평양시내 고등계 형사들과 25-30명의 사복형사가 경계를 선 가운데 열렸다.
 
평양노회 임시회가 어제 경찰 본부 가까이에 위치한 남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평양의 몇몇 경찰 경내에서 온 모든 금줄과 검을 찬 경찰간부들과 약 25명에서 30명의 일반 경찰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최지화] 노회장은 [홍택기] 총회장이 최근 발행한 경고서한을 읽고 우리 노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사에 가서 참배하라는 총회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절한 목사가 있는 한 교회가 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것은 인쇄된 문서로 한 쪽에는 일본어로 다른 쪽에는 한글로 쓰여졌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일본어로 쓰여진 교회에 보내는 공문은 처음 보는 것입니다. 내 개인 생각으로는 그 문서는 경찰이 준비한 후 총회장에게 압력으로 서명하게 하고는 돌린 것입니다. 그 문서에는 신사참배는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요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임을 총회가 인준한 것이라는 진술이 있습니다. 정부가 신사에 가지 않는 시민을 관용할 수 없듯이 신사에 가지 않는 어떤 교인들도 교회가 관용하지 말고 모두를 엄히 권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노회장은 의제가 이제 노회 앞에 있으니 그들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나는 발언권을 얻어 어떤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교회의 헌법과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금줄을 찬 경찰간부가 내게 앉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 후 나는 교회 정치 제 1장 7조를 읽고 교회 법정은 교회의 구성원의 양심을 속박하는 어떤 법도 만들 권한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해 총회의 결정은 많은 총대들의 양심을 속박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 내가 거기에 이르자 세 명의 경찰이 나를 잡아 채고는 나를 건물 밖으로 밀쳐내 경찰서로 연행했습니다. 그 말을 끝낼 수 없어 유감입니다만 그것은 결코 과거에는 하지 못했던 발언 중의 하나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29
 
번하이젤이 인용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정치 제 1장 7조는 상황에 맞는 적절한 내용이었다. “치리권은 전교회로나 그 택립한 대표자로 행사함을 불문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전봉전달하는 것이 뿐(ᄲᅮᆫ)이라. 대개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유일한 법칙인즉 어나[어느] 교파의 치리회던지 회원의 양심을 속박할 규칙을 자의로 제정할 권리가 업고 오직 하나님의 묵시하신 의지에 기인할 것이니라.”30
번하이젤이 노회에서 경찰서로 강제 연행된 뒤 “의제가 올라왔다.” 노회장 최지화와 평양노회는 주기철 목사에 대해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기로 결정했다. 1939년 12월 20일자 번하이젤의 편지에 의하면 이날 평양노회 임시회에서는 “목록에 약 10개의 관련 조목들이 일괄투표로 통과되었다.”31 그리고 나서 노회장은 임시회를 정회했다. 임시회를 정회한 것은 후속 조치가 있을 때 그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에서 지난 해 홍택기 총회장에 이어 평양노회장 최지화가 너무도 부끄러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날 주기철 목사의 산정현교회 시무 권고 사직에 동의한 노회원은 8명이었고 혹자는 다섯, 여섯 명이 반대했다고 하고 혹자는 반대한 사람이 단지 한 사람[우성옥(禹成玉)]이었다고 말한다.32 그 외 50명이 넘는 노회원들 절대 다수는 침묵을 지켰다. 감히 그 분위기 속에서 반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반대한 사람 우성옥은 정회 후 바로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당했다. 총회에 이의를 제기하겠다며 평양노회 임시회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산정현교회 박정익 장로도 번하이젤이 있던 그 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얼마 후에 풀려났다. 노회장은 안건에 대한 투표가 통과되었다고 선언했고, “주 목사는 산정현교회 시무에서 물러나게 되었음이 선언되었다.” 평양노회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를 평양산정현교회에서 강제로 쫓아 낸 것이다.33
일단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산하 노회가 그 결정을 거스리며 반대운동을 전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한다고 해도 평양노회가 소속 노회원을 신사참배 문제로 사직시킨 것은 총회의 신사참배결정 못지않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평양노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를 독려하지는 못할망정 외롭게 싸우는 목사에게, 강제로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직시킴으로 그를 또 다시 못 박았다. 37회 평양노회 노회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안건 결의:
입석자: 평양서 송본(松本) 고등주임, 평양, 대동, 선교 3서의 고등계 형사대, 전평서 고등계 주임 현 평원 서장 청수천(淸水川) 경부
1. 주기철 목사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이유로 교회헌법 권징 조례 19조에 의하여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
2. 이인식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하다.34
 
평양노회 촬요는 주기철에 대해 목사 면직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35 우리는 과연 이날 평양노회가 주기철 목사에 대해 결정한 것이 단순히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킨 것인지 아니면 목사 면직을 결정한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평양노회 회의록은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킨 것이지 목사 면직시킨 것으로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정확한 징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기철 목사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이유로 교회헌법 권징 조례 19조에 의하여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36
 
다음날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알리는 1939년 12월 20일, 21일자 〈동아일보〉도 “문제 중의 주 목사, 평양노회서 사임 결의,” “주목사 사직 후 …”라고 기록하고 있고, 같은 날 12월 20일자 〈조선일보〉도 “주목사에 사직 권고”로 되어 있다.
 
〈동아일보〉-1939년 12월 20일자 “문제 중의 주 목사, 평양노회서 사임 결의.”
1939년 12월 21일자 “주목사 사직 후 이목사 당회장에.”
〈조선일보〉-1939년 12월 20일자 “‘주 목사에 사직 권고,’ ‘노회에서 총회결의와 총회장경고무시이유로,’ ‘평양산정현교회 문제의 진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각각 “사임결의,” “사직” 과 “사직권고”로 보도하였다. 〈매일신보〉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비해 좀더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문제(問題)의 목사(牧師)는 파면코,”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실현(實現)키로,” “평양산정현교회(平讓山亭峴敎會) 사건단락(事件段落)”이라고 보도하였다.37 “문제의 목사는 파면코”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매일 신보에 보도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양부 계리 산정현교회의 신사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평양]장로교노회에서는 드디어 [12월] 19일 오후 O시부터 남문밖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열고 각 교회의 목사 장로와 교역자 … 서양인 편하설 목사도 참석한 가운데 토의하는 문제가 중대한 것이니 … 평양서의 송본(松本) 고등주임, 평양, 대동, 선교 3서의 고등계 형사대와 … 전 평서 고등계 주임이고 현 평원 서장 청수천(淸水) 경부가 배석하야 삼엄한 경계 가운데 로회장 최지화(崔志化) 목사로부터 신사참배의 전후 경과를 보고하고 현재 평양서에 계류 중인 주기철(朱基徹) 목사와 면회하고 조선장로교 총회로부터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과 최근 또 신사에 참배토록 발송하여 온 통첩에 대하야 의론하엿스나 주 목사도 끗끗내 이에 응치 안엇다는 것을 보고하자 서양인의 편 목사가 즉시에 이러나서 장로교 헌법 조문을 드러 량심을 구속 운운의 불온한 말을 하다가 림석한 경관에게 발언을 중지당하고 퇴장을 당한 다음 의사를 속행하야 문제 중의 주 목사를 사면식히고 압흐로는 신사에 참배할 교역자를 산정현교회에 임명하기를 결의하엿다. 그리하야 파란만튼 산정현교회 문제는 이로써 해결되였다.38
 
주기철 목사에 대한 파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매일신보〉는 기사에서 밝히고 있다. 위 내용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문제 중의 주 목사를 사면식히고 압흐로는 신사에 참배할 교역자를 산정현교회에 임명하기를 결의하엿다.”라는 말이다. 주목사를 사면시켰다고 〈매일신보〉는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목사를 사면시키고”라는 말은 목사면직이 아니라 위 기록 그대로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 사면으로, 평양노회 임시회록에 있는 대로 주기철 목사의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에 더 맞다.
우리는 당시 상황 속에서 1939년 12월 19일자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결정 곧 “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다”는 내용이 함축하고 있는 것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풀어야 할 우선되어야 할 과제는 권고사직과 면직이 같은 징계이냐 하는 것이다. 권고사직과 면직은 각각 그 징계 내용과 적용되는 것이 다르다. 목사 면직과 사직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로교 헌법에 있는 면직, 사면, 사직에 대한 내규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징조례 42조는 “목사가 이단을 주창하거나 불법으로 교회를 분립하는 행동을 할시에 그 안건이 중대하면 면직할 것이니라(그 행동이 교리를 방해하랴하야 전력으로 타인을 권유하는 형편이 잇는지 지식이 부족한 중에 발생하고 도에 별로 해되지 아니할 것인지 심사후에 처단함이 가하니라)”39고 되어 있다. 면직된 자는 목사직이 해직되고 평교인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그것은 권징조례 45조를 보면 알 수 있다.
 
“[권징조례] 제 45조 지교회에 담임 목사된 자가 면직을 당하고 출교는 되지 아니하엿스면 노회는 그 해직됨을 선언할 것이오. 이런 경우에는 그의게 평교인의 이명서를 주어 원하는 지교회로 보내대 이명서에는 그 정형을 상기할 것이니라. 담임목사를 정직할 시는 그 담임ᄭᅡ[까]지 해제할 수 잇스나 상소한다는 통지가 잇스면 그 담임을 해제하지 못하나니라.”40
 
권징조례 44조는 면직으로 인해 목사직이 해직된 자는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시 그를 목사로 임직한 후에 사역을 다시 시작하도록 명시하였다. “제 44조 악행을 인하야 목사직 해제를 당한 자가 깁히 회개할지라도 오래 동안 특별히 모범될만한 겸손과 덕을 세우는 행위가 현저하야 그 소재지 치리회의 관찰에 교역에 종사함이 도에 방해가 되지 아니할 줄노 확인할시는 목사로 임직하되 당초 면직한 치리회가 직접행사하던지 그 회의 결의대로 위탁밧은 치리회가 행사할 것이니라.”41
위 권징조례의 내용에 있는 대로 면직은 반드시 다시 임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문화시키고 있다. 1934년에 개정된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 제 17장제1조부터 제5조까지에는 “목사사면과 사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 1조 자유사면. 목사가 본교회에 대하야 난편한 사정이 잇서 사면원을 로회에 제출하면 노회는 해 교회 대표를 청하야 해목사의 사면리유를 채문할 것이니 해 교회 대표가 오지 아니하던지 혹 그 설명하는 리유가 불충분하면 사면을 승낙하고 회록에 상기할 것이오. 해 교회는 허위교회가 되나니라.
제 2조 권고사면. 지교회가 목사를 환영치하니하야 해약코저 할 시는 로회가 목사급 교회대자의 설명을 청취후 처리할 것이니라.
제 3조 자유사직. 목사가 그 시무로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 줄노 각오할 시는 사직원을 로회에 제출할 것이오 로회는 이를 협의결정할 것이니라.
제 4조 권고사직. 목사가 성직에 상당한 자격과 성적이 업던지 심신이 건강하고 ᄯᅩ 사역할 처소가 잇서도 오년간 무임으로 잇스면 로회는 사직을 권고할 것이니라.
제 5조 목사의 휴양 근무중에 잇는목사가 신체섭양이나 신학연구나 기타 사정으로 본교회를 ᄯᅥ나게 되는 경우에는 본당회와 협의하며 2개월이상 흠근하게 될 시는 로회의 승락ᄭᅡ지 요할 것이니라.42
 
위에 있는 대로 권고사직에 해당하는 내용은 “목사가 성직에 상당한 자격과 성적이 업던지 심신이 건강하고 ᄯᅩ 사역할 처소가 잇서도 오년간 무임으로 잇스면 로회는 사직을 권고할 것이니라.”이다. 권고사직은 성직에 상당한 자격상 문제가 발생하고 성직의 결과가 심각하게 문제되거나 건강하다고 할지라도 5년간 무임목사로 지낸 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규칙이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1939년 12월 19일자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이 과연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냐는 하는 것은 상당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주기철 목사의 경우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권징조례와 장로회 정치에 있는 규칙을 살펴 볼 때 목사 면직과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다”는 것은 다르다.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다시 확인하면 다음과 같다:
 
“주기철 목사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이유로 교회헌법 권징 조례 19조에 의하여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43
 
“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담임목사직을 포함]를 권고 사직시키다”는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직에서 “권고사직시키다”는 의미로 봐야 할 것이다. 만약 권고사직과 면직이 같은 의미라고 한다면 평양노회 임시회는 면직시킨다고 결의해야하고 또 임시회록에도 그렇게 기록되었어야 맞다. 그것은 면직과 시무 사직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몇가지 점에서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 결정을 목사 면직으로 보기 힘들다고 본다.
첫째, 1939년 12월 19일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의 노회록이 면직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둘째, 장로회 권징조례와 정치에 따르면 면직과 사직은 분명히 다르다.
셋째, 주기철 목사의 경우 권징조례와 정치규례를 고려할 때 면직에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넷째,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그 다음날 1939년 12월 20일 보도한 당시 권위 있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그리고 〈매일신보〉도 면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평양노회 임시회가 산정현교회 시무 권고사직이 아니라 주기철 목사에 대해 목사면직을 결정했다는 기록은 해당 노회록도, 당시 권징조례 조문(면직과 권고 사직을 구분하고 있어)도, 그리고 당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보도한 일간신문도 지지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노회록도, 당시 장로교 권징조례와 정치규례도 그리고 신문보도 다 목사면직이 아니라 권고사직을 지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과연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를 “목사면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가 하는 것과 “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다”는 징계조문이 담고 있는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에 대한 징계를 “목사면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 한 가지는 1940년 1월 24일자 〈장로회보〉 7면에 있는 관련기록이다.
 
“평양노회구내 산정현교회 목사 주기철씨가 신사참배에 순응치 아니함은 소화 삼십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장로회 제 27회 총회 개회 모두에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므로 국민된 의무상 의당히 참배하기로 함’ 하고 결의한 신사에 위반이므로 작년말 즉 소화 14년 십이월 십오일[십구일] 평양노회 임시노회를 남문외 예배당에서 회집하고 노회장 최지화 목사의 사회하에 주목사에게 준열히 면직처분의 결의를 하였다.”44
 
평양노회 임시회가 주기철에 대한 징계를 내린 약 1개월 후 일제의 어용 기관지 〈장로회보〉는 평양노회가 주기철에 대해 “노회장 최지화 목사의 사회 하에 주목사에게 준열히 면직처분”을 내렸다고 보도하고 있다. “면직처분”이라는 말이 〈장로회보〉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징계 1달이 지난 뒤 〈장로회보〉가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면직처분”으로 보도한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해석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것은 당시 평양노회 임시회록의 기록이나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의 기록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사임”으로 〈조선일보〉는 “사직권고”로 〈매일신보〉는 “파면”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장로회보〉는 “면직처분”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징계를 게재한 〈장로회보〉는 1940년 1월 24일 제 1호 창간호로 발행한 어용 신문이다. 바로 이 창간호에 평양노회의 주기철 징계 기사가 실린 것이다. 교단의 소식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보다 일제의 식민지배의 도구로 쓰기 위해 만든 관제신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당시 일제에 편승한 기독교 문필가 오문환이 저작자로 발행한 〈장로회보〉 창간호에는 제 1면에 “황기 2천 6백년”이 사설 형식으로 헤드에 게재되었고 그 옆에 “국민정신총동원 총회연맹” 결성 소식을 알렸다. 8면으로 구성된 전체 신문 내용이 일제의 신사참배에 순응하는 장로교회를 만들기 위한 것임을 한 눈에 읽을 수 있다. 제 38회 평양노회에서 “〈장로회보〉를 의무로 구독하기로 함”을 결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45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대한 기사는 7면 “교계뉴쓰”란에 “교역자로 총회국가의식불응은 총회결의 정신 위반, 평양노회 축 면직 결의”라는 소제목하에 실렸다.
우리는 다음 몇가지 점에서 객관적으로 〈장로회보〉의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사료의 정확성 문제다. 〈장로회보〉는 불과 1개월 전에 열린 평양노회 임시회의 날자를 12월 15일로 오기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평양노회 임시회는 1939년 12월 19일에 열렸다. 불과 1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사건인데 주기철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다루면서 중요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날자를 오기한 것이다. 이것은 〈장로회보〉가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소식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된다. 자기가 듣거나 알고 있는 것에 기초해서 쓴 글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저작자 오문환이 쓴 것이라고 사료된다. 둘째, 위 글 중 제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을 기록한 내용에서도 의도적으로 편집한듯한 인상을 준다. 〈장로회보〉는 27회 총회의 결의를 “신사참배는 국민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므로 국민된 의무상 의당히 참배하기로 함”이라고 직접 인용표시를 하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정확한 기록은 아니다. 이는 아래 결정과 비교하면 분명하게 나타난다.
 
我等은 神社는 宗敎가 아니오, 基督敎의 敎理에 違反하지 않는 本 意를 理解하고 神社參拜가 愛國的 國家儀式임을 自覺하며, 또 이 에 神社參拜를 獨先勵行하고 追히 國民精神 總動員에 參加하여 非 常時局 下에서 통 후 皇國臣民으로서 赤誠을 다하기로 기함.
昭和 十三年 九月 十日 朝鮮예수敎長老會 總會長 洪澤麒
 
〈장로회보〉는 ‘종교가 아니다’는 말보다 국가의식을 앞세워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 내용의 순서도 바꾸었다. 게다가 “국민된 의무상”도 총회 결정 내용에는 없는 말이다.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을 풀어서 그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함축적인 표현이라고 이해하더라도 〈장로회보〉의 총회 결정 보도는 의도적으로 편집한 글이라는 인상을 준다. 불과 1개월 전에 일어난 평양노회 임시회의 개회 일자도 오기한데다 총회의 결의라고 직접 인용표시를 하고 인용 하면서도 정작 총회 결의내용을 변형하여 실고 있다.
셋째, 따라서 여기 〈장로회보〉가 “면직처분의 결의를 하였다”고 한 것은 노회록을 참고하여 기록했다기보다 다른 보도 내용이나 〈장로회보〉 기자[오문환] 자신이 이해하는 차원에서 기술한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에 순복하지 않는 자들은 앞으로 주기철 목사처럼 혹독한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장로교 목사들이 신사참배에 순응하도록 기자[오문환]가 일제의 입맛에 맞게 의도적으로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징계 내용을 편집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면직처분”이라는 〈장로회보〉의 기록의 신뢰성 문제는 더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평양노회 임시회록도, 그 다음날 임시 노회의 결정을 보도한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도 주기철 목사에 대해 “목사면직”으로 보도하거나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관련 기록을 종합적으로 살펴할 때 여기 〈장로회보〉의 “면직처분”이라는 말이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 자체를 면직시킨 것이라기 보다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직에서 파면시켰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사료된다. 그러므로 〈장로회보〉의 “주목사에게 준열히 면직처분의 결의를 하였다”는 기록 자체 만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확대하여 이에 근거하여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 결의(‘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다’)가 ‘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 권고사직시키다’가 아니라 주기철 목사에 대한 목사면직 결정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주지하듯이 총회와 노회의 결정이 무엇인가는 총회록과 노회록에 근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 내용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당시 산정현교회를 섬겼던 번하이젤 선교사의 편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번하이젤 선교사야 말로 노회, 교회, 일제당국(평양경찰서), 그리고 주기철에 대해 그만큼 깊이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고민한 사람도 드물기 때문이다. 1940년 1월 27일 번하이젤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경찰은 평양산정현교회 목사 시무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얼마전 강압적으로 임시노회(special meeting)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임시노회에 앞서 모든 노회원들이 경찰서로 불려가 임시노회가 무엇 때문에 열리는지를 말해주고 그것을 반대하는 표를 던지지 말도록 경고위협했습니다. 그래서 12월 19일 임시노회가 모였을 때 산정현교회 목사 시무에서 주 목사를 물러나게 하려는 의제가 올라왔습니다. 내가 일어나 그를 변호하였는데 금장을 하고 검을 찬 그곳에 참석한 여러 경찰 간부들과 30명 혹은 그보다 더 많은 경찰 간부들이 내게 앉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내가 계속 항의하자 세 명의 경찰이 나를 잡아채고는 나를 그 건물 밖으로 끌어내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경찰서로 연행했습니다. 그후 그 안건이 상정되었고 참석한 50명 혹은 그 이상되는 노회원들 가운데 8명이 찬성 표를 던졌고 한 명이 반대했습니다. 그 안건은 통과되었다고 노회장이 선언했고 주 목사는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반대표를 던진 한 사람은 곧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18일 동안 구류되었습니다. 그런 후 경찰은 산정현교회 당회원들을 불러 주기철 목사를 석방하면 그들이 삼개월 안에 그 목사를 산정현교회에서 물러나도록 동의해줄 것을 강요했습니다.”46
 
번하이젤은 12월 19일에 열린 평양노회 임시회에서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 시무에서 물러나도록 결정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번하이젤의 편지에 있는 대로 참석자 약 50여명 가운데 8명이 찬성표를 던졌고 1명이 반대표를 던졌다.47
 
 
그로부터 다시 3개월이 지난 1940년 3월 19일에서 22일까지 연화동교회에서 제38회 평양노회 정기노회가 열렸다. 선교사 4명, 목사 67명 그리고 장로 112명 합계 183명이 참석했다. 임원 개선이 있어 최지화가 노회장에 장운경이 부노회장에 피선되었다. 제 38회 평양노회 정기노회 주요안건 가운데는 18번째가 “산정현교회 전권위원”(장운경, 김선환, 심익현, 박응률, 이용직, 김취성 장로, 변경환 장로)이었다. 이들 일곱명의 전권위원들은 말 그대로 산정현교회 전반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았다. 번하이젤이 1940년 3월 26일자 편지에서 밝힌 것처럼 “이 전권위원회는 경찰서에서 신사참배와 신사복종의 탁월한 지지자들로 인정 받는 일곱명의 목회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전적인 염원은 산정현교회가 정부의 신사참배의 시책을 따르게 하고 신사참배를 하는 목사를 임직시켜 산정현교회가 용기 있게 행하고 있는 일들을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다.”48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가 주기철 목사를 시무에서 권고사직시키고 임명한 당회장으로 임명한 이인식 목사가 여러번 산정현교회 당회를 소집하려고 했지만 장로들이 응하지 않고 만약 필요하면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당회장의 직책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인식 목사는 노회에 이를 보고하였고, 노회가 산정현교회 모든 장로들을 일시적으로 정직시켰다.49
참고로 당시 열린 제 38회 노회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면도 “목사직 사면”과 “목사시무사면”을 별개의 항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우석의 “목사직 사면”과 미림교회 김선환, 서문밖교회 임종순, 하리 황강리 봉래리교회 김의창, 벽지도교회 우성욱의 “목사시무사면”을 38회 평양노회 정기노회의 주요 안건으로 처리하면서 목사직 사면과 목사시무사면을 별개의 항으로 노회록에 기록하고 있어 “목사직 사면”과 “목사시무사면”이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50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과 관련하여 번하이젤 선교사는 1940년 3월 26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미국에 보냈다.
 
해 [평양] 노회가 위에서 언급된 날짜[1940년 3월 19-22일]에 [연화동교회에서] 소집되었고, 그 회의는 그곳에 있는 경찰에 의해 강제적으로 지배를 당했습니다. 노회원들이 생각하건대, 12월 19일에 열린 평양노회 임시회의에서 경찰이 강제적으로 노회로 하여금 주목사를 산정현교회 목사직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안건을 통과시키게 했습니다. 노회장이 교회 제직들에게 그 되어진 것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 안건이 주 목사가 그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직에서 파면된(deposed)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노회 임원들은 순순히 동의했으며, 인쇄된 3월 정기 노회 노회원 명단에는 주 목사 이름이 빠져 있었습니다. 노회는 감히 그 안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주 목사를 그 목사직에서 파면하는 안은 통과되었습니다.51
 
번하이젤은 목사직에서 파면되었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여기 목사직에서 파면되었다는 말이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에서 파면되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 자체를 면직시켰다는 말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파면되었다는 말이 앞서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에서의 주기철 목사의 결정과 관련하여 보도된 〈매일신보〉 기사처럼 산정현교회 시무 사면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목사직에서의 면직을 의미하는 것인지하는 것이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노회의 결정과 관련하여 번하이젤의 편지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위 편지 내용에서의 파면은 바로 그 앞에 언급된 “강제적으로 주목사를 산정현교회 목사직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안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1939년 12월 19일 남문외 교회당에서 열린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는 “목사 면직”이 아니라 당시 평양노회 임시회 촬요에 명시된 그 대로 “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로 이해하는 것이 당시의 신문보도, 번하이젤 선교사의 편지, 그리고 당시의 권징조례나 장로회 정치 규례와도 일치한다. 노회록을 살펴볼 때 1940년 3월 19일-22일까지 연화동교회에서 열린 제 38회 평양노회 정기노회에서는 12월 19일의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에 대한 어떤 평가나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총회의 결정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근거가 총회록이듯 이 노회의 결정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노회록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그 외 당시 여타 신문 보도들과 기타 자료들을 참고해야 하지만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당시의 평양노회 임시회록이다. 주지하듯이 당시 평양 노회록 임시회록은 주기철의 목사면직이 아니라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킨 것이다.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 결정 기록과 서지학적 검토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 내용에 대한 이해가 후대에 와서 평양노회 임시회록의 기록과 달리 면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는가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기철 목사에 대한 역사사료적, 서지학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저항운동과 순교에 대한 논고와 저술은 1950년부터 꾸준하게 출간되었다. 1950년대 주기철 목사에 대한 두 편의 저술이 출간되었다. 하나는 안용준의 〈태양신과 싸운 이들〉(부산: 칼빈문화사, 1956)이고 다른 하나는 김인서의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부산: 신앙생활사, 1958)이다. 전자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들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그들의 신사참배 저항을 기술하면서 그 첫 번째로 “진리운동의 선구자 주기철 목사와 그 부인”을 다루었다. 여기서 안용준은 평양노회 임시회에서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후 주목사님은 여전하게 여일하게 신앙투쟁을 계속하시니 시국이 자꾸 악화되여 감을 따라 국민지도상 사상통일의 필요가 긴박한 당국은 이제는 더 주 목사님을 사회에 둘 수 없었고 또 한편 황민화(황민화) 운동을 인식하여 종교보국에 나선 지도자들은 신앙사수 보담도 교회 사수를 빙자하고 당국에 호응해서 이런 일에 적극 협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 3차로 검속을 하려는데는 이제부터는 아조 혹독하게 모든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었다. 첫째로 주목사님에게 산정현교회 사면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내 입으로는 사면한다는 말은 못하겠다고 강경히 반대하시었다. 둘째로 교회 제직이나 교인들을 유혹해서 주목사님을 파면시키도록 하였으나 이 역시 전체교회 교인이 반대하였다. 그러고 보니 셋째 노회에서 전권위원 7인을 파송해서 주목사가 없으니 노회에서 파송받은 대표가 이 교회를 감독하겠다고 강제 억압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는 마침 1940년 3월 23일 부활주일이었는데 그들이 와서 말하기를
1) 주목사는 파면시키고
2) 동사목사 편하설 선교사는 금단시키고
3) 일곱 장노님들은 정지시키고
4) 당회장은 노회에서 택하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날 예배를 집행하겠다고 소위 위원장이라는 장모 목사가 등단하는 것을 양재연 집사가 나서서 제 204장 찬송가를 부르자고 하여 예배집행을 반대하였는데 이 까닭에 벌써 포위하고 있던 사복형사들에게 남녀 삼십명이 검속을 당하였으나 이 반대를 진압시키지는 못했다. 그 때 채정민 목사님도 검속을 당하여 사십일동안 구류를 당하셨다는 것이다.52
 
안용준은 1940년 3월 19-22일에 열린 제 38회 평양노회에서 신학계속 허락을 받은 인물이라 평양노회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안용준의 위 기록은 주기철에 대한 2차 자료로 후대 작품들에 많이 인용되어 왔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안용준은 1939년 12월 19일에 열린 평양노회 임시회 결정, 이듬해 3월 19-22일에 열린 제 38회 평양노회 결정,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후에 있었던 부활절 주일날 일어난 사건을 혼돈하고 있다. 둘째, 그가 제시한 4가지 사항 가운데 1항과 4항은 1939년 12월 임시노회에서 결정된 사항이지만 내용이 다르다. 셋째, 2항과 3항은 임시노회 이후에 결정된 것이다. 2년 후 김인서가 기술한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는 안용준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약간 다르다.
 
평양노회의 주 목사 파면
악독한 일제 당국은 주목사를 잡아 가두고도 유위부족하여 목사 사면서를 강요하여 두들겼다. 그러나 주목사는 〈나는 목사의 성직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그만 두라기 전에는 절대로 사면할 수 없다〉고 뻗치었다. 이에 궁한 일제 경찰당국은 평양노회장 최지화 목사를 불러 〈주 목사를 파면하라〉고 엄명하니 최 목사는 하는 수 없이 주 목사를 면회하고 〈주 목사가 사면하면 주목사도 평안해지고 산정재교회도 평안해지고 평양노회도 평안해지겠으니 제발 사면해주시오〉 간청하였다. 그러나 주 목사는 〈내 목사의 성직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그만 두라 하시기 전에는 사면 못합니다.〉 평양노회장은 여러 번 주목사를 면회하고 여러번 간청했으나 주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당신들 말을 듣는 것이 어느 것이 옳겠습니까?〉 더 강경하여졌다. 평양노회는 남문외예배당에 회집하여
1, 주기철 목사는 파면함
2, 편하설 선교사가 산정재 강단에 서는 것을 금지함
3, OOO 목사를 산정재교회 당회장으로 택함
4, 산정재교회 수습위원으로 장운경 목사, 박응률 목사, 이인식 목사 등 7인을 택함.
‘주기철 목사’를 파면 결정할 때 우성옥 목사 〈아니오〉 소리치고 검속당했고 편하설 선교사 불법노회요 소리쳤다. 산정재 박정익 장로 이것은 노회 아니오 하고 퇴장하였다.53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의 권징과 관련된 안용준과 김인서의 내용이 1939년 12월 19일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의 기록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들이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의 기록을 근거하지 않고 여러 기록들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전쟁 등 사회적 혼란으로 평양노회록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증언이나 여타 다른 것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이들 두 사람의 기록을 당시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록이나 이어 열린 제 38회 평양노회록, 그리고 관련 자료들의 기록들을 비교 검토할 때 기록상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1939년 12월 19일 남문외교회당에서 열린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에서는 당시 노회촬요에 있듯이 안용준이 제시한 4가지 중에서 1항과 4항에 대한 결정만 했다. 게다가 기록상의 오류도 눈에 띤다. 안용준은 “당회장은 노회에서 택하겠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평양노회 임시회록 촬요는 “이인식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인서가 4항에서 말한 수습위원은 전권위원으로 수정해야 한다. 그리고 제 1항의 “주기철은 그 목사직에서 파면함”은 평양노회 임시회록의 내용이 아니라 당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보도한 1939년 1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기사(‘문제의 목사는 파면코)’이다.
안용준이 “주목사는 파면시키고”라고 한 것을 김인서는 “주기철 목사를 파면함”이라고 기록하고 잠시 후 “주기철 목사를 파면한 평양노회”라고 함으로써 주기철에 대한 평양노회의 징계를 목사 파면으로 기록하고 있다. 안용준이나 김인서 모두 “목사 파면”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목사면직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안용준과 김인서의 책이 출간된 후 이들 서적들은 주기철 목사에 대한 권위 있는 글로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이후 출간된 주기철 목사에 대한 저술의 중요한 방향을 결정했다. 여러 저술들에 나타난 주기철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 내용은 안용준과 김인서의 책에 있는 내용이 거의 그대로 반복 기술되고 있다.
1968년에 출간된 박용규 목사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전기 〈저 높은 곳을 향하여〉와 그로부터 2년후에 출간된 1970년 김충남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생애〉는 물론 그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에 출간된 주기철 저서에서도 안용준과 김인서의 내용은 거의 반복되어 인용되고 있다. 박용규 목사의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평양에는 조선 총독부는 물론 내각에까지 직통하는 어머어마한 기독교 친목회라는 단체가 있었다. … 모든 기독교회의 일은 평양기독교 친목회라는 간판을 건 그 장소에서 역사되었던 것이다. 물론 27회 총회 신사참배 가결이라든지 주기철 목사 파면하던 평양노회도 이 간판 밑에서 이루어졌다. … 평양서문외 교회는 노회 개회시부터 어수선하고 살기가 있어 무섭기까지 하였다. 모여든 노회원 가운데는 주목사 파면을 가할 회원과 반대요 할 회원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1941년 3월 20일(?)은 평양노회가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한 불신앙으로 소집된 노회이며 일본 총독부의 앞잡이 노릇하는 평양친목회의 일방적인 처사가 진행된 노회였다. 평양노회가 가결한 4가지 역사적인 사건은,
① 주 목사를 파면함
② 동역 목사 편하설 선교사는 산정현교회에 금단한다.
③ 칠장로는 장로직 정지함
④ 당회장은 노회에서 선택하고 수습위원 칠인을 택정함. (장운경 목사, 이인식 목사, 박응률 목사, 심익현 목사, 김선한 목사, 변OO 장로와 김OO 장로)
이 4가지 안건이 통과될 때에 노회의 광경은 어떻게 하였는지?! 평양노회에서 통과된 4가지 안건이 결정될 때 회장이 가하면 예하시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시오 하니까, “아니요”한 목사는 우성옥 목사였으니 우 목사는 즉시로 구속당하여 경찰서로 갔고, 편하설 선교사는 “불법이요” 소리 소리 지르면서 울었고, 산정현교회 박정익 장로는 ‘불법노회요, 불법노회“하면서 퇴장하였으며 여기저기서 방청하던 교인 목사들이슬피 울며 자리를 움직일 줄 몰랐으니 마치 옛날 국상이라도 난 것 같이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54
 
박용규 목사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968〉의 기록은 안용준의 기록과 김인서의 기록을 참고하여 현장감 있게 종합진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기록은 안용준의 기록과도 약간 다르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는 “당회장은 노회에서 선택하고”라는 기록은 있지만 이인식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택했다는 기록이 생략되었다. 또한 박용규 목사는 노회 결정이 있은 후 편하설이 불법이요 소리소리 지르면서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확한 기록은 아니다. 번하이젤이 자신의 편지에서 밝힌 대로 임시노회 석상에서 정치조례 1장 7조를 들어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를 반대하자 경찰들이 강제적으로 경찰서로 끌려가 평양노회 임시회가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를 결정할 때 정작 그 현장에 번하이젤은 없었다.
김충남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생애, 1970〉에 있는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 기록은 김인서의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에 있는 내용들을 그대로 인용하였다.55
 
1, 주기철 목사는 파면함
2, 편하설 선교사가 산정재 강단에 서는 것을 금지함
3, OOO 목사를 산정재교회 당회장으로 택함
4, 산정재교회 수습위원으로 장운경 목사, 박응률 목사, 이인식 목사 등 7인을 택함.56
 
민경배 교수도 1985년에 간행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에서 “평양노회의 주기철 목사 처결”이라는 제목으로 기술하면서 “일경은 그에게 목사 사면을 자퇴 형식으로 강요하였다…. 이에 일제는 한국교회에 의한 주기철의 목사 파직을 강행하려 하였다. 그래서 주기철이 속한 평양노회의 노회장 최지화를 협박해서 주기철의 목사 해직을 요구하였다. … 그 진리의 파수꾼에게 목사직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다.”57 그리고 나서 민경배는 1939년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으로 5가지를 제시하였다.
 
1) 주기철은 그 목사직에서 파면함
2) 편하설 선교사가 산정현 강단에 서는 것을 금지함
3) 장운경을 산정재교회 당회장으로 택함
4) 일곱장로들을 정직함
5) 산정재교회 수습위원으로 장운경 목사, 박응률 목사, 심익현, 김선한, 이인식 등 7인을 택함.58
 
민경배는 그 출처를 안용준과 김인서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1항, 2항, 4항은 안용준에게서 나온 것이고 3항과 5항은 김인서에서 인용한 것으로 두 사람의 것을 종합한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평양노회 임시회에서는 이인식을 당회장으로 택했지 장운경을 산정재교회 당회장으로 택했다는 기록은 어느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다.
안용준, 김인서, 박용규 목사, 김충남, 민경배 모두 저술에 있는 관련 내용들을 면밀히 살며보면 앞서 기술된 안용준이나 김인서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재진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1939년 12월 19일에 있었던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결정을 기록하면서 이들 가운데 누구도 평양노회 임시회의록의 기록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주목할 사실은 이들 모두가 1939년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를 “파면” “목사해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목사면직”이라는 용어는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전기들 가운데 “목사면직”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와서이다. 그 출발은 1992년 김요나 목사의 〈일사각오〉가 출간되면서부터이다. 김요나는 “주목사 면직”이라는 소제목으로 주기철의 목사면직을 기정사실로 하고 글을 써내려갔다.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주 목사 면직하다. 일제당국은 … 교회법(헌법)을 이용하여 목사 파면을 노회로 하여금 단행하도록 하는 그 방향에서 해결 방법을 모색키로 했다.”59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김요나가 처음으로 “목사면직”이라는 말을 언급하면서 이후의 저술들은 거의 다 “목사면직”으로 단정하고 받아들였다. 2002년에 출간된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에서 이덕주는 목사면직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대신 “평양노회의 목사 파면”이라는 소제목으로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다루었다. 하지만 이덕주는 자신의 논문에서 노회장 최지화 사회 하에서 남문외 교회당에서 개최된 평양노회 임시노회 결정을 보도한 1940년 1월 24일 〈장로회보〉 기사(“주기철에게 준열히 면직처분의 결의를 하였다”)60를 인용하였다. 김요나는 직접 “목사면직”이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이덕주는 비록 “목사파면”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임시회록의 결정이 무엇인지 직접 인용이나 언급 없이 “면직처분”이라고 명시한 〈장로회보〉를 인용하여 마치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에서 주기철 목사에 대해 목사면직 결정을 내린 것처럼 글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평양노회에서의 주기철에 대한 징계가 김요나와 이덕주를 거쳐오면서 “목사면직”으로 완전히 정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006년 봄 한국교회에서는 가장 먼저 예장 통합이 소속 평양노회를 통해 주기철 목사 복권을 결정하고 예배를 드릴 때 김인수 교수는 이덕주의 연구를 그대로 수용하여 “평양노회 주기철 목사의 면직 결의”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고 평양노회를 이 사실에 근거하여 절차를 진행했다. 이 때 김인수는 이덕주가 인용한 〈장로회보〉 기사를 재 인용하여 “파면”과 “면직”을 동의어로 사용하였다.61 이렇게 해서 김요나, 이덕주, 김인수 모두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목사면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노회가 과연 어떤 결정을 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 노회록을 근거로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김요나, 이덕주, 김인수 모두 평양노회 임시회록을 근거하지 않았다.
 
 
그동안 한국교회사 연구를 위해 많은 족적을 남긴 동료 교수들이나 선대 목회자들을 폄하하거나 비판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것은 그들이 한국교회사 연구에 많은 족적을 남긴 것을 평소 높이 평가하고 감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주기철 목사에 대한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에 대한 부분에서 그동안의 선행연구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또 이 부분의 연구에서 필자도 동일한 실수를 했던 사실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필자 역시 〈한국교회를 깨운 산정현교회〉(서울: 생명의말씀사, 2006)를 저술하면서 노회록을 직접 인용했지만 그 노회의 결정이 과연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킨 것인지 목사직 자체를 면직시킨 것인지를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록을 근거하여 면밀히 살피지 못한 동일한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록의 기록은 물론 당시 관련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면 주기철에 대한 징계 결정이 “목사면직”이 아니라 임시회록에 있는 대로 “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다”가 맞다고 본다. 당시 1940년 1월 24일자 〈장로회보〉를 제외한 당시의 모든 기록들이나 번하이젤 선교사의 편지도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주기철 목사에 대한 복직과 복권 움직임이 예장통합에 이어 예장합동 교단 안에서도 일고 있는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면서도 차제에 좀 더 정확성을 기하기위해서 주기철 목사에 대한 1938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이 산정현교회 시무(담임목사직, 당회장)에서의 “권고사직”인지 아니면 목사직 자체에 대한 목사 면직이었는지를 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면밀하게 검토할 것을 겸손히 제언하고 싶다.62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이 주기철 목사의 목사면직이 아니라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킨 결정이었다고 해도 과거 평양노회가 범한 행위에 대해 우호적인 자세를 가지거나 동정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다음을 고려할 때 그 이유는 명백하다.
첫째,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 결정은 1938년 9월 제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의 연장 선에서 나온 배도의 행위였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의 근거 사유가 바로 전해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이었고, 그 배도행위의 주범인 홍택기가 총회장의 직권으로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에 따라 전국의 목회자들에게 신사에 참배할 것을 명하는 공문지시에 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평양노회 임시회가 주기철 목사를 징계한 것은 심각한 배도행위가 아닐 수 없다.
둘째, 일제의 압력에 의해 할 수 없이 순복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직전 부노회장이었던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 시무를 원천 봉쇄시키고 1938년 제 27회 총회 총대 명단과 이어 열린 제 38회 평양노회 노회 명부에서도 주기철의 이름을 빼버린 것은 같은 노회원 목사, 그것도 순교를 각오하고 진리를 지키려는 목회자를 십자가에 두 번 못박는 너무도 비 신앙적이고 비윤리적인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게다가 평양노회가 이 정도의 결정으로 멈추지 않고 평양산정현교회를 폐쇄시키고 주기철과 오정모가 구속된 상태에서 노모와 어린 자녀들을 밖으로 내 보내고 사택까지 빼앗은 행위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일제의 사주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평양노회가 이 일을 주도했다는 사실, 그것도 1939년 친일 어용신학교로 새로 복교한 평양신학교의 교장 사택(교장 채필근)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면 부끄러워 머리를 들 수 없다.
1939년 12월 20일, 평양노회가 참으로 부끄러운 결정을 한 그 다음날 번하이젤은 “노회의 비겁한 행동은 영원한 수치”라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교회를 폐쇄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결정이 내려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산정현교회 당회장이 새로 임명되었습니다. … 평양노회 임시회가 정회한 후 검을 찬 금줄의 경찰간부와 부하들이 소속 경찰서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내가 노회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영어로 진술서를 쓰라고 요구 받았습니다. 나는 진술서를 썼고 그런 후 집으로 돌아가도 되고, 그들은 그 문제를 숙고하고 며칠 안에 나를 다시 부를 수도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교회 폐쇄 명령이 내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한 목사를 청빙하도록 온갖 노력들이 진행될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경찰이 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주기철 씨는 확실히 대의적으로 순교자입니다. 노회의 비겁한 행동은 영원한 수치입니다. 노회원들은 경찰의 화를 기꺼히 직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이 개인적인 체험을 했거나 전해들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교인들이 이 중차대한 신사문제에 굴복하기보다 차라리 예배당 문들을 닫는 쪽을 결정하기를 희망합니다.63
 
평양노회 임시회가 열려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에서 쫓아내는 결정을 내린 그 다음날 번하이젤은 자신의 편지를 통해 그의 심정을 솔직하게 밝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그는 주기철을 이미 순교자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기철의 일거수 일투족을 온 몸으로 느끼며 지켜본 번하이젤이 살아 있는 주기철에게 순교자의 칭호를 붙였다는 것은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둘째, 반면 평양노회의 비겁한 행동이 영원한 수치라는 사실도 동시에 천명한 것이다. 신사참배가 분명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행위인데 동조하거나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를 목회 현장에서 쫓아낸다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며 “영원한 수치”라고 본 것이다. 셋째, 앞으로 다가올 시련을 예측할 수 없지만 번하이젤은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하는 쪽을 택하기보다 차라리 교회를 폐쇄하는 쪽을 택하기를 희망한 것이다. 순교자 주기철과 온 성도들이 하나되어 진리의 길을 따라 하나님과 역사 앞에 서기를 소망한 것이다.
이미 방계성 전도사도 구속된 상황에서 산정현교회 주일 강단을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번하이젤 뿐이었다. 그는 그런 방향으로 산정현교회를 이끌어갔고 또 산정현교회 당회와 온 성도들은 그의 희망대로 그런 방향으로 움직여 나갔다. 그는 평양경찰서로부터 산정현교회에서 손을 떼라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받았지만 산정현교회 강단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당회원들도 번하이젤 선교사가 계속해서 강단을 지키며 교회를 이끌어 주길 원했다. 그는 주일 오전 예배를 인도하고, 그 외 다른 예배는 당회원들에게 맡겼다. 그가 1939년 12월 29일 보낸 편지에는 산정현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과 결심이 얼마나 강렬하고 높았는지를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앞으로의 전망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어둡습니다. 경찰은 내게 당분간 산정현교회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이라는 말은 곧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한 목사를 청빙할 때까지 그들이 압력을 가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어제 우리 집에 교회 제직들을 불러서 다시 그들과 함께 현 상황을 점검했습니다. 나는 단지 주일 오전예배만 맡고 나머지 예배는 당회원들이 맡으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희망합니다만 전혀 하지 못하게 될지로 모르겠습니다. 나는 교회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이런 어려운 곤경의 때, 특별히 목사들과 전도사 모두가 감옥에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제 저들은 경찰의 뜻대로 일이 성취되도록 산정현교회를 무너트리기 위해 나를 제거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64
 
주기철은 옥중에서 산정현교회와 조국교회를 위해 생명을 담보로 기도하고, 온 교우들은 그와 하나 되어 일제에 맞섰으며, 번하이젤은 담임목사의 빈 자리를 충실하게 메꾸며 산정현교회를 섬기는 것을 일종의 거룩한 소명으로 여겼다. 일제는 그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같은 산정현교회 위기 속에서 번하이젤이 미국시민권자로 한 교회를 맡아 강단을 지키며 교우들을 독려한 것은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였다. 주기철도 대단했지만 번하이젤도 선교사 이전에 참으로 대단한 신앙인이었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한 달이 지난 1940년 1월 번하이셀이 보낸 편지에는 그의 단호한 결단이 여과 없이 담겨있다:
 
경찰은 목사와 전도사를 체포하고는 나 또한 교회에서 제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것은 만약 세 사람 모두 교회에서 제거한다면 교회가 강압에 못이겨 신사에 대표자를 파송하고 또한 신사참배를 한 목사를 초청할 것이라고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내가 산정현교회에 있는 한 그들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경찰서로 불러서는 경찰의 뜻대로 산정현교회가 이루어 질 때까지 그 교회와의 관계를 끊어주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평소대로 계속 산정현교회 주일 강단을 섬겼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 주 그들은 다시 나를 불러 만약 내가 또 다시 그 교회에서 설교한다면 나를 벌주거나 추방시키겠다고 경고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 평양선교회의 동료 선교사의 조언에 따라 나는 주일예배 인도를 한국인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일 나는 평소대로 말씀을 전했는데 그러자 곧 나를 경찰서로 소환해서는 꾸짖고 경고했습니다. 동일한 일이 그 다음 주일에도 발생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주일 나는 몸이 아파 교회에 갈 수 없어 나의 친구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를 대신 보냈습니다. 이것 또한 경찰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그들은 어떤 선교사도 그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때부터 매 주일 강단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나를 경찰서로 소환하는 일을 그쳤지만 여러 차례 형사들을 내게 보내서는 내게 불만을 토로하고 경고했습니다.65
 
번하이젤은 그 매섭고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일제의 강압에 굴하지 않고 산정현 교회를 굳굳하게 지켜 나간 것이다. 북장로선교회 평양선교부 회원들 모두가 번하이젤을 전폭지지하고 그와 뜻을 같이했다. 그는 자주 그들과 상의하며 산정현교회가 나갈 방향을 논의했다.66
 
4. 산정현교회 폐쇄와 신사참배 저항운동
이후 상황은 급속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권고 사직을 결정한 평양노회는 그 정도의 배도에서 멈추지 않았다. 1940년 3월 제 38회 평양노회는 일제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가지며 주기철과 산정현교회를 더 한층 강하게 압박했다. 평양노회는 산정현교회 모든 장로들을 정직시키고 전권위원 7인을 임명하여 산정현교회 전권을 위임 번하이젤을 더 한층 강하게 압박했다. 노회의 결정은 번하이젤이 산정현교회와 완전히 손을 끊도록 하려는 강한 의도였다. 번하이젤은 교회 제직들과 논의하고 1940년 3월 24일 부활주일 강단에 서지 않기로 결정했다.67
 
나는 더 이상 산정현교회와 관계를 가질 수 없게 되었고 그 이후 전권위원회가 교회의 모든 책임을 맡았습니다. 나는 산정현교회 제직 몇 사람과 그 문제를 이야기하고 … 나는 내가 부활주일 강단에 서지 않고 그 일을 전적으로 7인 전권위원회에 맡겨야 할 것 같다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68
 
“밝고 맑고 영광스런 부활주일이 도래했고,” 번하이젤은 그로부터 이틀 후 1940년 3월 26자 편지에서 이날 일어난 상황을 소상하게 적어서 미국해외선교부에 보냈다. 바로 이날 부활주일 오전 11시 일제의 꼭두각시 역할을 한 평양노회가 파송한 7인 전권위원들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마치 행진을 하듯 산정현교회당 안으로 들이닥쳤다.69 이들이 교회당 안으로 들어와 잠시동안 앉아 있을 때 양재연(梁在演) 집사가 단으로 올라가 찬송 한 장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곳에 모인 600명 혹은 그 이상의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그 찬송을 불렀다. 찬송 마지막 절이 끝나자 양재연 집사는 회중들에게 찬송 20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부르자고 요청했고, 전체 성도들이 양 집사를 따라 그 찬송을 온 힘을 다해 불렀다. 회중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 마지막 절을 끝내면 양 집사는 1절부터 다시 부르기 시작하였고 교인들은 따라 불렀다. 그런 식으로 양재연 집사와 온 교우들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불렀다.70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은 1529년 2월 신성로마제국 칼 5세가 프러시아 제후국들이 로마 가톨릭 식으로 예배를 드릴 것을 강요하자 독일종교개혁의 선구자 마르틴 루터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담대히 나가 싸울 것을 독려하기 위해 만든 찬송이었다. 이날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소리가 계속해서 산정현교회당 안에 메아리쳤다:
 
1.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2.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3.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루터가 개혁의 기치를 높이며 불렀던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은 돌이켜 보면 폐쇄 위기에 처한 산정현교회 상황에서 너무도 적절한 찬송이었다. 마치 성령께서 온 회중들을 인도하신 것 같았다. 회중은 세상의 권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두려움도 잊은 채 오직 하늘 아버지만 바라보고 그만 섬기겠다는 결단을 찬송으로 승화시켜 표현했다. 타락한 교권에 맞서고 그 교권을 앞세워 민중을 농락하는 중세 로마가톨릭의 부패에 맞서 절대권력에 전혀 아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담대하게 나갔던 마틴 루터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날 온 교우들은 찬송소리와 함께 신사참배반대의 봉화불을 하늘 높이 올려 보냈다.
양집사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 1절을 부를 때 3명의 전권위원들이 강단에 올라가 설교단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71 양집사를 따라 온 교우들이 찬송을 계속부르자 약 20분이 지났을 때 그 중의 한 사람이 이제 예배를 드릴 시간이니 찬송을 중단하라고 양집사에게 요청했다. 그런데도 양집사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찬송을 인도했다. 그러자 잠시 후 한 경찰이 단에 올라가 양집사에게 그만하라고 강하게 명령했다. 그런데도 그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찬송을 부르자 그 경찰이 다른 경찰을 불렀고 두 사람이 단에 올라 양 집사를 단에서 끌어내려 후문을 통해 교회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가 경찰서로 연행했다. 그후에 평양노회장이 일어나 손을 흔들며 조용히 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온 회중은 그가 손을 흔들면 흔들수록 더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 그런 후 또 다른 전권 위원 목사가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고는 그와 다른 전권위원들이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지만 산정현교회 온 회중들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계속해서 큰 소리로 불렀다. 그리고 이어 또 다른 전권위원과 다른 전권위원들이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교인들은 계속해서 찬송을 불렀다.72
그런 후 다른 목사가 일어나 그 성경을 읽고 팔을 격렬하게 흔들며 조용히 할 것을 주문했지만 찬송소리에 뭍혀져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설교도 시도했지만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 소리에 잠겨 버렸다. 필자는 인류 역사상 이런 저항이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필자의 상식으로는 이런 용기와 저항은 기독교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당황한 일경들은 병력지원을 긴급 요청했고 곧 바로 경찰들이 산정현교회당으로 들이닥쳐 교인들에게서 찬송가를 강제로 빼앗고 닥치는 대로 그들을 구타했다. 그런데도 극렬하게 대들거나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의 이름과 주소를 조사하고 명단을 작성했다. 시간이 지나 이렇게 예배는 마쳤다. 단에 올라갔던 3명의 목회자들은 전혀 예배를 인도할 수도 자신들의 의도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이들은 예배가 끝날 즈음 “부끄럽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강단 아래로 내려왔고 청중들은 해산하기 시작했다.73
번하이젤 여사 헬렌은 너무도 소중하고 거룩한 부활주일이 평양노회와 경찰들의 방해로 인해 제대로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혼란스럽게 끝난 것과 그 과정에서 진행된 일련의 충격으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한 경찰이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경찰이 왜 여기에 앉아 있으냐고 그녀에게 말하자 헬렌은 “당신은 나를 감시하러 여기 왔느냐?” “나는 지난 35년 동안 내가 이곳에서 행한 대로 예배를 드리러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경찰은 “예배가 이제 끝났다, 그러니 너는 가야 한다.”고 경고했다. 내가 주일학교 교장으로 여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화가 난 경찰이 2-3명의 동료 경찰들을 불러서는 그녀를 강제적으로 잡아채고는 바닥에 쓰러트리고 발로 차고 발로 짓누른 후 교회당 정문 쪽으로 끌어냈다. 그녀는 허리를 다쳤고 어깨에 찰과상을 입었고 신경이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날 남자장년주일학교는 모이지 못했고 여자들도 평소의 3분의 1 정도인 약 100만 참석했지만 정상적으로 가질 수 없었다. 교회를 나오면서 그녀는 노회가 파송한 전권위원 가운데 2명을 만났을 때 그 부끄러운 행동을 노회 이름으로 할 수 있었는지 그들이 한 행위를 나무랐다. 반하이젤이 3월 26일 자 편지에서 밝힌 것처럼 24일 부활절날 오후 장로 한 사람과 5명의 남자, 여자 6, 7명이 체포되었고 주기철 사모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번하이젤이 편지를 쓰던 26일까지 풀려나지 못했다고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연행된 숫자가 〈동아일보〉는 30명이라고 보도했다.74 산정현교회당이 폐쇄당한 것은 바로 1940년 3월 24일 부활절 오후였다. 번하이젤은 이렇게 편지에서 밝혔다:
 
[부활절] 주일 오후 4시 전권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경찰 한 명을 대동하고 산정현교회에 나타나서는 교회당 열쇠를 확보하고는 모든 교회문을 잠그고는 산정현교회 집회는 노회 전권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당분간 정지한다는 경고장(“금반 형편에 의하여 당분간 산정현교회 집회를 정지함”)을 붙였습니다. 경찰은 평양노회를 통해 모든 일들을 집행하고는 그에 대해서 자신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고 공언했습니다. 확실히 일경과 그 하속들, 일곱명의 전권위원회는 교회를 괴멸하고 혼란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들을 강제적으로 배도의 과정으로 이끌려는 시도에 순복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진리와 신앙의 자유에 대한 간절한 열망에 대한 그들의 증언이 공개적으로 아주 분명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된 신앙을 타협하기 보다 새로 지은 자신들의 아름다운 교회 건물을 폐쇄하도록 하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75
 
평양노회와 주기철의 산정현교회가 너무도 극명하게 다른 노선을 걷고 있었다. 하나님과 역사 앞에 선 이들과 자신들의 보신을 생각하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순응하며 타협의 길을 걸어간 한국교회가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1938년 신사참배를 결정한 한국장로교회가 신앙의 정통성을 상실한 차원을 넘어 얼마나 배도의 길을 걸어갔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1907년 사도행전 이후 가장 놀라운 성령의 역사라고 평가하는 평양대부흥운동이 임했던 평양이 이제는 배도의 성, 바벨성으로 변한 것이다. 평양노회가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주기철 목사의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더니 이제는 그가 담임목사로 섬겨온 산정현교회마저 폐쇄한 것이다. 평양지역을 대변하는 평양노회가 평양대부흥운동의 그 놀라운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은혜를 배도로 갚은 것이다. 오늘날 평양이 지구상의 가장 어두운 곳, 세상이 조롱하는 곳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양노회의 배도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교회가 폐쇄된지 약 2주 후 아버지 주기철 목사와 어머니 오정모 사모가 투옥된 상태에서 평양노회 소속 두 사람의 목사와 열 다섯명의 형사가 주기철 목사 사택에 들이닥쳐 주광조, 주영해, 노모를 집밖으로 끌어냈다. 주광조는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두 목사님은 주머니에 쪽지를 하나 끄집어내어 읽고서는 그것을 두 아들에게 주었다. 그 쪽지는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에서 파면당해 이제 목사도 아니니 목사관에 있을 자격도 없고 평양노회에서 이 목사관을 평양신학교 교수 사택으로 전용하기로 했으니 오늘 당장 나가 달라.’는 이른바 ‘목사관 전도 명령서’였다.76
 
노모가 ‘하나님이 주신 집인데 주 목사가 와서 같이 나가자고 하기 전에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소리치자 형사 한 사람이 노모를 번쩍 안아다가 대문 밖에다 내팽겨쳤다. 그 추운 겨울, 집을 잃어버린 노모와 두 아들은 헛간에서 사흘을 보내고 길거리로 쫓겨나고 말았다. 주기철의 가족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13번이나 집을 옮겨 다녀야 했고, 영진은 염전과 탄광을 전전해야만 했고, 영해와 광조는 동방요배 거부로 숭덕학교에서 쫓겨나 킨슬러 목사가 경영하는 성경구락부에 다녀야 했다.
이런 혹독한 시련 가운데서도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산정현교회 폐쇄] 그 후 교인들은 지하교회를 형성하여 낮이면 채정민 목사의 집에서, 밤이면 이인재 전도사의 집에 모여 예배를 계속하였다. 또한 유년부 어린이들은 정낙선 집사의 집에 모여 주일학교 교육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일경은 이러한 지하교회도 단속을 늦추지 않았고 소규모의 모임조차 허용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 중에 백인숙 전도사는 계속해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였고 전교인을 거주 구역별로 일곱 구역을 나누어 매일 한 구역씩 돌아가며 예배를 인도하였다.”77 방계성 장로의 아내 박분옥과 백인숙 전도사, 오정모 사모는 매일 심방하며 교인들을 독려했다. 매주일 20-40명이 오정모 사모와 함께 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다.
주기철의 타협하지 않는 신앙과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저항소식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1940년 이기선은 철산용산교회 박신근 집사로부터 “평양산정현교회에서도 신사참배 반대하는 이들은 교회에 안 나가고 자택에서 예배를 본다. 우리도 끝까지 성경대로, 신앙은 계속하여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는 절대로 배격해야 한다.”78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해 4월 한상동은 채정민에게서 “평양산정현교회가 신사불참배로 목사 주기철은 검속당했으나, 남은 신도들이 적시 굴복하지 않고 완강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최근에는 당국도 이들 불참배교도들의 완강한 태도에 약간 굴복한 감이 있다.”79는 소식을 들었다.
 
5. 마지막 검속과 주기철의 순교
 
번하이젤 선교사는 그 고난 길, 십자가의 길, 가장 힘든 그 길을 산정현교회와 함께 걸어가던 그 시절 한 통의 편지를 써서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보냈다. 평양노회 임시회가 주기철과 한국교회 앞에 부끄러운 결정을 내린 후 번하이젤은 참찹한 심정으로 “우리는 결코 이 죄악의 옛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며 이렇게 썼다.
 
당신은 한국교회를 이교화시키고 한국교회를 정부의 완전한 통제 하에 두려는 일본정부의 노력을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모든 외관상으로는 그들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전반적으로, 그리고 크리스천 대중들은 이따금씩 일정한 간극으로 신사에 가서 참배할 것을 요청받습니다. 물론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 행위가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고 단지 애국적인 행위라고 말하며 국민을 속이고 있습니다. … 처음에 목사들과 다른 교회 사역자들은 거절하고 투옥을 당하고 심하게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가 꺾였고 굴복한 많은 사람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입장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목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시무를 사면하고 개인 생활로 은퇴하였습니다. 다른 이들은 시무를 사면하거나 교회를 목자 없이 버려두기보다는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경찰은 그 문제에 대해 신앙적 고집을 버리지 않고 양심의 자유를 유지하려는 어떤 이들에게는 강제로 목회를 그만 두게 했습니다.(The police forced out of the ministry any who were inclined to be stubbon on the matter and try to maintain their freedom of conscience.) 그 결과 오늘날 아마도 이 나라에는 신사참배 명령에 순복하지 않는 현직 목사들은 없고 신사참배 하라는 지시가 내려올 때마다 신사에 갑니다. 그러나 여기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주기철]와 산정현교회 부목사와 전도사 모두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체포를 당해 8개월 동안이나 옥중에 보내졌습니다.80
 
주기철과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강요에 저항하며 길고 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일제는 1940년 4월 20일 잠시 주기철을 가석방 했다가 6월에 다시 검속했다. 한상동, 주남선 등 10여 명을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주동자로 구속하면서 함께 주기철을 구속한 것이다. 반대운동의 중심 그 배후에 주기철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81 3개월 후 9월 25일 애양원에서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던 손양원 목사가 여수 경찰서에 검속되었다. 주기철과 뜻을 같이하던 방계성, 한상동, 이기선, 손양원이 투옥된 것이다.
1940년 10월 감리교 역시 “외국인들은 교회와 기관에서 리더십의 직분 혹은 대표직을 맡지 않는다.”82고 결의했다. 그 다음달 11월 10일 장로교도 동일한 결정을 내렸다.83 주기철 목사 권고 사직을 결정한 평양노회장 최지화는 제 30회 평양노회에서 “비상시국을 당하여 본 노회 각 시찰구역 내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노회로부터 손을 떼게 하고” 더 이상 관여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84 1940년 10월 주한 미영사 마치는 미국 선교사들의 철수를 결정했고, 전체 9분의 5에 해당하는 160명의 선교사와 49명의 자녀들을 포함 모두 219명이 다음달 11월 16일 마리포사(S. S. Mariposa) 호를 타고 한국을 떠나 11월 29일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다.85
1941년 9월 6일 번하이셀 부부는 힐, 버츠와 함께 한국을 떠났다. 1900년 10월 18일 26살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도착해 41년 동안 한결같이 한국교회를 섬겼던 버하이젤이 산정현교회를 뒤로 하고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의 한국사역과 산정현교회는 분리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국 사역 41년 가운데 35년을 산정현교회를 위해 바쳤으니 말이다. 남아 있던 선교사들도 한국을 떠났고 그래도 끝까지 버티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40명의 선교사들도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4월 모두 한국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후 1944년 4월 21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주기철은 자기와 힘든 싸움을 계속했다. 이 기간 그가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그가 얼마나 조국교회를 위해 생명을 담보로 기도를 드렸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가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를 했는지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이 기간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주기철에 대해 남긴 기록들을 통해 단편적이나마 그의 모습을 유추해 볼 뿐이다. 그를 지켜본 이들은 주기철이 유치장 안에서도 믿음의 용사답게 신앙의 절도를 지키며 주변의 사람들에게 싶은 인상을 남겼다고 증언한다. 4차 수감되었을 때 주기철과 같은 감옥에서 지낸 〈죽으면 죽으리라〉 저자 안이숙은 투옥 중에 옥중에서 그를 만나고는 “주기철 목사를 가까이 보니 참으로 거룩해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이숙은 1942년 경 그 혹독하게 추운 날 재판소를 향하는 과정에서 주기철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받은 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그(최권능) 뒤에 나오시는 주기철목사를 보았다. 그야 말로 목자를 따라가는 어린 양의 모습 같았다. 얼마나 거룩해 보이고 그 얼마나 고상한지, 햇빛을 못 본 그의 조각상 같은 미모의 얼굴은 맑고 희며, 발산되는 듯이 느껴지는 그의 순교열은 뜨거운 인상을 내 마음 속에 새겨주었다.
 
주기철과 안이숙은 같은 날 검거되어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마주보는 감방에서 1년을 같이 보냈다. 안이숙은 주기철을 잘알고 있고 그를 신앙적으로 흠모하고 있었지만 주기철은 안이숙을 몰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자신의 감방이 주기철의 감방과 맞은 편에 서로 있게 되어 손가락으로 주목사와 처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후 주기철은 안이숙과 손가락 회화로 여러번 대화를 나누었다. 안이숙이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주기철은 그녀에게 이렇게 격려했다.
 
주기철: “하나님이 인물을 참 잘 선택하셔서 그 어마어마한 일본 국회 의사당에 박장로님과 함께 가서 경고시키셨군요.”
 
안이숙: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저는 아무 가치 없는 불쌍한 주님의 여종이에요.”
 
주기철: “물론 우리들의 상급은 천국에 있는 것이니까 세상에서의 크고 작은 것을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역사가 우리 교회사에 오를 때에는 그야 말로 빛나고 찬란한 광채를 세계에 발하게 될 것입니다.”
 
안이숙: “선수가 뛰기도 전에 월계관을 받는 것 같은 심정이 되어졌어요. 목사님 저는 죽기를 원해서 나섰지만 앞으로 더 극심한 고문을 당하거나 못견딜 핍박이 닥쳐 들어와서 죽다 못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무서워요.”
 
주기철: “우리는 그저 한 발자욱씩만 걸읍시다. 뛰려고도 말고 날려고도 말고, 그날 닥쳐오는 일을 한 발자욱씩만 다지면서 가면 갈 수 있겠지요. 죽는 것이 목표라면 그 죽음이 언제 오든지 그 나머지 일은 예수님이 살아계시니 그에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 역사는 반복합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 죽으려는 사람이 실패한 전례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상으로 그를 따르고 죽고자 하는 자를 괄시하시거나 방관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마귀는 큰 일을 하는 것 같이 떠들썩해도 결국 거꾸러지는 법이고 믿는 자들은 다 죽어 없어지는 것 같아도 큰 힘을 빚어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또 믿는 자들이 약하게 죽어도 주님 복음은 빛을 발하고 강렬해서 능력으로 전파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안이숙: “저는 일본인들을 잘 아는데 그들이 이렇게도 미치광이가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이 사람들의 지도층들은 … 하는 짓을 보니 야만 중에도 가장 우악스러운 개만도 못한 야만인 족속으로 보이니 기가 막힙니다.”
 
주기철: “우상을 섬기면 다 그렇게 되는 법입니다. 귀신이라는 것은 약은 것 같지만 가장 미련한 것이기 때문에 귀신들리면 높은 자도 지식인도 왕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 “86
 
그는 안이숙에게 어느 날에는 쑥갓을 실컷 흰밥과 함께 마음껏 먹고 싶다는 의사도 피력했다. 주기철 그는 순교자이기 전에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강인한 정신력과 신앙을 소유했지만 이 땅을 살았던 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주기철의 고난이 더욱 아름답고 값진 것이다.
1944년에 접어들자 주기철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까지 도래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감한 듯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여보 나는 아무래도 몸이 견디지 못할 것 같소. 나는 주님이 맡긴 짐을 지고 가느라고 어머님 봉양을 못해드려서 송구스럽소. 나를 대신해서 어머님을 부탁하오. 나는 하나님 품에 가서 주님의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소. 교회에 이 말을 전해주시오. 나를 웅천에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뭍어주오. 내 어머님도 세상 떠나시거든 내 곁에 뭍어주오. … 우리 한국교회 장래는 어찌될 것인가? 한국교회에 닥쳐 올 시험은 오늘의 신사참배 문제 뿐 아니라 이 문제가 지나가면 또 다른 시험이 오고 점점 더 어려운 시험이 닥쳐 올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한국교회가 진리에 바로 서야 하겠는데 양떼를 잘 먹일 참 목자는 누구일까? … 산정현교회 교우들이 보고 싶소. 진리의 교회가 돼야지 … 내가 생명 보험에 든 것 찾아다가 영진이 장가 보내주고 어머님 세상 뜨시면 장례 치러주시오.87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감한 주기철이 마지막 유언을 남긴 것이다.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도 그는 조국교회의 미래를 깊이 염려한 한국교회 참 목자였다. 자신의 죽음을 정확히 예견한대로 8일 후 21일 오후 9시 30분 주기철은 마지막 온 힘을 다해 “내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시옵소서!”라고 기도 드린 후 잠시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간수들이 보니 운명하는 순간에도 주목사의 얼굴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주기철은 순교자 반열에 올랐다. 김인서의 말대로 “주님께서 순교자의 면류관”88을 그의 머리에 씌워 주셨다. 주기철이 옥중에서 순교하던 날 그의 온 식구들은 그를 위해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그가 순교한 그 다음날 4월 22일 토요일 12시 경 산정현교회 교우들 유계준 장로, 김경진 집사, 양재연 집사, 송소영 집사, 정인복 교우가 손수레를 가지고 와서 주목사의 시신을 인수받아 평양 상수리에 있는 초라한 두칸 방으로 옮겼다. 자신을 웅천에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달라는 그의 마지막 유언대로 그는 돌박산에 잠들어 있다. 자신의 마지막 생애를 혼신을 다해 섬겼던 평양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한 가지 역사 앞에 진실을 기록할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은 주기철의 죽음이 단순히 옥중병사였느냐 타살이었느냐 하는 문제다. 신사참배 반대라는 동일한 죄로 주기철과 같은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안이숙 여사는 1968년 한국을 떠난지 20년만에 고국 땅을 밟고 주기철 목사의 사인이 병사가 아니라 살인 주사를 맞고 타살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다. 1968년 7월 20일 〈기독신보〉 변순재 기자가 안이숙 여사의 인터뷰한 기사가 “밝혀진 주기철 목사의 사인,” “안이숙 여사가 25년만에 사실을 폭로,” “아프다에 살인용 주사,” “한인 의무과장 돌연 출장 보내고”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실렸다:
 
약 2개월 전에 귀국한 바 있는 안이숙 여사(로스앤젤스 한인교회 담임 김동명 목사 부인)는 지난 15일 오후 본사 변순재 취재부장과 만난 자리에서 일정 말 신사참배 반대로 옥에 갇혔다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죽음이 병사가 아니라 일본 경찰이 살인용 주사를 놓아 죽였음을 폭로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은 당시 평양감옥에 병감방에 갇혀 있던 안여사가 동 형무소 의무과장(한국인)으로부터 듣은 사실이라고 한다. 특히 병약한 안 여사에게 친절을 베풀던 의무과장이 하루는 안 여사에게 주기철 목사의 주검을 알려주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귀뜸해 주었다고 한다. 즉 의무과장이 하루는 상부로부터 갑자기 출장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령대로 평양에서 해주에 갔다오니 조수(일본인)가 “주기철 목사의 사망”을 보고하기에 시기적으로 생각밖이라 눈을 부릅뜨고 “무슨 말이냐?”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일본인 조수의 답변이 “몸이 아프다기에 주사를 놓았으나 죽었습니다.”고 말하기에 빈주사통을 자세히 보니 살인용 주사였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을 듣고 안여사는 삼일간 울었다고 한다.89
 
김충남 목사도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생애〉에서 안이숙 여사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주기철이 병사한 것이 아니라 타살된 것이라고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 교계에선 평소 몸이 허약했던 주 목사의 건강 상태와 옥고에 시달리면서 더욱 악화된 병으로 인한 옥중사로 단정하고 믿어 오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 1968년에 〈죽으면 죽으리라〉의 옥중 수기를 간행키위하여 20년 만에 일시 귀국했던 안이숙 여사에 의해 병사로만 알아오던 주 목사의 사인이 비로소 베일을 벗게 되었다. 안이숙 여사는 필자와의 대담에서 주 목사는 병사가 아니라 타살이라고 증언했다. 안이숙 여사가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형무소 의무과장에게 들은 극비의 사실로 의무과장을 출장 보내고 그 조수에게 시켜서 주사로 타살케 했는지 그 조수가 또 다른 사람에게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타살이었다고 했다. 주 목사가 병감에 있을 때 주사에 물을 넣었는지 공기를 넣었는지 혹은 어떤 독약을 넣었는지 모르지만 주사로 인한 타살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그 때 어느 간수를 통하여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안여사는 식음을 전폐하고 사흘을 계속 흐느꼈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인정 때문이 아니고 분하고 억울해서 그토록 슬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규명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의문시된 것은 그 때 오정모 집사가 시신 인수시 주사자국을 확인하여 검진하지 못했기 때문에 타살이었다는 사실이 감추어지고 만 것이다.90
 
안이숙 여사가 일본 간수를 통해 주기철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김충남 목사에게 이 사실을 들려 준 것이다. 필자 역시 주기철이 독살되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 내용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내 심장이 너무도 박동치는 것이 느껴진다. 그만큼 충격을 받은 셈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제의 행위는 천인공로할 일이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다. 일제는 지속적으로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주기철을 아예 앞당겨 저 세상으로 보내고 싶어 그에게 우호적인 한인 의무과장을 갑자기 출장 보내고 일본인을 시켜 타살한 것이다. 한 조수가 임의로 그런 행동을 실행에 옮겼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제가 독극물을 놓아 그를 죽였다면 일제는 주기철 목사를 두 번 죽인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 진실을 역사에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다. 이것으로 일제가 얼마나 이 민족에게 못된 짓을 했는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어쩌면 주기철의 순교는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진행형이다. 그가 마지막 유언에서 우려한 대로 그 이후에도 한국교회에는 계속해서 제 2, 제 3의 새로운 도전의 바람이 불어왔다. 공산주의 도전, 이단의 도전, 자유주의 도전, 세속화 도전,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 성적타락, 서구로부터 밀려드는 동성애 문제는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마다 도전의 주제는 달랐지만 세월이 가도 변함 없는 한 가지는 사실은 그 투쟁의 본질이 진리에 대한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6. 맺는 말
 
필자는 1996년 제 1회 소양 주기철 기념강좌 발표를 하면서 생면부지의 주기철을 역사를 통해 처음 만났다. 나는 그를 한번도 만난 적도 없지만 그는 나의 신앙에 너무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91년 총신의 교수로 부임해 흐트러진 나의 신앙의 옷깃을 여미게 해준 주인공이 바로 주기철 목사였기 때문이다.
평범한 한 인간이 얼마나 비범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인물이 바로 주기철이었다. 그가 남긴 족적과 설교와 사상과 대쪽 같은 신앙의 절개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오고 가는 세대에 귀감과 사표가 될 것이다. 주기철이 더욱 빛나는 것은 그가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도 평범한 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은 ‘여보 나 슝늉 한 그릇 먹고 싶소’였다.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 기둥을 부여잡고 엉엉 울며 일경 앞에 자신의 구속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노모와 처자를 염려했던 한 인물이 바로 주기철이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아버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던 인간 예수가 자신의 뜻을 뒤로 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복했기 때문에 그의 십자가가 더욱 위대한 것처럼 주기철에게도 인간 주기철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순교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여자와 돈과 명예에 깊숙이 물들어 버리고 돈을 하나님 삼으며 세속화와 온갖 우상에 깊이 물들어 버린 한국교회는 주기철의 순교 신앙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총회장 홍택기와 평양노회장 최지화만 배도의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라 총회와 전국 노회 산하 전교회와 목회자가 배도의 길에 동참했고, 온 교우들도 배도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순교자 주기철의 목사 사직을 결정한 것은 평양노회지만 평양노회만 그 결정에 동참한 것이 아니라 당시 모든 교회가 동참한 것이고 그 교단에 속한 우리 모두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954년 제 39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정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리고 참회를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1952년 고신의 분열, 1953년 기장의 분열 이후의 결정이기 때문에 반쪽만의 결정이었다. 게다가 각 노회와 개교회의 회개운동이 동반되지 않은 단순히 총대들의 총대 기간 동안만의 회개로 그친 형식적인 결정이었다. 우리 모두는 총회가 교회만 아니라 사회와 민족 앞에 부끄러운 일을 결정하고 온 교우들을 배도로 몰아넣은 선조들의 죄과를 깊이 회개해야 할 것이다.
늦었지만 과거 평양노회의 역사성을 계승한 예장 합동 동평양노회를 비롯한 몇몇 노회에서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결정을 취소하고 회개하는 기회를 갖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다. 한국교회는 민족적 죄과에 대한 깊은 자기 반성의 기회를 갖고 이를 한국교회 갱신과 회복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정치권은 당시와 같은 부끄러운 결정을 다시는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신앙의 순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를 돕지는 못할 망정 그를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야 말로 그를 두 번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해서 한국교회 전체를 배도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면 평양노회는 신사참배에 맞서며 신앙의 순결을 지키는 주기철 목사를 정죄함으로 그 배도의 길의 선봉에 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당시 감리교와 장로교 모두 한국교회 총회와 노회 모두 하나님과 주기철 목사와 한국교회 앞에 너무도 못할 짓을 저질렀다. 그러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공범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끝>
 
[후주]
 
1 민경배, 〈주기철〉(서울: 동아일보사, 1996), 146.
2 주기철 목사에 대해 다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동평양노회와 부족한 논문을 꼼꼼히 읽고 귀한 조언과 격려를 준 이상규 교수, 이은선 교수, 이영식 박사, 그리고 필요한 관련 자료를 찾는 일을 도와준 교회사문헌연구원 심한보 원장, 총신대 일반대학원 박사과정 고영조 목사, 석사과정 박양수 목사, 그리고 총신대 신대원 3학년 최규환 전도사에게 감사드린다.
3 C. F. Bernheisel’s letter to Rev. P. S. Wright, Nov., 14, 1939.
4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218.
5 C. F. Bernheisel, “the Present Condition of the Church in Korea,” Feb., 20, 1939.
6 C. F. Bernheisel, “the Present Condition of the Church in Korea,” Feb., 20, 1939.
7 C. F. Bernheisel, “the Present Condition of the Church in Korea,” Feb., 20, 1939.
8 C. F. Bernheisel, “the Present Condition of the Church in Korea,” Feb., 20, 1939. 산정현교회와 산정재교회는 동일한 교회로 당시 문헌에 교호적으로 사용되었다.
9 C. F. Bernheisel, “the Present Condition of the Church in Korea,” Feb., 20, 1939.
10 C. F. Bernheisel’s letter to Rev. P. S. Wright, Nov., 14, 1939.
11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432-433, 재인용.
12 김인서,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 68-69.
13 C. F. Bernheisel, “the Present Condition of the Church in Korea,” Feb., 20, 1939.
14 김인서,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 49.
15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233.
16 Charles F. Bernheisel’s Letter on Dec., 29, 1939.
17 C. F. Bernheisel’s letter to Dr. J. L. Hooper, Dec., 20, 1939.
18 “교도에게 의사전달 전체 태도를 결정키로,” 〈東亞日報〉, 1939년 10년 22일. (B朝). 〈동아일보〉는 주기철 1938년 투옥된 후 계속 옥중에 있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이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
19 C. F. Bernheisel’s letter to Rev. P. S. Wright, Nov., 14, 1939.
20 “산정현교회 측에서 보류를 재 요구,” 〈東亞日報〉, 1930년 10월 23일(B夕)
21 C. F. Bernheisel’s letter to Rev. P. S. Wright, Nov., 14, 1939.
22 “오장로 설교를 성도들이 거절, 산정현교회 문제,” 〈東亞日報〉, 1939년 11월 7일 (B朝)
23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246.
24 C. F. Bernheisel’s letter to Rev. P. S. Wright, Nov., 14, 1939.
25 C. F. Bernheisel’s letter to the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Oklahoma City, Nov., 9. 1938.
26 C. F. Bernheisel, “The Present Condition of the Church in Korea,” Feb., 2. 1939.
27 C. F. Bernheisel’s letter to Dr. J. L. Hooper, Dec., 20, 1939.
28 C. F. Bernheisel’s letter to Dr. J. L. Hooper, Dec., 20, 1939.
29 C. F. Bernheisel’s letter to Dr. J. L. Hooper, Dec., 20, 1939.
30 곽안련, 〈조선예수교장로회헌법〉, (서울: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69.
31 C. F. Bernheisel’s letter to Dr. J. L. Hooper, Dec., 20, 1939. 10개의 항목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 편지 내용이 당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기록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평양노회 임시회록에는 단지 2가지만 기록되었다. 번하이젤이 몇 명이 반대했는지에 대해서도 상호 의견이 다른 것을 보면 참석자들이 자신들이 유리한 대로 증언한 것이라는 느낌도 받는다.
32 朴龍奎, 〈저 높은 곳을 향하여〉(서울: 혜성문화사, 1968), 104
33 C. F. Bernheisel’s letter to Dr. J. L. Hooper, Dec., 20, 1939.
34 제37회 평양노회 임시회 촬요, 김요나, 〈동평양노회사〉, 1244.
35 곽안련,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 161-162, 163-180. 주기철 목사에 대한 임시노회의 결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노회록을 근거해야 한다는 원칙을 기본으로 해야 하며, 따라서 노회록에 있는 내용을 먼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회록에 있는 내용을 몇 가지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첫째, 노회록에 있는 주기철 목사에 대한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은 면직이 아니라 “시무를 권고사직시킨다”는 것이다.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는 것과 면직은 다른다. 둘째, 입석자에 대한 것이다. 노회록에 입석자들이 참석한 것은 1938년 9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때처럼 노회에 압력을 가해 자신들이 의도하는 바 대로 회의가 진행되도록 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경찰 고위 간부들이 평양노회에 참석했다는 것은 일제가 배후에서 용의주도하게 신사참배운동을 조정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나 인물들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분명함을 보여준다. 주기철 목사는 일제가 볼 때 제거해야할 대상 일 순위였다. 셋째, “총회의 신사참배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이유”가 노회록에서 밝힌 주기철 목사의 징계사유이다. 1939년 9월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수용하여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한 총회의 결의를 존중하고 그 결정에 순복하여 신사참배를 해야 하는데 주기철 목사가 계속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경고문도 무시했다는 것이 사유를 들어 권징조례 19조에 근거하여 주기철 목사를 징계한 것이다. 넷째, 1934년 개정된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있는 권징조례 19조는 목사와 평신도의 소속에 관한 것과 상회와 하회의 관계 조문이다. “제 19조 목사에 관한 사건은 노회직할에 속하고 일반 신도에 관한 사건은 당회직할에 속하나 상회가 하회에 명령하야 처리하라는 사건을 하회가 순종치 하니하거나 부주의로 처결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처결권이 잇나니라.” 곽안련,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 161-162. 마지막으로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가 주기철 목사에게 적용한 징계 내용, “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다. 장로교 헌법의 권징조례를 참고할 때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다”는 것은 “목사면직시키다”는 것과 분명히 다르다.
36 제37회 평양노회 임시회 촬요, 김요나, 〈동평양노회사〉, 1244.
37 노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의 결정 일자도 통일성이 없다. 민경배 교수는 1941년 3월 23일로 기술한다. 박용규(朴龍奎)목사는 〈(殉敎者) 주기철 목사 전기: 피를 바치련다〉(서울: 은성문화사, 1968), 186에서 1941년 3월 20일로 언급한다.
38 〈每日新報〉 1939년 12월 20일.
39 곽안련,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 174.
40 곽안련,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 175.
41 곽안련,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 174-175.
42 곽안련,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 139-140.
43 제37회 평양노회 임시회 촬요, 김요나, 〈동평양노회사〉, 1244.
44 “교역자로 국가의식불응은 총회결의정신위반, 평양노회 축면직결의,” 〈장로회보〉 1940. 1. 24. 7면.
45 제 38회 평양노회 촬요, 김요나, 〈동평양노회사 150회사〉, 1244.
46 C. F. Bernheisel, Letter to Charles, Dec., 29, 1940. 이날 번하이젤은 다음과 같은 착찹한 심정도 덧붙였다. “노회가 정회한 후 나는 내가 노회에서 말한 것을 영어로 진술할 것을 요구받았고 그런 후 집으로 돌아가라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문제를 숙고한 후에 후에 나를 부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후 그들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혹 그들이 나를 추방시킬 것을 집행할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대로 나의 케이스가 서울이나 아마도 일본에 있는 그들의 상부에 보고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이 추방이 그들의 계획의 일환이라면 기꺼이 추방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만 여기 교회를 떠나고 이 교회 교인들을 그 어려운 시기에 광야에 버려두는 것은 원지 않습니다.”
47 회의법상 거수를 했다면 50명 가운데 8명으로는 주기철의 징계 안에 통과될 수 없었을 텐데 1938년 9월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결정처럼 이번 주기철 목사 징계도 동의와 제청을 거쳐 가를 물었고 아니라고 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가에 대해 8명이 예라고 답하고 1명은 아니라고 답하고 나머지는 침묵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48 C. F. Bernheisel, “Recent Events in Pyengyang,” Mar., 26, 1940.
49 C. F. Bernheisel, “Recent Events in Pyengyang,” Mar., 26, 1940.
50 제 38회 평양노회 노회록, 김요나, 1244.
51 C. F. Bernheisel, “Recent Events in Pyengyang,” Mar., 26, 1940. 편지에는 목사직 면직에 대해 “Rev. Mr. Chu has been deposed from the ministry”라는 말로 표현했다.
52 안용준, 〈태양신과 싸운이들〉(부산: 칼빈문화사, 1956), 55-56.
53 김인서, 〈주기철 목사의 순화사와 설교집〉(1958), 164-165. 제목을 달리해서 출판한 같은 책 재판(1969)에는 같은 내용이 32쪽에 실려있다. 김인서, 〈일사각오〉(서울: 기문사, 1969), 32을 보라.
54 박용규, 〈저높은 곳을 향하여〉, 104-105.
55 김충남, 〈순교자 주기철 목사 생애〉(서울: 백합출판사, 1970), 217.
56 김충남, 〈순교자 주기철 목사 생애〉, 217.
57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233.
58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234.
59 김요나, 〈일사각오〉, 369.
60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252.
61 김인수, “소양 주기철 목사의 제명처분과정.”
62 2006년 예장 통합의 평양노회에서 주기철 목사의 복권을 결정한 상황에서 또 예장합동도 총회에서 유사한 결정을 내린 상황에서 이 문제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예장 통합이 복권 결정을 내리게 된 자료들과 연구 논문을 입수하여 살펴보고, 관련 논문들과 책자들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번하이젤의 편지도 입수하여 자세히 읽어 보았다. 노회록에 명시된 대로 필자의 소견으로는 1939년 12월 19일 남문외교회에서 열린 제 37회 제1차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은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킨 것이지 목사직 자체를 면직시킨 것이 아니다.
63 C. F. Bernheisel’s letter to Dr. J. L. Hooper, Dec., 20, 1939.
64 C. F. Bernheisel’s letter to Dr. J. L. Hooper, Dec., 29, 1939.
65 C. F. Bernheisel’s letter to Dr. J. L. Hooper, Dec., 29, 1940.
66 C. F. Bernheisel’s letter to Dr. J. L. Hooper, Dec., 29, 1940.
67 C. F. Bernheisel, “Recent Events in Pyengyang,” Mar., 26, 1940.
68 C. F. Bernheisel, “Recent Events in Pyengyang,” Mar., 26, 1940.
69 C. F. Bernheisel, “Recent Events in Pyengyang,” Mar., 26, 1940.
70 C. F. Bernheisel, “Recent Events in Pyengyang,” Mar., 26, 1940.
71 C. F. Bernheisel, “Recent Events in Pyengyang,” Mar., 26, 1940.
72 C. F. Bernheisel, “Recent Events in Pyengyang,” Mar., 26, 1940.
73 C. F. Bernheisel, “Recent Events in Pyengyang,” Mar., 26, 1940.
74 어떤 기록에는 30여 명이 연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산정현교회문제재연 교도 30명 검거,” 〈동아일보〉 1940. 3. 26 (석B). 또한 김광수, “산정현교회,” 〈기독교대백과사전〉 8권(서울: 교문사, 1982), 738을 보라.
75 C. F. Bernheisel, “Recent Events in Pyengyang,” Mar., 26, 1940.
76 주광조, 〈순교자 나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서울: UBF출판부, 1997), 60.
77 김광수, “산정현교회,” 〈기독교대백과사전〉, 738.
78 안용준, 〈태양신과 싸운 이들〉, 277.
79 안용준, 〈태양신과 싸운 이들〉, 265.
80 C. F. Bernheisel, Letter to Charles, Jan, 27, 1940.
81 박용규(朴龍奎) 목사는 7월 3일 한상동 목사가 먼저 구속되고, 주기철 목사가 8월에 그리고 9월 25일에 손양원 목사가 구속되었다고 말한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 전기〉, 208.
82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249.
83 “일본적(日本的) 기독교(基督敎)로 발전(發展), 기독교(基督敎) 획기적(劃期的) 출발(出發),” 〈每日申報〉, 1940년 11월 10일. Cf. Charles August Sauer, Methodists in Korea 1930-1960, 250.
84 제30회 평양노회록, 김요나, 〈동평양노회사〉, 1183.
85 Edith A. Kerr & George Anderson,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in Korea 1889-1941, 91.
86 김충남, 〈순교자 주기철 목사 생애 진달래 필 때 가버린 사람〉(서울: 백합출판사, 1973), 242-248.
87 김충남, 〈순교자 주기철 목사 생애〉, 265.
88 곽안전, 〈한국교회사〉(서울: 기독교서회, 1973), 426.
89 “밝혀진 주기철 목사의 사인,” 〈기독신보〉 1968. 7. 20. 박용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49-150에서 재인용.
90 김충남, 〈순교자 주기철 목사 생애〉, 267-268.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7.12.08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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