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 신학지남 제83권 제3집 (2016.9): 41-139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선교사, 역사적 평가: 토마스, 그는 순교자가 아닌가 [전반부]
박용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신학지남 제83권 제3집 (2016.9): 41-139
 
편집자 주: 1. 주석의 경우 발표논문에는 각주로 되어 있으나 본 글에서는 후주로 변경하였습니다. 2. 본 논문은 분량상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서 개제합니다. 후반부를 읽기 원하시면 여기를 누르시기 바랍니다.
 
 
목차
[전반부]
들어가면서
I. 토마스 선교사 연구 동향과 사료문제
II. 토마스 선교사의 중국 입국과 1, 2차 내한 선교 문제
III. 제너럴 셔먼호 입국과정과 관련 고종실록과 기타 국내 사료 문제
[후반부]
IV.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을 통해 조명한 토마스의 2차 선교 문제
V. 그의 죽음과 관련된 해석
VI. 토마스의 순교가 가져다 준 첫 영적 결실들
맺는 말
 
들어가면서
 
1866년 8월, 영국의 한 젊은이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the General Sherman)를 타고 대동강을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가 평양 양각도에서 그해 9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 젊은이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崔蘭軒) 선교사다.1 오문환은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성경을 전해주다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고, 〈고종실록〉은 토마스가 조능봉과 함께 배어서 나와 결박된채 민관에 의해 맞아 죽었다고 기록했다.2 해밀턴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는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3였다.
2016년 9월 5일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그의 순교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왔다.4 한국선교, 특히 평양지역 선교의 개척자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은 1909년 한국선교 25주년 기념식 때 한국의 “복음전도사역”이라는 자신의 논고 맨 서두에서 “한국에 들어온 첫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가 “죽을 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을 반포”5했으며 “그에게서 성경책을 받은 얼마의 사람들을 만났다”6고 증언했다. 한국선교 25주년의 선교사역을 정리하는 순간, 복음의 주역으로 쓰임받은 마펫은 주저하지 않고 토마스의 죽음에서 한국선교의 기원을 찾았다. 토마스의 거룩한 죽음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개척선교사는 사무엘 마펫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한국선교사들은 토마스의 죽음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장로교 개척선교사 언더우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에 입국하기 전 1884년 여름 영국 런던선교회를 방문해 그곳에서 런던선교회 소속 토마스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했다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릴리아스의 증언에 의하면 언더우드는 런던선교회에서 들은 토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 있게 되풀이 하곤 했다. 그만큼 그가 토마스의 죽음을 인지하고 의미 있게 받아들인 것이다.7
토마스의 순교를 높이 평가한 것은 장로교 선교사들만이 아니었다.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는 한국에 입국한지 채 2년도 되지 않던 1887년 1월 29일 미국 슈펠트 제독(Admiral Shufelt)가 자신이 직접 관여한 한국의 개항관련의 증언을 담은 “한국의 개항: 슈펠트 제독의 개항설명”을 전해받았다. 이 원고는 아펜젤러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제너럴 셔먼호를 포함한 상세한 한미관계와 개항과정을 담고 있다. 아펜젤러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 원고를 5년이 지난 1892년 The Korea Repository에 기고했다. 한국에 파송된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는 입국하기 전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 로스의 저술을 통해 제너럴 셔먼호의 사건을 통해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차에 슈펠트가 고종의 초청을 받고 조선에 입국하자 그에게 부탁해 한미관계와 조선의 개항 소식을 직접 전해듣기를 원했다. 아펜젤러의 글은 제너럴 셔먼호와 토마스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8
1915년 미 감리교 개척 선교사 존스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온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최초의 복음주의 선교사가 그 땅에서 순교자의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평가했다.9 한국교회가 토마스의 순교를 본격적으로 기념하기 전 1925년 강규찬, 김선두, 변인서가 편찬 저술한 〈평양노회지경각교회사기〉에도 “주후 1867[1866]에 영국 선교사 도마스가 스카뎐 성서공회로브터 미국풍선을 승하고 평양에 래하엿다가 감사의 습격을 당하야 대동강에서 슌교하니 차가 야소교 신도의 혈이 아국강산에 시적한 일이려라”며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단정하여 기술하였다.10
이처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과 한국교회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생각한 것은 후대의 일이 아니라 초기 증언자들, 특히 그에게서 성경을 전해 받고 예수를 믿고 자신들과 함께 교회를 섬기고 있는 당대의 살아 있는 증언자들로부터 생생한 스토리를 전해들었기 때문이다.11 최근 소수의 학자들이 마치 토마스가 어느 날 갑자기 순교자로 둔갑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주관적 평가이다.12 초기 선교사들은 토마스의 선교적 공헌을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고 그들이 먼저 1910년대부터 그에 대한 연구와 평가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다 1920년대부터 토마스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어 1926년 오문환의 소책자, 〈평양양란〉이 간행되었고, 1926년 11월 14일 제 14회 총회 때 토마스 선교사 순교 6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으며, 1927년 5월 7일에는 토마스 목사 순교 기념전도회(회장 마펫)가 창립되었다. 그해 해밀턴이 〈코리아미션필드〉에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를 발표하고 그 이듬해 1928년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이 출간되었다.13 이런 노력의 결과 1932년 토마스기념교회가 토마스의 무덤이 있는 조왕리에 건축되었고, 1934년 한국선교 50주년을 맞는 해에 출간된 해리 로즈 편집,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1권 1884-1934〉에서 상당한 분량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조명에 할애했다.14 1936년에는 서해안 지역 도서 전도를 위해 토마스 호가 건조되었고, 해방 후 1947년 8월 12일 토마스 목사 순교기념 전도회가 발족되었으며 1966년 9월 광주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 51회 총회는 토마스 선교사 순교 100주년을 맞아 기념예배를 거행했다. 명신홍 목사는 “토마스(R. Thomas) 목사의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라는 글에서 토마스 목사는 “우리 땅에 처음으로 순교의 피”를 흘린 “한국교회 순교자 중에 선구자적인 순교자였다”15고 평가했다. 한국교회는 ‘순교는 교회의 씨’라는 터툴리안의 증언을 가장 잘 증명해 준 인물이 바로 토마스라고 믿었다.
 
I. 토마스 선교사 연구 동향과 사료문제
 
해밀턴(F. E. Hamilton)이 1927년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을 〈코리아 미션 필드〉(The Korea Mission Field)에 기고했다.16 이 글은 매우 평범한 연구처럼 보이지만 제너럴 셔먼호는 물론 토마스 목사의 내한과 순교과정을 매우 탁월하게 역사적으로 그려냈다. 해밀턴의 논고는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보다 앞서 발표된 논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사료적 가치가 있다. 해밀턴은 지금까지의 선행 연구 즉 게일과 케이블의 글, 그리고 기타 문헌들을 참고하여 제너널 셔먼호 사건의 전후관계를 고려하면서 토마스의 선교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적으로 기술하였다. 해밀톤은 토마스의 복음전도와 순교가 얼마나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잘 밝혀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해밀톤의 논고 역시 토마스 연구의 또 하나의 소중한 연구 사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17
그 이듬해 오문환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 기술한 〈토마스 목사전, 1928〉은 오랫동안 토마스의 연구의 길잡이로 평가 받아온 연구서였다.18 그는 이 책을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토마스 기념사업회를 이끌며 토마스기념교회까지 세우는데 큰 기여를 했다. 오문환은 〈도마스 목사전〉을 기술하면서 3천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고, 수많은 국내외 자료를 모으고, 후손들과도 접촉하며 토마스 연구에 천착했다. 오문환은 “The Two Visits of Rev. R. J. Thomas to Korea”라는 영어 논고를 자신의 책에 삽입시켰다.19 사실, 이 영어 논고는 새로운 연구라기보다는 자신의 한글판 〈도마스 목사전〉에 담겨진 내용의 핵심을 영어로 정리한 것이다.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이 출간된 이 후 이 책은 토마스 선교사 연구에 관한 한 가장 권위 있는 저술로 받아들여졌고, 토마스 선교사 연구자들은 그의 연구에 상당히 의존했다.
10년 후 1938년 케이블(E. M. Cable) 선교사가 영어로 토마스 관련 연구 논고를 발표했다. 케이블 선교사가 기록한 “한미관계 1866-1871”는 토마스 연구의 독보적인 논고였다. 국내외 관련 자료를 섭렵하여 1938년 발표한 케이블의 “The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는 토마스 연구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넓혀 주었다.20 케이블의 논고는 한미관계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논고이지만 토마스와 관련된 국내외 1차 문헌들을 상당히 섭렵한 가운데 발표한 논문이기 때문에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에 견줄 수 있는 무게감을 갖고 있다. 이 논고는 영어로 기술했지만 〈고종실록〉을 비롯한 국내 기록들을 영역하여 소개하는 한편 제너럴 셔먼호 사건 관련 편지들과 문헌들을 상당히 발굴하여 1차 문헌들을 그대로 논고에 삽입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 논고는 오문환의 관점을 존중하면서도 토마스 연구의 객관성을 위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토마스 연구의 객관성과 풍요로움을 더해주었다. 객관성에 있어서는 오문환의 책을 훨씬 능가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논고는 토마스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주었다. 오문환의 책이 한글로 된 문헌이고 케이블의 글은 영어로 된 논고였기 때문에 토마스의 연구의 모든 기록이 오문환의 기록에 의존해서 기록된 것이 사실이다.
이능화, 유홍렬, 김양선, 일본의 재일 학자 오윤태, 민경배는 영국에서 토마스 관련 1차 문헌들을 모아 토마스 연구에 대한 중요한 논고를 남겼다. 유홍렬은 자신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고종실록〉을 중심으로 기술하면서 천주교 신자들과 신부들을 순교자로 지나칠 정도로 미화시킨 것과 달리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의 죽음을 “피살”로 기록, 호교론적인 시각이 그의 작품에 강하게 나타난다.21 민경배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토마스의 편지들과 관련 개인적 기록들을 참고하여 그의 선교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잘 기술하였다. 그러다 영국 버밍험대학에서 토마스를 가지고 박사논문을 쓴 고무송이 자신의 논문을 번역하여 출간한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이 출간하면서 토마스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는 방대한 사료를 수집하고 개관적이고 비판적이면서 실증적으로 토마스의 생애, 사역, 죽음, 그리고 그 이후 한국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 일련의 과정을 역사적으로 정리하여 토마스 연구의 기념비적 작품을 남겼다.22 그 외에도 근래 스토리 형식으로 토마스의 생애와 사역을 이해하기 쉽게 엮은 유해석의 〈도마스 목사전〉도23 토마스 연구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었다.
한국에 파송된 개척 선교사들은 물론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토마스를 순교자로 이해했다. 이것은 오랫동안 한국교회의 전통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부터 여기에 대한 도전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첫 포문을 연 사람은 이만열인 것 같다. 그는 1988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술 〈한국기독교회 100년사〉에서 토마스의 죽음을 이렇게 평가했다.
 
토마스 목사가 비참하게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단지 그가 죽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위대한 선교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타고 왔던 미국 선박 제너럴셔먼호는 선교용 선박이 아니라 상선에 불과하였으며, 게다가 대포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그 선박은 입항을 불허하는 한국 정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불법적으로 항해하였으며, 따라서 한국의 내륙으로 들어오고자 했던 항해 목적이나 과정을 살펴볼 때 그 배를 아름답다거나 거룩하다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토마스 목사는 그 배의 통역사이자 항해사로서 승선하고 있었다. 따라서 토마스 목사 자신을 높이 평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그가 죽임을 당했던 대동강 굽이마다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교회들이 토마스 목사의 죽음의 결과와 연관되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도 안이하게 해석하는 태도에 불과하다.24
 
이만열은 위 글에서 토마스가 선교사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고 그의 죽음이 순교가 아니라고 단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대포로 중무장을 한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불법으로 입국해서 정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내륙으로 들어온 토마스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고 해서 “위대한 선교사”로 추앙하는 것은 문제가 있고, 게다가 그의 죽음을 통해서 대동강 굽이마다 교회들이 세워진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이는 바른 역사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만열의 논고의 핵심은 토마스를 정상적인 선교사로 인정할 수도, 더 더욱 그를 순교자로, 그의 죽음을 한국교회 영적 초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이만열은 1985년 〈한국기독교사특강〉에서 여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며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평가하는 것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엄연히 주권 국가인 조선 정부의 허가도 없이 들어온 불법적인 이 배에 대해 평양 감사 박규수는 입국의 까닭을 묻고 또 제지하려 했지만 무장한 그배는 이러한 한국 측의 경고에도 개의치 않고 방약 무인하게 행동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좌초된 상태에서 며칠이 지나자 식량과 물이 떨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배에서 총과 대포를 쏘며 노략질까지 하며 심지어는 교섭에 나선 한국관리를 납치까지 하려다가 결국 조선군의 화공을 받아 결국 불타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배에 탔던 사람들이 뭍으로 오르자 혹은 도끼에 혹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1907년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한창 일어날 때 어느 사람이 성경을 가지고 와서 선교사에게 주며 ‘이것이 우리 할아버지께서 옛날 토마스 목사가 죽을 때 얻은 성경이다’하면서 내어 놓은 적이 있다고 하나 우리가 확인할 길이 없다.
아무튼 토마스 목사가 상당히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만 가지고 역사에서 그가 위대하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다. 또 제너널 셔먼호 사건 자체도 그 배의 입국 목적이나 불법적으로 입국한 경위로 보아 성스럽다거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또 토마스 목사도 그 배의 인도자로 왔으니 그 다지 높이 평가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단지 그의 피가 흘렸던 대동강 굽이굽이에 뒷날 많은 교회가 섰다는 것은 인정해야 될 것이지만, 이것을 그의 죽음과 관련시킨다는 것은 너무 안이하게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순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도 한국교회는 이제 정리해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25
 
한 마디로 이만열의 입장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라고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평양대부흥운동도 “민족적 울분을 종교적으로 카타르시스”한 현상이고,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도 동일한 맥락이라고 혹평한 바 있다.26
1995년 한규무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토마스(R. J. Thomas) 목사의 ‘순교’ 과정에 대한 사료 검토”를 발표했다.27 토마스에 대한 귀중한 서지학적 정보를 제공한 것과 많은 자료를 분석한 노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한규무는 제너럴 셔먼호의 입국과정을 1차 사료는 물론 여러 학자들의 저술이나 논고를 참고해 도표를 만들어 토마스의 “순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1995년 발표 때 “그의 죽음을 과연 ‘순교’로 볼 것인가 아닌가 하는 평가의 문제를 후일로 미루었다가 2005년 그동안의 연구를 정리하여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 문제 검토”28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순교가 아니라는 입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조선 후기 이 땅에 들어왔던 천주교 신부들이 처형된 이유는 확실히 그들의 선교활동 때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분명한 순교이다. 만약 토마스도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는 이유 때문에 죽었다면 그 역시 분명한 순교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주권을 무시하고 저지른 침략적 행위 때문에 죽은 것이다. 설령 토마스의 장엄한 최후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같은 필자의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그가 죽은 순간에 형리에게 성경을 주었다 해서 그의 이전 실책이 씻겨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사료상으로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토마스이며, 그는 성경 반포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어떤 이는 결국 토마스가 그토록 무리하면서까지 평양에 가려 한 이유가 바로 복음 전파를 위해서였으므로, 넓게 보면 그 역시 선교활동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닌가 하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일면 타당해 보인다. 결국 ‘순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따라 사람마다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복음 전파를 위해 어느 지점으로 가는데 난폭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선교사가 있다면 그 죽음을 ‘순교’로 볼 수는 없다. ‘순교’는 그 직접적 사인이 선교활동 때문일 경우에만 해당된다고 본다. 그런 이유에서 필자는 선교를 위해 남부지방으로 가던 도중 병으로 죽은 데이비스(J. H. Davis, 1858~1890)의 경우도, 목포에서 열리는 회의에 가려다 군산 앞바다에서 빠져 죽은 아펜젤러(H. G. Appenzeller, 1858~1902)의 경우도, 모두 값지고 안타까운 죽음임에 틀림없지만 순교로는 보지 않는다.
 
이처럼 한규무는 토마스는 물론이고 심지어 헨리 데이비스와 H. G. 아펜젤러도 병이나 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한규무는 토마스에 대한 오문환의 글의 내용이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를 순교자로 평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제국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대포를 장착하고 중무장을 한 선박을 타고 와서 성경을 나누어주었다고 그것을 선교로 볼 수 있으며, 게다가 불법으로 입국해서 전투를 벌이다 죽은 사람을 순교자로 둔갑시킬 수 있겠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의 논지다. 2016년 6월 한규무는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 문제 검토”라는 동일한 성격의 글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발표했다.29 이 논문은 앞서 큰 맥락에서 볼 때 앞서 발표한 같은 논제의 반복으로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라고 볼 수 없다는 논지의 반복이다.
최근 “토마스 목사의 죽음은 순교인가”라는 논고에서 옥성득은 1차 사료들과 시각적인 도표까지 만들어 토마스를 순교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의 논고를 발표하였다.30 그의 논지와 주장은 앞서 의견을 개진한 이만열 교수나 한규무와 큰 차이가 없다. 옥성득은 초기 문헌들 모두가 토마스를 순교로 보지 않았으며, “1905년 이전 한국이나 중국에서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순교로 본 선교사는 없었다”31고 주장했다. 한국의 초기 문헌들에서는 전혀 토마스를 순교로 보지 않았으며, 순교로 미화시키기 시작한 것은 1909년에 접어들어서이며, 특별히 1915년 존스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라고 처음 언급하면서부터라고 주장했다. 그 글의 전반적인 논지는 중무장을 하고 제국주의 사고를 가지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민관들에 의해 비참하게 처형당한 전혀 순교와 무관한 토마스가 어느 날 갑자기 순교자로 둔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 같은 비평적 재평가가 최근 학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서 토마스의 입국과 죽음에 대한 오문환, 케이블, 민경배, 고무송의 연구에 다른 시각을 제시함으로 토마스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주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하지만 최근 일각에서 제기한 토마스의 재평가가 자칫 객관적인 연구를 넘어 이데올로기적 접근이라는 비판을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만열, 한규무, 옥성득의 접근방법은 방법론적으로 각기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중무장을 한 제너럴 셔먼호라를 타고 불법으로 입국해 활동한 토마스를 과연 선교사로 볼 수 있으며, 전투를 벌이다 죽은 그를 순교자로 미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상호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보지 않는 이들은 오문환의 〈토마스 목사 전〉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고종실록〉을 비롯한 국내 기록들을 논지의 근거로 삼았다. 〈고종실록〉의 기록을 권위 있는 글로 수용하면서도 오문환의 기록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한 이상 앞으로 사료 선택의 문제가 토마스 선교사 연구와 관련하여 중요한 이슈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32 그렇다면 토마스와 관련된 초기 관련 자료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대원군 치하에서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기록한 주요 국내 1차, 2차 문헌들은 다음과 같다. 〈高宗實錄〉, 〈매천야록〉, 〈大韓季年史〉, 〈浿江錄〉, 〈日省錄〉, 〈同文彙考〉, 〈龍浩閒錄〉, 〈.濟集〉, 〈籌辯夷務始末〉, 〈청계중일관계사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평양감영등록〉(平壤監營啓錄), 〈순무영등록〉(巡撫營謄錄), 전남 담양 장흥 고씨(長興高氏) 소장문서 〈조지난편〉(朝紙爛片), 〈기백장계〉(箕伯 狀啓), 〈용호간록〉(龍湖間錄), 〈평안장계〉, 〈평안감영장계〉, 〈동산일기〉(東山日記), 〈정치일기〉(政治日記), 〈어양수록〉(禦洋隨錄).33 이중에서 아마도 제너럴 셔먼호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거론되고 인용되고 있는 자료는 〈일성록〉과 함께 〈고종실록〉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지하듯이 〈고종실록〉은 제너럴 셔먼호와 관련된 일종의 보고서로 토마스 연구에 중요한 1차 자료이다. 〈고종실록〉은 보고서 형태를 취하고 있어 보고자의 주관과 생각 그리고 시각이 강하게 담겨 있다.
최근 토마스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단순히 순교여부 문제를 넘어 토마스의 신분과 입국 동기 문제까지 도전하고 있어 토마스의 내한을 선교 활동과 관련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고는 국내외 문헌에 기초하여 토마스의 1차 내한과 2차 내한과정과 그의 순교과정을 가능한 객관적이고 비평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II. 토마스 선교사의 중국 입국과 1, 2차 내한 선교 문제
 
토마스의 생애와 선교사역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구태여 반복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다만 간단하게 중국입국과 1차, 2차 내한 선교의 핵심 문제를 짚어 보려고 한다.
 
1. 토마스 중국 입국
 
토마스는 1839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의 라야다(Rhyader, Radnoshire)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3년 5월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 대학과정(B.A.)과 신학과정을 마친 토마스는 선교사에게 요구되는 “훌륭한 교육,” “강직한 성품,” “외국어 습득 능력” “자기희생의 정신”을 자신이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기도 가운데 선교사가 되길 갈망했다. 그는 그해 6월 4일 고향 하노버 교회에서 회중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은 후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받았다.34 7월 21일 중국을 향하는 폴메이스(Polmaise)호에 승선한 토마스가 아내와 함께 상해에 도착한 것은 한창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1863년 12월이었다.35 중국에 도착하여 상해를 거점으로 막 선교를 시작하려는 바로 그때, 불행하게도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 갓프리(Caroline Godfrey)가 낯선 타향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36 1864년 4월 5일자 런던선교회에 보낸 그의 첫 편지는 선교 보고서가 아닌 아내의 사망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37
토마스는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으로 안정을 찾지 못한데다 현지 런던선교회 총무 무어헤드(William Muirhead)와도 의견이 맞지 않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에 가서 1864년 12월 8일 청국의 황립해상세관(皇立海上稅關)에서 통역으로 취직했다. 1985년 1월 15일부터 8월 31일까지 약 8개월을 세관에서 봉직한 토마스가 다시 선교열을 재충전하고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더 윌리엄슨과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피신해온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면서였다. 토마스는 지푸에서 세관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동안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 선교사의 충고와 격려로 다시 선교에 대한 비전을 충전할 수 있었다. 세관에 봉직하는 동안도 그는 중국인 주일예배를 윌리엄슨과 함께 교대로 인도하는 등 선교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산동성에 온 두 명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통해 조선에 대한 실정을 전해 듣고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38오문환이 자신의 저서 〈토마스 목사 전〉에서 토마스의 내한을 1차와 2차로 나눈 이후 토마스의 한국선교 활동을 1865년 1차와 1866년 2차로 대별하여 기술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그 전통을 따라 고무송도 1차와 2차로 대별하여 기술하고 있다.
 
2. 토마스의 1차 내한과 선교 문제
 
토마스는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조선으로 향하는 “中國木船”이 있어서 1865년 9월 4일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을 동반하고 윌리엄슨이 전해 준 상당량의 한문 성경들을 지니고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소속39 권서인으로 서해안으로 떠났다.40 오문환은 〈도마스 목사전〉에서 이 때 길안내를 맡아준 사람이 중국인 수부 유웬타이(Yu Wen Tai)라고 밝혔다.41 1865년 9월 13일 창린도(昌麟島)로 알려진 황해도 연안의 한 섬에 도착한 토마스는 12월 초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가지고 온 성경을 섬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1866년 1월 12일 그가 티드맨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난다.
 
존경하는 티드맨 박사님에게
 
북경 런던선교회, 1866년 1월 12일
 
우리는 한 작은 중국 정크 선[사각형 돛을 달고 바닥이 평평한 작은 중국 목선]을 타고 1885년 9월 4일 지푸를 떠나 13일에 조선의 본토에서 떨어진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그 해안에서 2달 반을 지냈습니다. 저는 한 조선인 천주교 신자의 도움을 통해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가장 소중한 진리 얼마를 소개할 수 있는 충분한 언어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외국인들에게 매우 적대적입니다만 저는 그들의 말로 약간의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로 하여금 한두권을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참수 혹은 적어도 처벌과 투옥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책들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그것들을 읽기를 소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0년 동안 한국과 무역을 해온 중국 항해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지난 가을 동안에 한국 서해안에 불어온 광풍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당신을 피곤케 해드리겠지만 제가 얼마나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는지를 말씀 드려야 할 듯합니다. 저는 그나라 수도(Wang-king)를 방문하려고 시도했습니다만 저를 실어 날라줄 한국 선박이 이 무시무시한 강풍 가운데 하나를 만나 그만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생명은 잃지 않았습니다. 12월 초 조선을 떠나 저는 만주해변에 도착했는데 저는 정말 가까스로 바다의 위험을 피해 만주 해변에 떨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은 만주국의 전 나라가 소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랫동안 작은 일단의 산적들로 말미암아 극동의 긴 도로에서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최근에는 이들 산적들이 서로 연합하여 그 움직임이 순전한 반란으로 특징될 만큼 놀라운 속도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떠난 지 이틀 후에 피자도(Pi-tz-wo)라 불리는 한 작은 항구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떠난 지 이틀 후에 폭도들에 의해 점령를 당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성경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면서 3일간 행복한 날들을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예의와 배려 그 이상으로 반응했습니다. 리커화(Likwo Fa)라는 한 이스람교도는 제가 가지고 있는 각 책 1권씩을 사고 나서 제게 매일 저녁을 무료로 보내주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제가 개주(Kaichou)를 지나 우장(New Chwang)의 Tingtaz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저는 영국(H. B. M)의 영사 테일러 메도우(T. Taylor Meadows)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부터는 일부는 말을 타고 여행했고 일부는 차를 타고 원동만(“Tian Tung”) 북부를 돌아서 산해관의 대성곽을 지나 지린성에 들어왔습니다. 그쪽으로는 마적들이 우리를 따라 올 수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소요가 일고 있는 만주를 평정하기 위해 약 4천명의 군대를 파송했습니다.
정리한다면 저는 유럽인들의 사회를 떠나 지난 4개월 동안 바다로 육지로 거의 2천 마일을 여행하면서 조선의 두 서해지방 해안을 알게 되었고 조선의 수도에서 통용되는 상당한 어휘들과 대화들(dialogues)을 습득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들과 향후 교섭 할 때 유용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얼마나 기쁜지 당신에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저는 에드킨스(Edkins)씨가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잘 견딘 것처럼 제게 맡겨진 몫의 짐을 감당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런던 선교부에 그들의 친절에 대해 깊은 감사를 전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당신이 런던선교회선교부의 최종적인 결정을 보류하면서까지 수시로 말씀하신 친절한 격려의 말씀에 대해 지극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곳 북경에서 저의 첫 주간은 외국인들을 방문하는 시간으로 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도 모임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음 주 저는 중국 학생들을 위해 제게 어울리는 공부 과정을 열심히 시작하려고 합니다.
 
런던선교회 이사님들에게 친절한 안부를 담아
사랑하는 티드먼 박사님, 저를 믿어주십시오.
진심으로 당신을 신뢰하며
 
R. Jermain Thomas42
 
토마스는 심한 광풍으로 인한 생명의 위기 속에서 가까스로 생명을 건지고 우장(牛莊)과 산해관(山海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간신히 돌아왔다.43 두 달 반의 시간은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기간이었고, 그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1866년 1월 12일자 토마스의 편지에서 몇 가지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토마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에 입국해서 2개월 반 동안 한국어를 배웠으며 비록 많은 결실은 없었지만 선교사역도 병행했다. 둘째, 몇몇 한국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전해준 성경을 받았는데 토마스가 볼 때 이것은 그들이 성경을 읽기를 간절히 열망했다는 증거였다. 셋째, 토마스는 한국선교를 앞으로 지속하겠다는 암시를 편지에서 밝혔다. 그것은 위 편지 내용 중에 “수도에서 통용되는 상당한 어휘들과 언어들(dialogues)을 습득했는데 이것은 그 사람들과 향후 교섭 할 때 유용하게 사용될 것”44 이라는 토마스의 고백 속에 잘 담겨져 있다. 토마스가 한국선교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위험한 조선에 입국해서 애써서 한국어를 공부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토마스는 1차 선교를 하고 돌아와서 주변의 사람들을 방문하고 기도회를 계속 인도하며 선교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당시 쇄국정책에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한국에 입국해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성경을 전해주고 다시 한국인들에게 선교할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은 한국에 대한 선교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비록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이후 한 동안 위기를 만난 것이 사실이지만 이 때쯤에는 이미 토마스는 선교열을 충분히 재충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 오문환은 토마스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마틴(W. A. P. Martin)의 부탁으로 그가 운영하던 북경에 있는 “중서학원”(Chinese Government Anglo-Chinese Shool) 교장 대리를 맡았다고 말한다.45 토마스는 북경에 온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났다.46 1866년 4월 4일자 편지에서 토마스가 밝힌 것처럼 그즈음 한국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토마스에게 격려가 되는 한 사건이 일어났다. 북경에 온 동지사 일행 중 한 사람이 토마스 목사의 포켓에 한문으로 된 쪽지 하나를 집어넣었는데, 거기에는 “어느 외국인이 서해안에서 배포한 것과 같은 마태복음 책 하나를 구득(購得)해 달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47 이런 일련의 긍정적인 상황은 토마스를 더욱 고무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1866년 토마스는 제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북경에 돌아온 후 런던선교회로부터 다시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아내를 잃은 후 계속해서 새로운 선교지를 찾고 있던 토마스는 조선이 새로운 선교지라는 확신이 들었다.48 제 1차 내한 과정과 이후의 토마스의 행적을 살펴볼 때 그의 조선 입국은 선교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조선에 입국했고 성경을 반포했다. 필자가 볼 때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토마스의 2차 내한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3. 토마스의 2차 내한과 선교 문제
 
1차 내한 후에 토마스는 다시 한국을 방문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1차 내한 후에 그가 보여주었던 일련의 행적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토마스는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열어 놓고 길을 찾았다. 그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한국에 입국하기를 갈망했다. 심지어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이 리델 신부로부터 세 명의 불란서 신부의 처형 소식을 전해듣고 한국정부를 문책할 목적으로 불란서 함대를 출동시켜 한국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안내자 겸 통역으로 동승해 줄 것을 제안했을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49 그러나 갑자기 인도차이나 폭동이 발생해 로즈 제독이 그곳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한국정벌은 취소되고 말았다.50 그러던 중 토마스는 미국인 프레스톤의 소유인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가 조선에 입국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1866년 7월 “한국에서 반포하기 위해 몇 권의 중국어 성경을 가지고” 통역 겸 안내자로 승선했다.51 우리는 토마스의 2차 한국방문과 관련하여 3가지 사실을 먼저 풀어야 할 것이다. 첫째, 제너럴 셔먼호가 어떤 형태의 배였는가. 둘째, 제너럴 셔먼호의 내한 목적이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셋째, 토마스가 이 배에 승선한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1) 제너럴 셔먼호는 어떤 형태의 배였는가?
 
비록 상선이기는 하지만 그 배는 현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순양함”52이었기 때문에 외국과의 교류가 금지된 조선인들에게는 순수 무역선으로 보이지 않았다.53 제너럴 셔먼호가 상선으로 무기를 싣고 간 것과 본래 전투함으로 건조된 것은 다른 문제이다. 오문환은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이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외국선박에 대해 개방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무기를 싣고 출항한 것이라고 말한다.
 
“쇄국주의를 고집하여 외국인이게 적개심을 품고 잇섯슴으로 처음 사업차로 오는 제네랄셔만호는 무기를 싯게 되엿고 그로인하야 도마스 목사의 심중에도 얼마콤 염려되는 점도 업지 안엇을 것이며 그의 친우들도 그것을 염려하엿슬것이나 그것은 다만 만일을 위함이엿고 기목적으로는 단순한 상업이라 하엿스니 동선의 목적에 대하야도 별로히 꺼릴바가 업섯슬 것이다.54
 
제너럴 셔먼호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임시로 무기를 싣고 떠난 것이라는 오문환의 주장은 비약이다. 제너럴 셔먼호는 처음부터 전쟁을 위해 전선으로 건조된 범선, “순양함”으로 미해군 전함(the US navy gunship Princess Royal)으로 사용되다 민간에게 매각되어 선주 미국 상인 프레스톤(W. B. Preston)이 천진에 있는 영국 메도우 회사와 계약을 맺고 한국에 파송한 것이다.55
   
 
 
2) 제너럴 셔먼호의 내한 목적이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제너럴 셔먼호에는 배 소유주 미국인 프레스톤(W. B. Preston)이 천진에 있는 영국의 메도우(Meadows) 상사와 함께 조선과의 통상의 길을 트기 위해 1866년 7월 하순 천진에 도착했다. 선적한 면포(cloth), 유리그릇(glass), 철판(tin plate), 자명종 등 많은 상품과 선장 미국인 페이지(Page), 화물 감독 영국인 선원 호가쓰(George Hogarth), 항해사 미국인 윌슨(Chief Mate Wilson), 그리고 로버트 토마스 등 5명의 서양인과 19명의 청나라와 말레이시아인이 승선하고 있었다.56 제너럴 셔먼호는 〈고종실록〉의 기록을 보니 자신들이 가지고 온 양포(洋布), 기명(器皿)등 이들 물품들을 한국의 “종이, 쌀, 금(金), 삼(蔘), 초피(貂皮) 등의 물품들과”57 교환하기를 원했다. 오문환은 제너럴 셔먼호에 실은 물품 가운데 바늘도 있었는데 제너럴 셔먼호가 불탄 후 평양 대동강에는 몇 해 동안 목욕을 하지 못할 만큼 바늘이 많았다고 말한다.58 고무송도 사료를 통해 이 사실을 재확인했다.59 그리피스는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의 왕릉 도굴과 관련 있다고 강하게 의심했지만60 천진에 있는 메도우 회사가 1866년 10월 27일 벌링게임(Burlingame)에게 보낸 편지는 제너럴 셔먼호의 한국입국 목적은 상업이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지난 7월 하순 미국 범선 제너럴 셔먼호가 본 항구에 도착했으며, 그 배에 건강을 위해 승무원으로 승선한 범선 소유주 프레스턴의 제안에 의해 우리가 맡게 되었다. 우리가 그 배에서 짐을 내린 후 프레스턴과 우리는 그 배에 외국 물품들을 싣기로 동의했으며, 제너럴 셔먼호는 지난 7월 29일 천진을 떠났다.61
 
〈한국통사〉에서 한우근도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까지 올라와 요구한 것이 통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62 제너럴 셔먼호의 조선 입국 목적이 무역 거래가 목적이라는 사실은 8월 21일 신장포구에서 문정관에게 “서양 사람으로서 자기들은 단지 통상과 무역을 하려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없다”63는 사실을 반복해서 밝힌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과의 무역거래를 틀 목적으로 제너럴 셔먼호가 내한했음을 알 수 있다. 토마스는 제너럴 셔먼호 탑승이 조선 선교를 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주저하지 않고 승선한 것이다. 그러나 반 외국인 정서가 극에 달하고, 외국과 문호 개방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도 천주교와 불란서에 대한 반대 정서가 극심한 가운데, 중무장을 한 순양함을 타고 조선에 입국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건강을 위해 승선했다고는 하지만 선주가 배에 승선했다는 사실은 제너럴 셔먼호가 안전보다는 상업적 목적을 앞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예견해 준다.
 
3) 토마스가 이 배에 승선한 목적이 무엇인가.
 
토마스의 2차 내한과 관련하여 확인해야 할 또 하나는 토마스가 제너럴 셔먼호에 어떤 자격으로 승선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가 셔먼호에 승선한 목적이 통역이라고 당시 토마스 관련 편지 문헌들에 등장하고 대부분의 2차 자료들이 이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64 한규무는 토마스가 통역이었다고 단정하지만 고종실록은 “최난헌이라는 사람은 중국말을 잘 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도 조금 알고 있었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도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있어서 의사소통은 전적으로 이팔행이라는 사람한테 맡겼다”65고 기록하고 있다. 토마스는 제너럴 셔먼호 대리점인 메도스 회사가 1866년 10월 27일 북경주재미국공사 버닝게임에게 보낸 보고서에 “선객”이라고 명시되었고,66 박규수 문집과 기타 자료에도 그렇게 명시되었다. 오문환은 “도마스 목사가 통역이엿다는 말은 와전된 것이 명확하다”고 주장한다.67 오문환은 또한 토마스가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것이 항해사나 한국어 습득 목적이 아니라 순수한 선교사역을 위해서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는 항해사로 입국한 것도 한국어를 배우려고 입국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 이 나라에 개신교 선교회를 세위기 위해 완벽한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68
 
메도우 회사가 공식적으로 벌링게임에게 보낸 편지에서나 그리피스가 자신의 저서에서 토마스가 한국어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필자가 볼 때 이것은 설득력이 약하다.69 토마스의 셔먼호 탑승이 만약 단순히 한국어 습득을 목적으로 했다면 지푸에 있을 때 그곳으로 피신해온 조선 천주교인들을 통해 얼마든지 한국어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무역 거래를 위해 단기간 입국하면서 얼마나 한국어를 증진시킬 수 있는지 의문인데다 토마스가 1866년 1월 12일자 편지에서 1865년 9월 한국을 방문해 2개월 반 동안 머무는 동안 복음전도에 필요한 한국어를 충분히 습득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승선 목적이 통역과 안내자이지만 그를 다른 서양승무원들과 달리 선교사라고 보고되었고, 그의 1차 내한이나 활동 그리고 사고가 나기 전에 그가 남긴 여러 기록들을 종합할 때 그가 셔먼호에 승선한 것은 선교 목적이 주였다고 보아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면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1) 한국인들에게 성경을 반포할 목적으로 여러 권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입국했다. (2) 문정관에서 야소교 전파에 대한 것을 무역과 함께 조선 입국 목적으로 밝히고 있다. (3) 1차 내한 때도 그랬지만 그는 2차 내한 때도 여러 권의 성경을 가지고 입국해서 성경을 반포했다. (4) 셔먼호 일반 승무원 19명 가운데는 중국인 권서인도 포함되었다. (5) 그의 조선 선교활동을 뒷받침하는 사료들과 증언자들이 있다.토마스는 제너럴 셔먼호의 조선 입국 소식을 들었을 때 이것이야말로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토마스의 방문과 활동 그리고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지 않는 이들은 토마스와 제너럴 셔먼호의 입국목적과 행동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한데 토마스의 제너럴 셔먼호 승선 동기와 목적을 제너럴 셔먼호의 한국 방문 목적이나 동기와 동일시 할 수 없다. 또한 그가 쇄국정책 하에 이런 범선을 타고 조선에 입국한 것이 사려 깊지 못하고, 위험하고 잘못된 행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탑승 자체를 가지고 한국선교에 대한 그의 열정 자체를 폄하하거나 제국주의 침략에 편승하거나 수종든 침략자로 치부하는 듯한 평가는 비약이다. 기독교 역사는 복음의 열정에 불타는 사람들 가운데 종종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복음전파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전파가 금지된 쇄국통치 하에서 정부의 허락을 받고 합법적인 신분을 가지고 입국해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토마스가 합법적인 선교사 신분으로 선교사 전용 선박을 타고 합법적인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선교를 했어야 한다면, 또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을 제기 한다면, 정부의 허락 없이 불법으로 입국해 프랑스 군대가 침입해서라도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려고 했던 프랑스 신부들, 프랑스 침략선의 노골적인 안내원을 자청했던 신부들이나 여기에 동조한 조선인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왜냐하면 황사영의 백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또 프랑스 선교사들과 사제들이 실천에 옮겼던 것처럼 노골적인 침략적 제국주의적 패권주의가 19세기 천주교의 조선선교 과정에서 만연했기 때문이다. 1866년 7월 13일 북경 주재 프랑스 대리 대사 M. de Bellonet는 황태자 쿵(Prince Kung)에게 조선 정부가 천주교 신부들과 신자들을 처형한 것을 묵과하지 말고 응징하라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폐하의 정부는 그 같은 유혈의 만행을 징벌하지 않고 내버려 둬서는 안될 것입니다. 조선의 왕이 나의 불행한 동포들에게 손을 댄 바로 그날 그의 통치는 마지막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종말을 선언하였으며, 나는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고 엄숙히 선언합니다. 며칠 안에 우리 군대가 조선을 정복하려 진군할 것이며 나의 존엄하신 황제께서만이 그의 선한 기쁨에 따라서 이제 그 나라와 공석중인 왕좌를 제거시킬 권리와 힘을 가지셨습니다.70
 
프랑스 신부들과 지도자들의 제국주의적 사고는 한국의 천주교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에 대한 그리피스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과 그 밖의 아시아에서의 로마 가톨릭의 전도방식의 윤리적 약점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 회심자들은 교황의 교회 절대권만 아니라 하늘 대리자(the Vicar of Heaven)로서의 세상의 일시적 권세에 대한 교황의 주장의 정당성을 믿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신약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들과 의심할 바 없이 예수님의 말씀 곧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어지지 않게 하였으리라”는 사실에 무지했다. 한국인들은 교황제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후에 부르봉 통치 하에 강력한 유럽의 국가들에 의해 옹호되는 교황의 정치적 권세를 목도하면서 한국의 천주교인들은 자신들의 선생들의 윤리를 답습해 자신들의 조국에 배반자로 활약하였고, 따라서 그들은 정부 관리들을 속이고 자신들의 조국의 법률을 범했으며, 황사영의 백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천주교의 포교와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 군대가 무력으로 침략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로마 가톨릭은 애국주의적 사고에 있어서 반역행위나 강도행위와 관련이 있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프랑스 군대와 침략자의 선봉으로, 프랑스 사제들이 포함(gunboat)의 안내자 역할을 한 것은 단순히 상상이 아니라 차후의 설명이 보여주듯 엄격한 논리며 실제적 사실이다. 주교가 프랑스 전함에서 스파이와 안내자로 활동했고 신부들이 약탈을 위한 안내자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적들의 진술이 아니라 그들의 친구들의 진술이었다. 따라서 [조선에서] 교황의 기독교[로마 가톨릭]의 이야기는 불가피하게 ’프랑스 원정‘이었다.71
 
그리피스는 수많은 사료들을 동원하며 이 사실을 매우 설득력 있게 논증해 나갔다. 필자는 호교론적 시각을 가지고 천주교의 한국선교를 의도적으로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객관적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최근 일부 진보주의 역사관을 가진 비평 학자들이 토마스에게 적용하는 동일한 평가 기준을 천주교 신부들과 조선 천주교인들의 죽음에는 달리 적용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72
토마스의 제 2차 조선입국과 관련하여 더 큰 문제는 지나칠 정도로 토마스가 한국선교를 낙관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가 순교하기 전 조선을 향해 떠나면서 런던 선교회에 보낸 1866년 8월 1일 지푸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에 짙게 담겨져 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생각을 하니 얼굴이 달아올라 희망에 부풉니다.” 토마스는 조선인들이 자신의 한국방문을 대대적으로 환영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1차 방문 때 조선인들이 보여주었던 복음에 대한 반응과 환대 그리고 그가 얻은 여러 정보들을 통해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마스의 한국선교는 다음 몇 가지 면에서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첫째, 주지하듯이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반 외국인 정서(anti-foreign feeling)가 정점에 달하고 있었다. 둘째, 당시 조선에는 불란서 함대가 조선을 공격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팽만했고, 조선 사람들이 외국인이라면 모두 불란서인으로 인식할 정도로 반불란서 정서가 충천했다. 셋째, 비록 상선이라고 하지만 중무장을 한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고,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었다.73 토마스가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런던 선교회 총무 멀린스(J. Mullens)가 “무장한 선박을 타고 조선에 나간다니 이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요, 더욱이 당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곧 북경에 돌아와서 당신에게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십시오”74라고 경고성 편지를 서둘러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편지가 도착하기 전 토마스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조선을 향해 떠났다.
 
III. 제너럴 셔먼호 입국과정과 관련 고종실록과 기타 국내 사료 문제
 
필자가 볼 때 토마스의 제 2차 내한 선교문제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제너럴 셔먼호의 입국과정에 대한 세밀한 일정 검토, 선교 관련 기록, 그리고 사료의 객관적 검토이다. 그것은 입국 동기는 물론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고종실록〉에 있는 제너럴 셔먼호 관련 기록은 보고 형식이기 때문에 보고서가 그렇듯이 사건 발생 장소와 날자가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었다.75 〈고종실록〉에 있는 제너널 셔먼호 사건 기록에 담겨진 셔먼호 입국 과정을 먼저 면밀하게 검토한 후 선교관련기록과 〈고종실록〉의 사료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76
 
1. 고종실록의 제너럴 셔먼호 입국과정 문제
 
1866년 7월 29일 제너럴 셔먼호가 천진을 출발할 때 그 배에는 토마스, 프레스턴, 윌슨, 페이지 등 4명의 외국인들만 승선했다. 그러다 지푸에 도착하였을 때 영국인 호가스(Hogarth)를 화물관리인으로 그리고 메도우 회사 소속 한 관동사람 금전교환인(a Cantonese schroff)을 승선시켰다. 이 배에는 북경의 중국 기독청년 조능봉도 승선했다. 1866년 8월 9일[음력 7월 1일] 지푸를 떠날 때 제너럴 셔먼호에는 5명의 외국인들과 중국인[청나라]과 말레이시아인 19명 등 총 24명이 승선했다.77 1866년 8월 9일[음 7월1일]부터 8월 16[음 7월 7일]일까지의 1주일 간의 일정을 재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이 기간 제너럴 셔먼호는 백령도, 초도곶, 석도를 거쳐 대동강을 향해 항해를 계속했다.78 민경배는 8월 16일[음 7.7] 셔먼호가 평남 용강현 다미면 영주포에 도착했다고 기록하나 고종실록에는 이 부분이 나타나지 않는다.79
 
(1)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8일[8월 17일] - 황주목 삼전면 송산리
 
〈고종실록〉 3권 음력 1866년 음력 7월 15일[양력 8월 24일]에 황주목사 정대식이 올린 보고에 의하면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음력 7월 8일[8월 17]일에 대동강 어귀의 황해도 황주목(黃州牧) 삼전방(三田坊) 송산리(松山里)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제너럴 셔먼호가 관리들에 의해 처음으로 목격된 것이 바로 이날이었다.
 
“황주목(黃州牧) 삼전방(三田坊) 밖에 있는 송산리(松山里) 앞바다에 이양선(異樣船)이 와서 정박하였습니다. [음력 7월] 8일 인시(寅時)쯤에 곧 이양선(異樣船)이 정박하고 있는 곳까지 가서 형리(刑吏)인 이기로(李耆魯)와 영리(營吏)인 신몽신(辛夢辰) 등으로 하여금 우선 지방관이 사정을 묻는 이유를 말하게 하였더니, 와서 만나보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들의 배 가까운 곳에 우리 배를 정박시켰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쪽 사람들 수십 명(名)이 각기 총칼을 지니고서 뱃머리에 정렬해 선 다음 비로소 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80
 
인시는 새벽 3시 30분에서 5시 30분까지를 지칭하는 것이다. 음력 7월 8일[8월 17일] 이른 새벽 이양선 제너럴 셔먼호가 나타나자 황주목사 정대식이 그곳으로 황급히 달려가 승선해 글로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를 물었다. 이 때 제너럴 셔먼호는 백령도, 초도곶, 석도를 거쳐 송산리 앞바다까지 항해했다는 사실과 배와 승객들이 어느 국가 출신인지를 밝혔다. “우리들은 서양의 세 나라 사람들입니다. 윗자리에 앉은 토마스 [崔蘭軒 : Thomas, Robert Jermain]와 호가스[何.特]는 다 같이 영국 사람이며, 프레스톤[普來屯]은 미국 사람이며, 뻬지[巴使]는 덴마크 사람입니다.” 〈고종실록〉에는 이들 4명이 셔먼호에 혹 기대어 앉거나 혹은 배의 고물에 앉은 후에 문정관들에게 함께 앉자고 제안하였다고 한다. 셔먼호에는 다섯 명의 외국인이 탔는데 4명만 기록하고 있다. 윌슨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문정관이 배에 오른 것을 보면 셔먼호가 정박했고, 한국인들과의 첫 만남을 갖는 공식적인 자리라 다 모였을 텐데 왜 1명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지 알 수 없다.81 또 하나 〈고종실록〉의 기록에서 의문이 가는 것은 서면으로 문정을 했다고 하는데 “뻬지”를 덴마크 사람이라고 기록한 부분이다. 분명 프레스톤과 페이지, 그리고 윌슨은 미국 사람이고 토마스와 호가스는 영국 사람이다. 덴마크 사람은 외국인 다섯 명 가운데 1명도 없다. 그런데 〈고종실록〉에는 페이지가 미국 사람이 아닌 덴마크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고, 덴마크가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고 답한 기록도 등장한다. 국가간의 만남에서 국적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종실록〉은 가장 기본적인 국적 기록조차 정확하지 않다.82 공식적인 만남 첫날 문정기록부터 〈고종실록〉의 기록상의 정확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고종실록〉은 이들 서양인의 생김새를 기록하면서도 4명만 언급하고 있다. 토마스 그리고 동행한 인물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거의 모두가 움푹 들어간 눈, 높이 솟은 콧마루, 파란 눈, 노란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어, 확실히 서양인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었습니다. 그런데 토마스라는 사람은 중국말을 잘 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도 조금 알고 있었는데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도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있어서 의사소통은 전적으로 이팔행(李八行)이라는 사람한테 맡겼는데, 배 안의 일에 대해서는 그가 모두 주관하였습니다. 이른바 이팔행(李八行)과 조반량(趙半良)은 중국인들로서 영국인이 데려다가 자기 막료로 삼은 사람들이었으며 그 나머지 24명(名)은 혹 태국인이거나 광동(廣東) 상해현(上海縣) 사람들로서 길안내를 하거나 품팔이를 하거나 뱃사람 일을 하거나 하였는데, 모두가 종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물으려고 하니『우리 배 안의 일과 관계되는 것이지 당신들과는 관계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
“최난헌은 나이가 36살, 키는 7척(尺) 5촌(寸), 얼굴빛은 검붉고, 머리칼은 노란 곱슬머리이고, 수염은 검다. 옷차림은 회색 모자를 썼고, 검은 색과 흰 색의 반점이 있는 융으로 만든 저고리를 입었으며, 검은 색 목화(木靴)를 신었습니다. 허리 에 혁대와 자그마한 서양식 총과 환도를 찼습니다. 그는 문직(文職)의 4품 관리로서 영국인이었습니다.
호가스는 나이가 37살, 키는 7척, 얼굴빛은 검붉으며, 머리칼은 노랗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났습니다. 옷차림은 흰 서양 천으로 감싼 모자를 썼으며, 누런색의 견사(繭絲)로 만든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으며, 맨발에 등(藤) 줄기로 만든 신을 신었습니다. 혁대에 자그마한 서양식 총과 환도를 찼습니다. 그는 무직(武職)의 1품 관리로서 영국인이었다.
프레스톤은 나이가 48살, 키는 7척 5촌, 얼굴빛은 검붉으며, 머리칼은 노란 곱슬머리였으며, 흰 수염이 길게 났습니다. 옷차림은 검은색의 모자를 썼고, 흰 빛의 서양 무명으로 만든 저고리를 입었으며, 누런색의 견사로 만든 홑바지를 입고, 색실로 섞어 짜서 만든 신을 신었습니다. 혁대에는 자그마한 서양식 총과 환도를 찼습니다. 그는 무직(武職)의 1품 관리로 미국 사람이었습니다.
뻬지는 나이가 45살, 키는 7척 5촌, 얼굴빛은 붉고, 수염과 머리칼은 노란 곱슬이었습니다. 옷차림은 검은색 비단으로 감싼 모자를 쓰고, 자주색 융으로 만든 저고리와 흰 무명으로 만든 홑바지를 입었습니다. 검은색 가죽신을 신고, 혁대에는 자그마한 서양식 총과 환도를 찼습니다. 그는 덴마크 사람이었습니다.
이파행(李八行)의 나이는 30살이었고, 조반량(趙半良)의 나이는 28살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키가 7척이었고, 얼굴빛은 검붉고, 머리는 땋아 올렸고, 수염은 없었습니다. 옷차림은 흰 무명으로 만든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고, 검푸른 색의 삼승포(三升布)로 만든 신을 신었는데, 그들은 다 같이 청나라 사람이었습니다. 24명의 이름과 나이에 대하여 물어보니 토마스가 하인으로 범칭하면서 자세히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생김새와 옷차림, 머리칼과 수염은 모두 청나라 사람과 같은 모양이었습니다.”83
 
우리는 이 기록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첫째, 최난헌이 중국어에 대해서는 잘 구사를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 말도 조금 알고 있는 정도여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도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있어서 충분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팔행이 “전적으로” 의사소통의 책임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최난헌이 토마스와 동일 인물이라면 그가 통역의 자격으로 제너널 셔먼호에 승선해 입국하고 활동했다는 한규무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고종실록〉에서는 이팔행을 두 번이나 중국인이라고 밝히고 있다.84 앞으로 학자들이 이팔행이 누군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첫 문정을 기록한 〈고종실록〉에는 청국인이라고 언급되어 있으나 후에 중국예부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 내막을 알리면서는 11월 5일자 〈고종실록〉은 그를 덴마크 인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청국인과 서양 덴마크 인은 모습부터 다르다. 어떻게 한 곳에서는 청국인으로 다른 곳에서는 덴마크 인으로 기록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둘째, 배에 승선한 사람들이 몇 명이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외국인으로는 4명이고, 막료로 삼은 이팔행과 조반량 그리고 그 외 길 안내, 품팔이, 뱃사람 일을 위해 승선한 “종복” 24명으로 그들은 모두 태국인이거나 광동 상해현 사람들이었다고 기록했다. 〈고종실록〉에는 이날 제너럴 셔먼호 탑승자들은 입국 목적이 무엇인지를 문정관에게 선명하게 밝혔다.
 
『세 나라 사람들은 다 같이 장사를 하고 있으며, 이번 7월 1일 산동(山東)에서 출발하여 백령도(白翎島), 초도곶(椒島串), 석도(席島)를 거쳐 방향을 바꾸어 평양(平壤)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 배가 모양은 전선(戰船) 같지만 실은 통상(通商)을 하려고 한다. 귀국(歸國)의 종이, 쌀, 금(金), 삼(蔘), 초피(貂皮) 등의 물품을 우리들이 가지고 온 양포(洋布), 기명(器皿)들과 바꾸면 서로 해롭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을 것이다. 물품 교환이 일찍 끝나면 곧 평양에서부터 뱃머리를 돌리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면 비록 서울로 가더라도 통상한 뒤에야 돌아가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묻기를, 『이미 평양에 가서 통상을 하겠다고 하였는데 거기에 가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그에 호응하여 교역을 하는 자가 있는가?』라고 하니,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85
 
위 기록은 제너럴 셔먼호에 대해 상당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첫째, 제너럴 셔먼호가 음력 7월 1일[8월 10일] 산동성을 출발해서 백령도 초도곶 석도를 거쳐 음 7월 8일[8월 17일] 송산리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제너널 셔먼호가 보통 상선과 달리 “모양은 전선과 같지만” 상선이며 이들의 입국 목적이 통상이며, 목적지가 평양이라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제너럴 셔먼호가 침략을 목적으로 입국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실제로 제너럴 셔먼호 탑승 승무원들도 군인들도 아니고 침략을 목적으로 해서 모집한 이들도 아니었다. 셋째, 물물교환이 끝나면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평양에서 통상을 할 수 없다면 반드시 서울로 가서라도 통상을 관철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입국의 목적이 통상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86 “먼 바다에 와서 정박한다면 혹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들은 남의 나라 앞바다에까지 넘어들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본래부터 국법(國法)으로 금지되어 있는 만큼 앞으로 전진해갈 수 없다.”87 이에 제너럴 셔먼호는 “누가 감히 우리를 막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이내 “우리는 곧바로 가려고 한다. 만약 서풍을 만나면 바람을 따라 곧 떠나겠다.”88고 밝혔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종실록〉에 실린 보고서에는 제너럴 셔먼호가 어떤 외관을 갖고 있는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배의 모양은 길이가 18장(丈), 넓이가 5장, 높이가 3장이었고, 돛대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높이가 15장, 하나는 높이가 13장이었으며, 굵기는 세 아름 정도 되었습니다. 두 개의 큰 돛은 흰색이었으며, 돛대의 밧줄에는 또 작은 돛 두 개를 얽어매었는데 역시 흰색이었고, 숙마(熟麻) 줄을 돛대와 돛 좌우에 각각 12줄씩 늘어뜨려 놓았습니다. 나머지 배에서 사용 하는 잡다한 물건들에 대해서 모두 물어봤으나 저들이 글로 써서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잡다한 물품들과 기계들, 각 사람들의 소지품 외에도 배 안에 보관되어 있는 것들이 많았으나 보여주지도 않았고 또 자세히 대답해 주지도 않았으므로 그 수량을 맞추어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큰 배에 딸려 있는 작은 배는 길이가 3파(把), 넓이는 2파였으며 푸른색으로 칠하였는데, 돛대와 돛은 없었습니다.”
“배의 모양과 규격을 보면, 안은 하얗게 칠하고 밖은 검게 칠하였는데 그 위에 옻칠을 하듯이 기름을 발랐으며 위에는 흰 가루가 있었습니다. 사면을 판자로 만든 집이 두 칸 있었는데, 한 곳에는 관인(官人)들이 거주하고 한 곳은 종복들이 거주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판옥 벽면에 창문이 있었는데, 모두 유리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두 개의 돛대는 모 두 소나무로 만들었는데, 잘 다듬고 그 위에 기름칠을 하였으며, 배의 위에는 백양목의 네모진 깃발을 달아 세웠고, 돛 은 흰 색의 올이 굵은 서양 비단으로 만들었습니다. 좌우의 두 켠에 각각 대포(大砲) 1문씩을 설치하였으며, 하가(下架)와 목륜(木輪) 위에는 철통을 놓았는데 윗부분은 좁고 밑이 넓었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시범적으로 쏘아보였는데, 그 소리가 마치 요란한 천둥이 치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의 이목을 몹시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 밖에 또한 밤에 순찰할 때에 메는 장총이 3자루 있었는데, 총구멍 끝머리에 1척(尺)쯤 되는 칼이 꽂혀 있었습니다. 조총은 차고 다니는 자그마한 것과 메고 다니는 큼직한 것 등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환도(環刀)는 서양인 4명이 각각 한 자루씩 찼는데, 모두 번쩍번쩍 빛이 났습니다. 방안에는 책과 그림책, 금(琴)과 종(鍾), 고약(膏藥) 등 잡다한 물건 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한번 죽 훑어보아서는 이루 다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종복들이 거처하는 방을 보려고 하자, 예의상 가서 볼 필요가 없다고 하며 막고서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배 밑에는 작은 배를 매어 놓았는데, 우리나라의 작은 고깃배 모양이었으며 푸른색이었습니다. 거기에 실은 물품들은 양목 (洋木) 등 무역할 물품들이라고 말하였으나, 배 안은 보지 못하게 하여 물품을 실은 실태와 그 수량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었습니다.”89
 
〈고종실록〉은 제너럴 셔먼호가 어떤 모양을 갖추었는지, 얼마의 규모인지를 밝히고 있다. 돛대가 둘이고, 길이가 18자[54.54m], 넓이가 5장[15.15m], 그리고 높이가 3장[9.09m]이었다. 게다가 제너럴 셔먼호에는 상당한 무기들이 탑재해 있었다. 무엇보다 대포가 장착되었다.90 이날 문정관에게 셔먼호는 “청하건대 당신들이 사람을 보내서 우리에게 대미(大米), 우육(牛肉), 닭, 청채(菁菜), 시목(柴木) 등의 물품을 준다면 양포(洋布)로 답례하겠다.”고 부탁했다. 그러자 문정관은 어쩌다 표류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우라면 고려할 수 있지만 “서양인들이 함부로 우리나라 앞바다에까지 넘어 들어온 것은 뜻밖의 일이라 또한 아랫사람으로서 마음대로 처리하기에 곤란한 점이 있었다.”고 답했다. 식량을 요구하자 “이처럼 외진 마을에서 갑자기 그런 물품을 마련하는 것은 어렵고 또 순풍을 기다려서 곧장 출발한다는 것은 더욱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다.”고 대답했다. 최난헌이 제공해줄 의사가 있다면 줄 수 있을텐데 의사가 없는 것 같다며 성낸 표정으로 문정을 하던 종잇장을 접어서 품에 넣고 떠나자고 재촉하자 문정관은 “어쩔 수 없이 떠나는 배에서 곧 마련해 보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최난헌이 “화를 풀고 기뻐하면서 문정(問情)을 하던 종잇장을 꺼내주고는 다시 물품을 보내주면 틀림없이 답례하겠다.”고 말하였다. 문정관은 “꼭 답례할 것까지는 없다고 말하고, 대미 1석, 우육 30근, 계자 60알, 청채 20묶음, 시목 20단을 헤아려서 들여보냈다.” 지방관리로서는 최선을 다해 제너럴 셔먼호에 호의를 베풀어 준 것이다.
 
(2)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9일(양력 8월 18일) - 송산리 출발
 
〈고종실록〉 음력 7월 15일[8월 24일]자 황주 목사 정대식이 올린 첩보 기록에 의하면 음 7월 9일[8월 18일] 오후 3시 30분과 5시 30분 사이 즉 신시에 제너널 셔먼호는 송산리를 출발해 평양으로 떠나갔다. 황주 목사 정대식은 쌀과 고기 등 물품을 배에 싣고 제너럴 셔먼호에 가서 물품 제공의사를 전달했다. 물품 제공 이 면에는 동정을 탐색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제너럴 셔먼호가 나타나자 그 지역 지방 관리들은 각 고을에 이양선의 소식을 전하고 감시와 방어를 할 것을 공문으로 전달했다.
 
(3)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9일 저녁~11일[8월 18~20일] 오후 - 평양 초리방 사포구
 
음력 7월 9일 오후 송산리를 출발한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고종실록〉은 7월 9일 저녁부터 7월 11일 술시(저녁 7시 30분-9시 30분) 이전까지 2일 동안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다만 제너널 셔먼호가 7월 11일에 평양 초리방 사포구에 정박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아마도 셔먼호는 음력 7월 9일 저녁에 평양 초리방 사포구에 도착하여 그곳에 정박하여 7월 11일 오후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셔먼호가 어느 다른 곳에 정박했다면 분명히 보고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11~12일 [8월 20~21일] - 평양부 신장포구
 
〈고종실록〉의 1866년 음력 7월 18일자[양력 8월 27일] 평양 병사 이용상이 평양 서윤 신태정에게 한 보고에 의하면 이용상과 신태정이 음력 7월 11일[8월 20일] 저녁 7시 30분-9시 30분 사이에 확인하니 초리방 사포구(草里坊沙浦口)에 정박해 있던 제너럴 셔먼호는평양부 신장포구로 옮긴 상태였다. 이용상과 신태정은 너무 시간이 깊어 그 다음날 음 7월 12일[8월 21일] 오전 7시 30분-9시 30분에 배에 올라 문정을 했을 때 제너럴 셔먼호는 이렇게 답변했다:
 
“이양선(異樣船) 1척 이 평양 경내의 초리방 사포구(草里坊沙浦口)에 와서 정박하였으므로 11일 술시(戌時) 쯤에 그들의 배가 정박하고 있는 곳에 가보니, 이미 본 평양부의 신장 포구(新場浦口)로 옮겨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벌써 밤이 깊었기 때문에 12일 진시(辰時)에 그곳에 달려가서 문정(問情)을 하니, 서양 사람으로서 자기들은 단지 통상과 무역을 하려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역하는 한 가지 문제로 말하면 법적으로 엄하게 금지되어 있으며, 또한 지방관 이 마음대로 허가해 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7월 12일[8월 21일] 유시(酉時)에 그 나라 사람 6명이 작은 푸른색 배를 타고 물깊이를 탐지하기 위해서 상류로 올라갔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다.”(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18일) 유시는 저녁 5시 30분에서 7시 30분 사이를 가리킨다.”91
 
여기서도 제너럴 셔먼호는 통상과 무역이 입국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재차 밝혔다. 중무장을 한 상선으로 계속해서 의심의 눈총을 받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셔먼호는 계속해서 자신들의 입국 목적이 통상과 무역이라는 사실을 전달했다. 우리는 〈고종실록〉에 이 사실이 분명히 명기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외국과의 무역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게다가 지방관리가 마음대로 허가해 줄 수 있는 사항은 아니었다.92
 
(5)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13일[8월 22일] - 평양 만경대 아래 두로도
 
“그리고 7월 13일 인시(寅時)에는 배를 출발시켜 본 평양부 만경대(萬景臺) 아래 두로도(豆老島) 앞에까지 다다랐는데 그대로 그곳에 정박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떠나고 머무는 것과 일의 경위에 대해서는 계속 탐지하여 치보(馳報)를 올리겠습니다.’ 라고 아뢰었다.”93
 
제네럴 셔먼호의 음력 7월 13일의 행동을 잘 보여준다. 셔먼호는 전날 6명이 물깊이를 탐지하기 위해 상류로 올라갔다 날이 저물어 돌아와서는 그 다음날 음력 7월 13일[8월 22일] 새벽 인시[새벽 3시 30분-5시 30분]에 이동을 해서 만경대 아래 두로도에 정박했다. 두로도에서 셔먼호가 며칠을 정박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신태정이 음력 7월 19일에 가서야 이양선 한 척이 한사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고 보고한 것을 보면, 제너널 셔먼호는 만경대 아래 두로도 앞에 적어도 5일 이상을 정박했던 것으로 보인다.94 이 기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고종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문환은 이 기간 목격자들을 인용하여 토마스가 성경과 기독교 문서를 전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95 한국측 다른 문헌에 이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6)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18일 [8월 27일]-평양 양각도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19일 [8월 28일]-평양 황강정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2일]
 
7월 13일 새벽 만경대 아래 두로도로 이동한 후에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에 대해 〈고종실록〉이 다시 언급한 것은 5일이 지난 음력 7월 18일의 행적이다. 〈고종실록〉 음력 7월 22일[양력 8월 31일] 신태정의 보고에는 제너럴 셔먼호 관련 기록이 담겨져 있다.
 
평안 감사(平壤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에, “방금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이 이달 19일 술시(戌時)에 치보(馳報)한 것을 보니, ‘큰 이양선(異樣船) 1 척이 한사정(閒似亭)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으며, 어제[7월 18일] 유시(酉時)[17:30∼19: 30] 쯤에는 그들 6명(鳴)이 작은 푸른색 배를 타고 점점 위로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에 순영중군(巡營中軍)은 그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타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갑자기 오더니 중군이 타고 있던 배를 끌어갔고 중군을 그들의 배 안에 억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윤(庶尹)이 그들의 배 옆에 가서 밤새도록 효유(曉諭)하였지만, 끝내 돌려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그[다음]날[19일] 사시(巳時)[9: 30∼11:30] 쯤에 그들의 배가 또 출발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대완구(大碗口)와 조총을 마구 쏘아댔으며 황강정(黃江亭) 앞에 이르러 그곳에 정박하였습니다. 그 후 그들 5명은 작은 푸른빛 배를 타고 물의 깊이를 탐지하기 위하여 오탄(烏灘) 일대를 거슬러 올라갔는데 온 성안의 백성들이 강변에 모여들어 우리 중군을 돌려보내 달라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들이 성안에 들어가서 분명히 알려주겠다고 하자, 모든 사람들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돌을 마구 던졌으며, 장교와 나졸들이 혹 활을 쏘아대기도 하고 혹은 총을 쏘아대기도 하며 여러 모로 위세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도망쳐 돌아갔으며 그 큰 배는 이에 양각도(羊角島) 하단(下端)으로 물러가서 정박하였습니다. 신시(申時) 쯤에 퇴직한 장교 박춘권(朴春權)이 앞장서서 배를 타고 그들의 배에 돌진해 들어가 중군을 구원해가지고 돌아왔는데, 중군이 찼던 인장이 물에 떨어져 분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군이 잡혀갈 때 따라간 시종 유순원(兪淳遠) 과 통인(通引) 박치영(朴致永)은 그들이 배에서 강물 속에 던져 넣은 후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중군이 자기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수치를 끼친 데 대해서는 더 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선 파출(罷黜)시키고 그의 죄상에 대해서는 유사(攸司)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중군(中軍)이 그들 배에 붙잡혀가 곤욕을 당한 것은 그 잘못한 바를 논하여 마땅히 엄하게 감처(勘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이 뜻밖에 벌어져 미처 손 쓸 수가 없었으니, 이는 우직하고 지략이 부족한 소치에 지나지 않으니 또한 어떻게 깊이 책망할 것인가? 그러나 수치를 끼친 것은 크니, 그 벼슬에서 체차시키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양주태(梁柱台)를 차하(差下)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되, 조정에 사직하는 것은 그만두고 역마(驛馬)를 주어 밤을 새워 내려가게 하라. 퇴직 장교 박춘권이 앞장서서 있는 힘을 다하여 그들의 배에 뛰어들어가 중군을 구출해서 돌아온 것으로 말하면, 그 공로가 가볍지 않으며 매우 가상(嘉尙)한 일이다. 그런 만큼 은전을 보이지 않을 수 없어서 특별히 상가(賞加)하니 오 위장(五衛將)을 가설(加設)하여 단부(單付)하도록 하라.” 하였다.96
 
〈고종실록〉에 수록된 이날 기록을 시간의 선후관계를 고려해가면서 면밀하게 검토하다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음력 7월 18일 제너럴 셔먼호의 몇몇 승무원들이 셔먼호를 감시하던 중군이 타고 있던 배를 끌고 가서 그를 셔먼호에 억류했다. 둘째, 같은 날 서윤 김태정이 제너럴 셔먼호에 가서 중군을 풀어달라고 밤새 간청했는데도 돌려주지 않았다. 셋째, 그 다음날 음력 7월 19일 사시에 제너럴 셔먼호는 황강정으로 가면서 대완구와 조총을 마구 쏘았다.97 넷째, 같은날 음력 7월 19일 황강정에 정박한 후 5명이 푸른 배를 타고 물의 깊이를 탐지하기 위해 오탄 일대를 거슬러 올라갈 때 강변에 모인 온 성안의 백성들이 “중군을 돌려달라”고 외쳤고, 이 때 제너럴 셔먼호는 성안에 들어가서 정확히 답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에 화가 난 민관들이 돌, 화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다섯째, 셔먼호 일행 중 일부가 제너럴 셔먼호로 돌아갔고 이어 셔먼호가 음력 7월 19일 양각도 하단으로 이동했다. 여섯째, 바로 그날 음력 7월 19일 양각도 하단에 정박해 있을 때 박춘권이 신시에 제너럴 셔먼호에 올라 중군을 구출해 왔다.98
여기 중군이 누구인지 다른 기록은 이익현이라고 밝히고 있다. 중군 이익현은 제너럴 셔먼호에서 이틀을 볼모로 잡혀 있다 구출된 셈이다. 중군 이익현을 볼모로 잡고 간청하는데도 불구하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를 볼모로 성안에 들어가 협상하겠다는 것은 민관군을 지극히 자극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장교와 나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활을 쏘고 총을 쏘며 맞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다. 어떻게 이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제너럴 셔먼호 측에서 남긴 자료가 전혀 없어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이익현을 볼모로 가두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제임스 게일이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1895년에 기술한 “제너럴 셔먼호 운명”(The Fate of the General Sherman)에는 조선군이 무장 태세를 갖추는 것을 보고 경계해서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이라고 기록했다.99 〈패강록〉에 따르면 문정에 나선 진사 안상협의 배가 중군 이현익의 배보다 앞서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했을 때 소청선이 이들을 납치하여 휴대한 공식문서를 탈취해 번역하니 셔먼호 모든 승무원들을 평양으로 유인 상륙시켜 몰살시키라는 계획을 탐지하고는 승무원들이 놀라 순시대장 이익현을 억류해 셔먼호에 가두게 되었다.100 〈평양지〉에는 제너럴 셔먼호에서 글을 보내 중군과 상의할 것이 있다고 유인한 뒤에 억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밀톤(Floyd E. Hamilton)의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에 의하면 제너럴 셔먼호를 방문한 중군 이현익의 인신을 탈취하고 나서 반환을 요구하자 그를 억류했다.101 〈통문관지〉는 제너럴 셔먼호 승무원들이 중군 이익현을 풀어주는 대신 쌀과 금, 은, 인삼 일천 자루를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오문환은 평양감사 박규수와의 협상을 요구하기 위한 일환이었다고 말한다.102 이 때 어떤 기록에 의하면 선주 프레스톤이 이익현을 계속 볼모로 잡아두려하자 토마스가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국내 각각의 문헌들이 달리 기록하고 있다.
국내 자료들이 사건 기술에서 통일성이 없기는 박춘권의 잠입과 이익현의 구출과정도 마찬가지이다. 〈고종실록〉은 위 기록에 있듯이 제너널 셔먼호가 양각도에 정박해 있을 때 박춘권이 잠입해 구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패강록〉에는 퇴교 박춘권이 중군의 아들로 변장해서 셔먼호에 올라 강변의 군민들이 공격을 하자 셔먼호 승무원들이 중군에게 공격을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신인을 돌려받은 뒤에 중군 이익현이 박춘권이 대기시켜 놓은 배로 뛰어 내려 탈출했다고 기록한다. 〈평양지〉에 따르면 박춘권이 제너널 셔먼호에 접근하여 장문의 편지를 던진 뒤 그 편지를 선원들이 읽는 사이 중군을 구출했다.103 다른 기록과 달리 게일의 “제너럴 셔면호의 운명”은 박춘권이 먼저 화공작전을 전개했고, 혼란한 틈을 타서 박춘권이 제너럴 셔먼호에 잠입하여 중군 이익현을 구출했다고 말한다.
신인을 잃어버린 것도 기록에 따라 상이하다. 〈고종실록〉은 중군이 탈출할 때 물에 빠뜨려 분실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패강록〉은 중군이 가지고 탈출한 것으로 그리고 〈평양지〉는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화공이 시작되기 전에 토마스가 관가에 찾아와 반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박춘권이 이익현을 구출하는 구출과정, 신인의 분실과 취득에 대해서도 국내 사료들이 약간씩 차이가 있고, 어떤 자료는 일어난 사건의 순서마저 다르게 기록되었다. 셔먼호 관련 국내 사료들 대부분이 다량의 출판이 아닌 개인들이 친필로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고 소문을 들은 정보에 근거하여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사건의 순서가 바뀌고 사건의 묘사와 기술이 서로 다르게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7) [고종실록] 1866년 9월 3일[음력 7월 25일]-평양 방수성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5일]
 
7월 18일[8월 27일] 제너널 셔먼호가 이익현을 볼모를 잡아둔 이후 심각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상호 대치 국면과 발포과정에 대해서도 국내 자료들이 약간씩 다르게 기술되었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중군 이익현을 납치하고 돌려주지 않자 “모든 사람들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돌을 마구 던졌으며, 장교와 나졸들이 혹 활을 쏘아대기도 하고 혹은 총을 쏘아대기도 하며 여러 모로 위세를 보였다.”104 먼저 발포하고 활을 쏜 쪽은 조선군 쪽이다. 게일의 “제너럴 셔먼호의 운명”에 보면 중군 이익현이 납치당한 뒤 조선군이 먼저 발포했고,105 〈패강록〉에도 퇴교 박춘권이 중군 이익현을 구출하려고 제너널 셔먼호에 접근했을 때 조선군이 셔먼호를 향해 먼저 발포하였다. 그리고 〈평양지〉도 중군 이현익이 납치를 당한 뒤 소청선이 강변에 접근할 때 조선군이 먼저 발포했다고 기록하였다. 〈고종실록〉, 게일의 〈제너럴 셔먼호의 운명〉, 〈패강록〉 그리고 〈평양지〉 모두 제너널 셔먼호와 조선군 사이의 대치 국면에서 먼저 발포한 쪽은 조선군 쪽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단 시작된 양측의 치열한 대치와 싸움은 강도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얼마나 심각하게 대치국면이 전개되었는지는 9월 3일[음 7월 25일] 〈고종실록〉의 기록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를 보니, ‘평양 방수성(防水城)에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이 상선을 약탈하며 총을 쏘아대는 통에 우리 사람 7인(人)이 피살되었고 부상자 또한 5인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감영 (監營)과 평양부(平壤府)에 신칙하여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대처하게 해서 곧 소멸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번에 멀리 있는 나라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의리로써 좋은 뜻으로 타이르고 식량을 넉넉히 주어 그들을 도왔는데, 도리어 갈수록 더욱 더 포악한 짓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중군(中軍)을 잡아다가 억류하였고, 나중에는 또 백성들에게 까지 상해를 입혔으니 어떻게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군사(軍事)와 관련된 모든 일은 도신(道臣)에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좋을 대로 처리하게 하여 모두 무찔려 없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6
 
우리는 여기 〈고종실록〉에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제너럴 셔먼호가 상선을 약탈하고 총을 쏘아 7명이 피살되고 부상자가 5명이 발생했다. 정확히 언제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은 〈고종실록〉의 제너럴 셔먼호와 관군의 대치과정을 면밀히 검토하다보면 이익현을 볼모로 붙잡아 둔 사건으로 인해 민관과 제너럴 셔먼호 사이에 전투를 벌이면서 생겨난 일인 것이 분명하다. 서윤 (庶尹)의 간절한 요구도 무시하고 백성들의 석방 요구도 무시한 상황에서 박춘권이 중군을 구출해 오자 관군들의 사기가 대단히 높아졌고, 음력 7월 19일부터 7월 25일까지 제너럴 셔먼호와 민군관의 싸움이 강도 높게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급한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를 무찔러 없애기로 결심하고 대원군에게 이를 윤허해 줄 것을 요청해 음력 7월 25일[9월 3일]에 윤허가 떨어졌다. 이 사건이 발생하고 불과 13년 후 존 로스는 〈한국, 역사, 예절, 관습〉(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에서 “유럽인들은 며칠 동안[얼마 동안]은 친절한 대접을 받았으나 수도 서울로부터 전갈이 온 후에는 승무원들이 해변으로 유인되어 죽임을 당했으며, 배[셔먼호]는 포위되어 불탔다”고 증언한다. 수도 서울로부터 대원군의 전갈이 온 후 제너럴 셔먼호를 대하는 군관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누가 먼저 공격을 했는가 하는 것과도 맞물려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107 “감사의 습격”으로 토마스가 순교했다는 초기 평양교회 지도자들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108 그리피스는 그의 책 〈한국, 은둔의 나라〉에서 셔먼호와 조선군관의 대치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는 대포로 무장한 셔먼호 “무장범선이 프랑스 배로 분명히 인식되었을 수 있으며 따라서 애국적 복수심의 대상이 되었다”109는 사실이다. 이는 제너널셔먼호가 평양까지 입국한 것을 천주교 박해에 대한 프랑스 함대의 공격으로 자연스럽게 인식되어 조선 군관이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관련 기록들은 분명히 제너널셔먼호를 대하는 조선군관 측의 태도가 처음과 나중이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8) [고종실록] 1866년 9월 5일[음력 7월 27일]-평양 양각도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7일]
 
음력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제너럴 셔먼호와 민관군 사이에 더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식량도 충분하지 않고 훈련된 군인들을 데리고 온 것도 아닌데다 전투요원으로 동원할 수 있는 사람도 불과 2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또 그 즈음에는 주변지역은 물론 조선 전역에서 훈련된 활사수와 포수까지 착출되어 온 상황에서 조선군관과 맞서는 것은 아무리 중무장을 한 범선이라고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런데다 홍수로 물이 불어 대동강을 거슬러 양각도까지 올라 갈 수 있었던 제너널 셔먼호가 급격하게 물이 빠지는 바람에 양각도 모래사장에 그만 좌초하여 배가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군관의 대치 속에 배라도 기동성이 있어야 할 텐데 제너럴 셔먼호는 젼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미 제너럴 셔먼호를 무찔러 없애기로 결정한 박규수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화공전술을 통해 제너널 셔먼호에 불길이 번져가게 만들었다. 제너럴 셔먼호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1866년 음력 7월 27일[9월 5일] 고종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에, “평양부에 와서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에서 더욱 미쳐 날뛰면서 포를 쏘고 총을 쏘아대어 우리 쪽 사람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들을 제압하고 이기는 방책으로는 화공전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일제히 불을 질러서 그 불길이 저들의 배에 번져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쪽 사람들인 촤난헌(崔蘭軒)과 조능봉(趙凌奉)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비로소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므로 즉시 사로잡아 묶어서 강안으로 데려왔습니다. 이것을 본 군민(軍民)들이 울분을 참지 못해 일제히 모여들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도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그제야 온 성안의 소요가 비로소 진정될 수 있습니다.”110
 
이날(1866년 음력 7월 27일[ 9월 5일]) 〈고종실록〉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조선군과의 대치 속에서 제너럴 셔먼호가 포를 쏘고 총을 쏴서 조선 사람들을 살해했다. 둘째, 양각도에 좌초를 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제너럴 셔먼호가 화공전술의 공격으로 인해 불타올랐다. 셋째, 셔먼호에 타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를 묘사해주고 있다. 〈고종실록〉은 “저쪽 사람들인 최난헌(崔蘭軒)과 조능봉(趙凌奉)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비로소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므로 즉시 사로잡아 묶어서 강 안으로 데려왔다.”고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이 눈에 정확히 들어오지 않는다. 케이블(E. M. Cable)은 〈고종실록〉 해당부분을 시각적으로 잘 번역하였다.
 
“평양에 정박한 외국 범선이 무자비하게 우리 백성에게 총을 쏘고 죽이고 부상을 입혔습니다. 범선을 파괴시킬 수 있는 책략을 숙고한 후 최종적으로 불타는 나룻배들을 사용하여 불을 지르는 시도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불타는 배가 그 범선에 닿아 불이 번지자 최난헌과 조능봉이 범선 뱃머리로 나와 거의 동시에 강물에 뛰어들어서는 자신들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체포되어 묶여져 강변으로 끌려왔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곧 성난 백성들과 군인들에 의해 매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이어 제너널 셔먼호 승무원 나머지 사람들도 죽여버렸습니다. 제너럴 셔먼호의 마지막 사람이 처형되었을 때 백성들의 분노와 흥분이 진정되었습니다.”111
 
이렇게 해서 제너럴 셔먼호와 그 배에 승선한 외국인 5명, 청국인과 말레이시아 인 19명 합 24명이 살해당했다. 조정에서는 셔먼호를 물리친 노고에 대해 관련자들에게 포상을 내렸다.112 〈고종실록〉은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이양선[셔먼호]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 보고 형식으로 간단하게 기록했다. 배에 승선한 사람들의 처형 순서가 토마스와 조능봉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로 기술하였다. 최난헌[토마스]이 조능봉과 함께 제너럴 셔먼호에서 먼저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훗날 그 현장의 증언자들의 증언과 어느 정도 연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토마스의 순교 상황 문제는 본 논문 후반부에 좀 더 상세하게 기술하려고 한다. 제너럴 셔먼호의 입국과정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 〈고종실록〉에 실린 제너널 셔먼호 선교관련 기록 문제
 
토마스의 제 2차 내한과 선교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종실록〉에 담긴 선교 관련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종실록〉은 조선 측의 입장을 중심으로 기술했기 때문에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토마스의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교와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고종실록〉은 음력 7월 12일[8월 21일] 문정관에게 최난헌이 종교적인 질문을 던진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최난헌〔崔蘭軒 : Thomas, Robert Jermain〕가 말하기를, 『귀국은 무엇 때문에 천주교인들을 쫓아내는가? 지금 우리 예수성교[耶蘇聖敎]는 천도(天道)를 체험하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여 나쁜 풍속을 교화시키기 때문에 인의충효(仁義忠孝)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종교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법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감히 마음대로 익히지 못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113
 
우리는 위 간단한 기록에서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최난헌은 매우 민감한 사항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문정관에게 서양종교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다. 둘째, 최난헌은 조선에서 천주교가 강한 박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잘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최난헌은 야소교가 천주교와 다르다는 사실을 문정관들에게 주지시키려고 했다. 특별히 야소교(개신교)가 동양사상이나 유교문화 그리고 심지어 동양의 정치질서와도 배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 사실은 “지금 우리 예수교[耶蘇聖敎]는 천도(天道)를 체험하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여 나쁜 풍속을 교화시키기 때문에 인의충효(仁義忠孝)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114는 기록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고종실록〉은 최난헌이 천주교에 대한 질문을 하고 야소교에 대해 설명한 인물로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115 문맥에서 볼 때 최난헌이 국가, 지방관리, 백성들이 천주교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인지하고 야소교가 천주교와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다분하게 느껴진다.
제너럴 셔먼호의 입국이 선교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과 관련하여 미국 정부가 중국을 통해 진상을 조선에 요구하자 조선정부는 중국 예부에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냈다.
 
“중국 예부(禮部)에 회답한 자문(咨文)에, … 7월에 평양부(平壤府)에 와서 정박하고는 장변(將弁)을 붙잡아가고, 백성들을 살해하며, 재물을 약탈해가고, 총포를 마구 쏘아대다가 얕은 물에 걸려 불에 타 침몰된 것은 곧 자칭 영국인 최난헌〔崔蘭軒 : Tomas, Robert Jermain〕, 덴마크인 리바항〔李八行〕과 오귀자〔吳鬼子〕 등입니다. 원래 미국인과 돛을 두 개 단 배 1척이 얕은 물에 걸려서 불에 타 버렸거나 선주와 배군 24인이 붙잡힌 일은 없는데, 이 번에 윌리엄스〔衛廉士 : Williams, S. W.〕로부터 온 편지는 평양부에서 영국 배가 침몰된 사실이 와전된 것을 근본을 잘 따져보지 못한데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영국, 프랑스 양국과 본래 교섭도 없었는데 어찌 화의를 잃을 수 있겠습니까? 통상과 선교의 문제는 나라의 법에 의하여 거절하였고, 선교사의 문제는 다른 나라의 나쁜 사람이 변복하고 사람들을 현혹시켰기 때문에 배척하고 제거한 것일 뿐입니다. … 이것은 곧 약탈을 일삼는 포악한 도적 무리와 한가지입니다. 통상이 과연 이와 같은 것입니까? 선교라는 것이 과연 이와 같은 것입니까? 116
 
우리는 위 보고서에서 2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제너럴 셔먼호 탑승객 가운데 2사람을 언급하면서 최난헌과 리바항을 언급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리바항을 덴마크 인이라고 기술한 점이다. 셋째, 제너럴 셔먼호 입국 목적이 통상과 선교였다고 밝히고 있는 점이다. 특히 세 번째는 불란서를 염두에 둔 언급이지만 제너널 셔먼호 관련하여 이를 언급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고종실록〉에 실린 제너럴 셔먼호 관련 기록의 문제
 
우리는 국내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면서 국내 사료들이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기술에서 일관성과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많은 오류들을 담고 있다. 〈고종실록〉에 실린 제너럴 셔먼호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서 이양선[제너럴 셔먼호]과 첫 문정을 기록한 1866년 음력 7월 15일자(첫 문정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됨) 내용부터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객관적인 기록이라기보다 보고자가 유리하도록 자의적으로 보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먼저 7월 8일[8월 17일] 제너럴 셔먼호를 문정하면서 배에 승선할 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쪽 사람들 수십 명(名)이 각기 총칼을 지니고서 뱃머리에 정렬해 선 다음 비로소 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 ”117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사람은 외국인 5명과 청국인과 말레이시아인 19명 등 전체 24명이다. 뱃머리에 정렬해 섰다는 것은 위협을 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국의 관리를 맞을 때 수행하는 일종의 사열의식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인다. 그 같은 해석적 여지는 외국과 통상을 금하고 국교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셔먼호 관계자들이 조선의 관료들과 첫 만남을 가지면서 일종의 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여기 〈고종실록〉에 있는 “그쪽 사람들 수십 명”이라는 내용은 정확한 기록이 아니다. 19명이 사열하고 5명이 그를 맞았다고 볼 때 문정관들이 위협감 속에서 수십 명으로 느껴졌는지 몰라도 수십 명이라고 상부에 보고한 것은 보고자가 제너럴 셔먼호가 상당한 세력을 가진 이양선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한 의도가 있다고 느껴진다. 사실 20명을 수십 명이라고 표현한 것은 분명히 과장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고종실록〉의 오류는 셔먼호 서양 승무원들의 수자와 국적이다.
 
“우리들은 서양의 세 나라 사람들입니다. 윗자리에 앉은 최난헌[崔蘭軒 : Thomas, Robert Jermain]와 호가스[何.特]이 다같이 영국 사람이며, 프레스톤[普來屯]은 미국 사람이며, 뻬지[巴使]는 덴마크 사람입니다. … 이른바 이팔행(李八行)과 조반량(趙半良)은 중국인들로서 영국인이 데려다가 자기 막료로 삼은 사람들이었으며 그 나머지 24명(名)은 혹 태국인이거나 광동(廣東) 상해현(上海縣) 사람들로서 길안내를 하거나 품팔이를 하거나 뱃사람 일을 하거나 하였는데, 모두가 종복이라고 하였습니다.”118
 
주지하듯이 제너럴 셔먼호에 탄 외국인은 미국과 영국 국적의 5명이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고종실록〉에는 외국인을 4명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들 4명의 외국인들의 국적도 미국 영국 덴마크 세 국가의 사람들로 기술하고 있다. 자신들이 미국과 영국 사람들이라고 국적을 분명히 밝혔을 텐데 왜 3개국으로 기술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분명히 〈고종실록〉에 서면으로 문정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말이다. 〈고종실록〉의 기록상의 오류 문제는 이것만 아니다. 〈고종실록〉 음력 7월 15일자에는 이팔행이 두 번이나 청국인이라고 기록했다가 음 11월 5일자 기록에서는 덴마크 인으로 기록되었다. 〈고종실록〉은 문정 첫날부터 기록상의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고종실록〉은 이들 서양인의 생김새를 기록하면서도 5명 중 4명만 언급하고 있다.
 
“최난헌은 나이가 36살, …그는 문직(文職)의 4품 관리로서 영국인이었습니다. 호가스는 나이가 37살, 키는 7척, …그는 무직(武職)의 1품 관리로서 영국인이었다. 프레스톤은 나이가 48살 …그는 무직(武職)의 1품 관리로 미국 사람이었습니다. 뻬지는 나이가 45살, …그는 덴마크 사람이었습니다.119 이팔행(李八行)의 나이는 30살이었고, 조반량(趙半良)의 나이는 28살이었는데, … 그들은 다 같이 청나라 사람이었습니다. 24명의 이름과 나이에 대하여 물어보니 토마스가 하인으로 범칭하면서 자세히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생김새와 옷차림, 머리칼과 수염은 모두 청나라 사람과 같은 모양이었습니다.”120
 
〈고종실록〉의 위 기록에서도 서양인으로는 4명만 기술하고 있고 이들 4명의 서양인들의 나이도 틀리다. 최난헌이 토마스와 동일 인물이라면 그의 나이는 입국할 때 27세였다.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36살로 보였는지 모르지만 보고와 문정은 대충 적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고종실록〉의 서양인들의 연령에 대한 기록도 신뢰하기 힘들다. 게다가 흥미로운 사실은 최난헌, 호가스, 프레스톤 모두 국가관리로 보고 무직, 문직으로 구분하고 직책서열까지 매겨 최난헌은 문직 4품으로, 호가스는 무직 1품으로, 프레스톤은 무직 1품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름대로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그렇게 기술한 것이다.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이들은 주지하듯이 관리들이 아닌 민간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공직에 해당하는 어떤 서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서양의 모든 기록도 프레스톤이 민간 상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들 다섯 명의 서양인들은 무직도 문직도 아니고 1품 관리도 4품 관리도 아니었다.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거짓으로 그렇게 밝혔을리 없다. 보고자가 “이양선”이 침략선이라는 의심을 하고 자의적으로 그렇게 평가를 내린 것이다. 보고의 생명은 객관성인데 〈고종실록〉은 보고자의 주관이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지금까지 〈고종실록〉에 있는 제너럴 셔먼호 관련 기록을 살펴보았듯이 몇 가지 점에서 제너럴 셔먼호의 실제 사실과 차이가 있다. 첫째,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전체 승선자들의 숫자가 다르다.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사람이 외국인 5명과 승무원 19명 등 전체 24명인데 고종실록은 외국인 4명, 이팔행과 조반량, 그리고 24명의 승무원 등 모두 3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너럴 셔먼호 출항 기록에 있는 탑승자들과 〈고종실록〉에 있는 셔먼호 탑승자 수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둘째는 외국인 4명의 국적도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24명 종복들의 국적도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는 미국과 영국 국적의 사람들인데 고종실록은 미국, 영국, 덴마크 3개국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21 셋째, 5명의 서양인들 외에도 일반 승객들의 국적과 숫자도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제너럴 셔먼호에는 서양인 5명 외에 청국인과 말레이시아인 합 19명이 승선했는데 이들 ‘하인’의 수를 24명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들의 국적도 중국 광동 사람과 태국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넷째, 게다가 4명의 외국인들에 대한 연령이 다르다.122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고종실록〉의 기록의 문제점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확실히 〈고종실록〉의 제너럴 셔먼호 관련 기록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고종실록〉의 셔먼호 관련 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기록의 부정확성은 국내 다른 관련 기록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종교의 〈대한계산사 권1〉에는 활자본에는 1866년 9월에 일어난 사건을 고종 5년 1868년으로 기술하고 있고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최난헌)도 프랑스 선교사로 기술하고 있다.123 동일한 문제가 구한말 매천 황현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매천야록〉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매천야록〉은 제너널 셔먼호 사건을 기술하면서 이 사건이 무진년(고종 5년, 1868)에 박규수가 평양감사로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무진년(고종 5. 1868) 박규수가 평안감사로 있을 때 미국인 최난헌이 군함 1척을 이끌고 밀물을 따라 대동강에 들어왔다가 조수로 밀려 나가나가자 움직이지 못했다. 박규수는 능히 그들을 체포할 수 있는 사람을 돈을 주고 구했는데, 한 교졸이 지원했다. 어호의 파피선 수백 척을 동원해서 섶 묶은 것을 가득 실어 불을 지르게 하고 또한 노수를 뽑아서 배에 주살을 매고 일제히 화살을 당겼다. 쇠뇌는 맹렬하고 배는 가벼운지라 미국 군함을 쉽게 위집하고 군함 안에 있는 인화물에 불이 붙어 군함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한명의 적이 불길 속에서 뛰어나오면서 나는 듯 개펄을 밟고 달아나므로 4,5차례 포를 쏘아서 쓰러뜨렸다. 이 일이 조정에 전해지자 박규수는 승자하고 그 교졸은 공을 높이 사 진장으로 삼았다.”124
 
여기 한 교졸이 박춘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고종실록〉은 그에게 “오위장”을 특전했는데 〈매천야록〉에는 “진장”을 삼았다고 말한다. 그는 평양지역 초기 신자 가운데 한명이었다.
무슨 기록이던 기록의 의도와 성격이 반영되게 마련이다. 〈고종실록〉은 보고의 생명인 객관성을 상실하고 보고자가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보고한 부분과 사실적 오류를 상당히 담고 있으며 〈고종실록〉 외 〈매천야록〉은 소문에 근거해서 기록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사건의 전후관계와 가장 기본적인 그 사건이 일어난 발생연도마저 틀리다. 그것도 실제 보다 2년이나 늦은 1868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25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고종실록〉과 기타 국내 자료들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다. <후반부에서 계속>
 
[후주]
 
1 한국 쪽 자료에 나타난 토마스의 이름은 최난헌(崔蘭軒)이다. E. M. Cable, “The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XXVIII (1938): 11-13을 보라. 오문환은 자신의 〈도마스 목사전〉에서 토마스 선교사가 마지막 순간까지 성경을 반포하다 순교했다고 기록했다. 吳文煥, 토마스 牧師傳(평양: 토마스 목사기념사업회, 1928), 58-59. “이를 본 도마스 牧師는 殘餘의 聖經과 傳道書類를 힘이 밋는데 ᄭᅡ지는 全部 傳播코저 努力하엿스나 그만 다 맛초지 못하고 火焰에 ᄶᅩᆺ기여 나리게 되엿다. 나려가면 軍人의게 被殺될 것은 事實인데 最後로 自己의 生命을 빼앗는 軍人의게ᄭᅡ지도 福音을 傳하리라 하고 一券의 聖經을 手中에 잡은 後 배에서 나려 언덕으로 나아가니 企待리고 잇든 軍人은 어느 듯 달녀든다. 임의 朝鮮으로 ᄯᅥ날 때부터 豫測하고 決心한 것이 매 무삼 意外의 일이 되며 무삼 무서움이 잇섯스랴! 도로혀 仁慈한 態度로 죽이려는 軍人의게 聖經 밧기를 勸하매 某軍人도 赤是人이 잇는지라. 들엇든 칼을 暫間 멈추엇다. 그 동안 도마스 牧師는 두 무릅을 沙場에 ᄭᅮᆯ고 머리를 숙여 ᄯᅡᆼ에 대인 後 얼마 동안 最後의 祈禱를 올니고 다시 니러나서 軍人의게 聖經밧기를 勸하엿스나 某軍人은 그의 말을 充分히 理解치 못하엿슬거도 事實이려니와 環境이 그것을 許諾지 안는지라. 맛침내 칼을 그 가삼에 대여 하나님의 忠僕 도마스 牧師의 貴여운 生命을 빼앗고 말엇다. … 이 얼마나 의로운 죽엄이며 이 얼마나 고상한 최후이엿는가! … 이것이 복음의 위대한 힘이 아니며 복음을 전하는 사자의 타인과 상이한 점이 아닌가! 순교자의 혈이 교회의 종자라는 말과 갓치 복음을 위하야 흘닌 도마스 목사의 순교한 혈이 멀지 안은 장래에 다시 소래를 칠날이 잇슬 것은 의심업는 바이다.”
2 고종실록 3권 음 7월 27일. “평양부에 와서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에서 더욱 미쳐 날뛰면서 포를 쏘고 총을 쏘아대어 우리 쪽 사람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들을 제압하고 이기는 방책으로는 화공 전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일제히 불을 질러서 그 불길이 저 들의 배에 번져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쪽 사람들인 토마스〔崔蘭軒 : Thomas, Robert Jermain〕와 조능봉(趙凌奉)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비로소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므로 즉시 사로잡아 묶어서 강안으로 데려왔습니다. 이것을 본 군민(軍民)들이 울분을 참지 못해 일제히 모여들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도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3 F. E. Hamilton이 1927년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 Korea Mission Field(September 1927), 181-185.
4 제임스 게일은 당시 증언자의 증언을 빌려 1895년 Korean Repository에 “제너럴 셔몬호의 운명:(The Fate of the General Sherman”이라는 논고를 발표했다. James S. Gale, “The Ftae of the General Sherman,” Korea Repository (June 1895), 252-254.
5 Samuel A. Moffett, “Evangelicstic Works,” Quarto Centennial Papers Read Before The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in the U.S.A. at The Annual Meeting in Pyeng Yang, Aug. 27, 1909 in Annual Reports and Personal Reports of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CUSA. 1890-1910, 14. “한국에 들어온 첫 개신교 선교사는 1865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권서인으로 한 중국 정크선을 타고 황해지역 연안을 따라 중국어 성경을 반포했으며 1866년에는 런던선교회와 연결하여 한문 성경을 가지고 “제너럴 셔먼호”로 평양에 왔다. 그는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과 함께 난자당했으며 평양 도시 바로 아래 강 뚝에서 불태워졌으며 죽을 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들을 반포했다.” 작가는 이들 책들을 받은 이들 가운데 얼마를 만났으며, 초기 학습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부친이 여러해동안 자신의 집에서 이들 성경책들 가운데 한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하나가 있었다.”
6 Samuel A. Moffett, “Early Days in Pyengyan,” The Korea Mission Field(March 1925): 54.
7 언더우드는 한국에 선교사로 내정된 뒤 런던선교회를 방문해 그곳에서 토마스가 한국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 이미 한국 입국 전부터 알고 있었다. Lillias Horton Underwood,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언더우드, Underwood of Korea(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0), 46. 기포드도 이 사건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Daniel L. Gifford, Every-Day Life in Korea(New York: Fleming H. Revell, 1898), 42.
8 H. G. Appenzeller, “The Opening of Korea: Admiral Schufeldt’s Account of It,” The Korea Repository(Feb., 1892): 57-62.
9 존스, 한국교회 형성사, 옥성득 역 (홍성사 2013), 180-181.
10 강규찬, 김선두, 변인서, 평양노회지경각교회사기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3), 19.
11 어떤 학자는 최근 한 글에서 토마스의 죽음을 아프카니스탄 사태에 비유하면서 “1905년 이전 한국이나 중국에서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본 선교사는 없었다”고 말하면서 마치 토마스 죽음이 훗날 순교로 둔갑한 것처럼 주장한다. 이것은 보통 비약이 아니다. 1905년 이전에는 한국교회사를 순교라고 한 자료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선교역사를 정리한 책도 거의 없다. 복음이 전해지고 불과 20년의 역사를 지닌 개신교 역사를 기독교 시각을 가지고 정리할 시기도 아닌 그 때를 기준으로 “순교” 기록이 없으니 순교가 아니다는 주장은 지극히 자의적인 해석이다.
12 한규무,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문제 검토」, 『한국기독교와 역사』 8,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13 吳文煥, 토마스 牧師傳 (평양: 토마스 목사 기념사업회, 1928). 1926년부터 〈동아일보〉에 토마스와 관련된 많은 기록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순교자추도 재경각교파가 토마쓰씨를추도해.” 〈동아일보〉 (1926.10.20.) 5면.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hn (2016. 7.26. 접근); “대영성서공회 삼대기념축하식.” 〈동아일보〉 (1926.11.12) 2면.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 naver. com/search/searchByDate.nhn (2016. 7.26. 접근); “최후의 일각까지 신교전도에정셩을밧친 『도마쓰』목사순교전말.” 〈동아일보〉 (1926.11.14.) 2면.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 naver. com/search/searchByDate.nhn (2016. 7.26. 접근); “순교적정신.” 〈동아일보〉 (1926.11.15.) 1면.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hn (2016. 7.26. 접근); “순교자추도회 오는사일에.” 〈동아일보〉 (1927.5.2.) 2면.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 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hn (2016. 7.26. 접근); “『도마쓰』추도식.” 〈동아일보〉 (1927.5.11.) 5면.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naver.com/ search/search By Date.nhn (2016. 7.26. 접근); “『도』씨순교강담.” 〈동아일보〉 (1930.9.3.) 3면.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hn (2016. 7.26. 접근); “순교의꼿 도마스기념예배당 『봉래도』에건축.” 〈동아일보〉 (1932.9.9.) 3면.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 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hn (2016. 7.26. 접근); “순교의 씨 금일에 결실.” 〈동아일보〉 (1932.9.16.) 3면.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naver.com/ search/ search ByDate.nhn (2016. 7.26. 접근); “순사한도마쓰목사의 기념도서관을설립.” 〈동아일보〉 (1934.1.13.) 석간 3면.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naver.com/search/ searchByDate.nhn (2016. 7.26. 접근); “야소교장로회서도 선교오십년기념.” 〈동아일보〉 (1934.6.20.) 조간 2면.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naver.com/ search/searchByDate.nhn (2016. 7.26. 접근); “조선장로교회의금석 가경할오십년발달사 (중).” 〈동아일보〉 (1934.6.28.) 조간 3면.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hn (2016. 7.26. 접근); “『도마스』순교칠십주 오대기념사업계획.” 〈동아일보〉 (1934.9.23.) 석간 3면.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 newslibrary.naver.com/search/ searchBy-Date.nhn(2016. 7.26. 접근).
14 Rhodes, Harry A. ed.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Vol. I 1884-1934 (Seoul: Chosen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1934), 3, 70-73.
15 명신홍,“토마스(R. Thomas) 목사의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신학지남 33: 4 (1966. 12), 1.
16 한규무,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문제 검토」, 『한국기독교와 역사』 8,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17 F. E. Hamilton이 1927년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 Korea Mission Field(September 1927): 181-185.
18 吳文煥, 토마스 牧師傳 (평양: 토마스 목사 기념사업회, 1928). 오문환은 이 책이 나오기 2년 전 작은 소책자 오문환, 〈조선기독교회사의 일대 분수령인 평양양란〉(평양: 숭의여학교, 1926)을 출간했다. 채필근이 소책자의 서문을 썼다. 10면과 18면 두 면이 일제 검열에 의해 강제 삭제되어 출간되었다. 일제는 이 책자가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문환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간행 목적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 평양양란에서 도마스 목사가 순교하얏슴. 2. 도마스 목사는 장로회 목사로 신기독교조선선교의 선봉자이엿난대 조선신기독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시조임. 3. 명년(1926)은 도마스 목사의 순교 제 60년 즉 회갑년에 해당함. 4. 제역사에 평양양란의 연대가 오기되얏슴. 고로 본서를 발간하야 도마스 목사의 순교를 기념하며 동시에 오기된 년대를 정정코져합니다.” 또 머리말에는 평양양란 60주년이 되는 음 7월 24일에 발행하기 위해 서둘렀다는 기록도 나온다. 오문환은 제너널셔먼호 사건을 “평양양란”으로 일관되게 기술했고, 토마스가 순교한 날을 음력 1866년 7월 24일로 본 것이다. 오문환은 이 책 앞부분에 “평양양란전적지”를 상세하게 그린 그림을 삽입시켰다.
19 吳文煥, 토마스 牧師傳 (평양: 토마스 목사 기념사업회, 1928), 97-123.
20 E. M. Cable, “United Satets-Korean Relations 1866-1871,” 1-62.
21 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 하 (서울: 가톨릭출파사, 1962), 108-116.
22 고무송,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 (서울: 쿰란출판사, 2001)
23 유해석, 〈도마스 목사전〉(서울: 생명의말씀사, 2006). 유해석의 〈도마스 목사전〉은 출처가 생략되어 있어 연구 문헌적 가치는 높지 않다.
24 이만열, 한국기독교회 100년사 (서울: 성경읽기사, 1985), 36
25 이만열 한국기독교사특강 (서울: 성경읽기사, 1985), 36.
26 이만열, 한국기독교사특강, 83. 이만열 교수의 영향인지 몰라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공동 간행한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I〉, 137에는 토마스를 가리켜 “한국개신교사에서 첫 순교의 영광된 자리를 차지하게 된 토마스 목사”라고 분명히 기록했었다가 최근 개정판에서는 “한국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진 토마스”로 수정했다. 토마스를 더 이상 순교자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개정판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I〉, 141.
27 한규무, “토마스(R. J. Thomas) 목사의 ‘순교’ 과정에 대한 사료 검토” 1995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23회 연구모임 자료발표
28 한규무,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문제 검토」, 『한국기독교와 역사』 8,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29 한규무,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 문제 검토,” 1-21.
30 옥성득, “토마스 목사의 죽음은 순교인가”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2421
31 옥성득, ““토마스 목사의 죽음은 순교인가”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2421
32 지금까지의 연구 동향은 상호 약간의 시각의 차이는 있지만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순교라고 이해하는데는 이의가 없었다. 그러다 1980년 이후 그의 죽음을 순교로 평가할 수 없다는 주장이 이만열 교수에 의해 제기된 후 최근 옥성득, 한규무를 비롯한 진보주의 학자들이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토마스를 선교사로 평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입국 동기나 행적 모두를 고려할 때도 그를 순교자로 평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토마스의 죽음이 순교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는 제너럴 셔먼호의 입국과 행적을 기록한 일성록과 고종실록 3권의 내용을 그 주된 근거로 삼고 있다. 이들은 토마스의 순교 스토리는 오문환의 〈토마스 목사 전〉에 근거하고 있으나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많다고 보고 있다. 오문환의 기록이 증언에 기초했다고 하지만 사실(fact)이 아닌 각색된 역사(myth)가 많고, 실제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주장이 모순이 많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이다. 고종실록의 기록을 믿을 수 있는 기록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오문환의 글은 토마스의 순교를 미화하는 목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기록의 정확도에 있어서 신뢰하기 힘들다는 전제가 잠재되어 있다.
33 옥성득, “토마스 목사의 죽음은 순교인가”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2421
34 민경배, “로버트 토마스: 한국초기 선교사의 한 유형과 동서교섭의 문제,” 교회와 민족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51.
35 W. R. Charles는 토마스를 영국 국교회 선교사로 언급하고 있다. W. R. Charles, Life in Corea (New York : Macmillan and Co., 1888), 162; Rhodes, ed.,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CUSA, Vol. I. 1884-1934, 71.
36 The Missionary Magazine and Chronicle, for July, 1864, Vol. 28, 220-221.
37 Letters of Rev. R. J. Thomas, Livingstone House Library, Central China Letters, A. 2.3(April 15, 1864). 閔庚培, “로버트 토마스: 한국초기 선교사의 한 유형과 동서교섭의 문제,” 52-53에서 재인용. “내가 영국을 떠날 때에는 여기서 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 달 [3월] 2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써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38 Kenneth S. Latourette, A 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Vol. 6, The Great Century : North Africa and Asia A.D. 1800 to 1914 A.D.(Grand Rapids : Zondervan, 1978), 20.
39 Latourette, A 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Vol. 6, 419-420.
40 백낙준, 韓國改新敎史, 46. Cf. Annual Report of 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for 1865, 35-37.
41 백낙준 오문환은 한글판에는 “종전부터 알든 중국인 수부”라고 기록하였고, 영문에는 유웬태(Yu Wen Tai)라고 이름을 밝혔다.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41, 105.
42 Thomas’ Letter to Dr. Tidman, Jan. 12, 1866. Cf. The Missionary Magazine and Chronicle for July, 1866, 200-201.
43 George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 1832-1910(Pyeng Yang : Union Christian College Press., 1929), 44.
44 Thomas’ Letter to Dr. Tidman, Jan. 12, 1866. Cf. The Missionary Magazine and Chronicle for July, 1866, 200-201.
45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28.
46 오문환에 의하면 동지사 일행이 이 즈음 북경에 왔을 때 토마스는 그 가운데 한 명인 박규수를 만나 성경을 전해주었고 그 성경은 김옥균에게 다시 김홍집에게 전달되었다. 오문환은 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오문환은 1866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보고서에 이 사실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옥성득은 이 기간 박규수는 북경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달리 옥성득은 박규수가 이 기간에 북경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옥성득, “토마스 목사의 죽음은 순교인가”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2421.
47 Thomas’ Letter, 1866년 4월 4일자. L.H.L., B.5.1 ; 閔庚培, “로버트 토마스,” 61에서 재인용.
48 고무송,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 177. 처음 주저하던 런던선교회는 그가 너무도 간절히 선교사 재임명을 청원하자 그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49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 1832∼1910, 44.
50 이에 대해 민경배 교수는 상해의 개신교 선교사들도 개신교 선교사들이 다른 나라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꺼려했다고 말한다.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 143. Cf. The Annual Report of 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Glasgow, for the Year of1866, 41.
51 그리피스는 토마스가 “한국어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한 사람의 승객”(as a passenger to improve his knowledge of the language)으로 배에 승선했다고 주장한다.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391-392. 셔먼호의 입국은 일반적으로 통상으로 알려졌으나 그리피스는 중국인들 사이에 평양에 있는 한 조선왕의 무덤의 관이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는데 셔먼호의 입국이 이와 모종의 관계를 갖고 있지 않는가 보았다.
52 W. R. Charles, Life in Corea(New York : Macmillan and Co., 1888), 6.
53 John W. Foster, American Diplomacy in the Orient(Boston and New York : Houghton, Mifflin and Co., 1904), 310.
54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38.
55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391.
56 백인 다섯 명을 국적별로 살펴보면 프레스톤, 페이지, 윌슨 세 명은 미국인이고 두 명, 호가스와 토마스는 영국인이었다.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39; Griffis, Corea : The Hermit Nation, 391; Cable, “The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 8-9 ; Rhodes, ed.,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CUSA, Vol. I. 1884∼1934, 72.
57 고종실록 3권 음 1866년 7월 15일
58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37.
59 고무송,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 182.
60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392.
61 E. M. Cable, “The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 9.
62 韓沋劤, 〈韓國通史〉 (서울: 을유문화사, 1994). 385. “같은 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지방 관헌의 제지를 무릅쓰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까지 이르러 굳이 통상을 요구해 왔다.”
63 〈고종실록〉 3권 7월 18일.
64 Anson Sanford, Letter to Mr. Burlingame, October 30, 1866. “제너럴 셔먼호가 8월 9일 여기[지푸]를 떠났으며 물을 요청했고, 화물관리인 조지 호가스(영국인), 통역으로 토마스 목사(영국인)을, 그리고 소유주 W. B. 프레스턴(미국인) 또한 그들-선장 페이지,-선장 윌슨 (모두 미국인)과 함께 떠났다.”최근 서요한도 토마스가 통역으로 제너럴셔먼호에 승선했다고 본다. 서요한, “순교자 로버트 J. 토마스 목사의 역사적 의의,” 신학지남 (2013. 12), 220.
65 고종실록, 1866년 음 7월 15일.
66 Messrs, Meadows & Co, to Mr. Burlingame, October 27, 1866. 메도우 회사는 벌링게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국어 지식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한국을 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소원을 피력해왔던 토마스가 선객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67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41.
68 Cable, “The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 10.
69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391.
70 M, DE Bellonet Letter to the Prince Kung, July 13, 1866.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377-378에서 재인용.
71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360.
72 반면 고무송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 부분을 상술하려고 노력했다. 고무송,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 256-282.
73 이런 이유 때문에 토마스는 자신의 가까운 친구 Madame Morache에게도 자신이 어떤 배를 타고 조선에 입국할 것인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You’ll excuse me if I don’t tell you by what ship I am sailing.” RobertJermainThomas.com
74 J. Mullens’ Letter to R. Thomas, 1866년 12월 10일. Outgoing Letters, China, BK. 6. 305.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 143에서 재인용.
75 이 기간의 셔먼호 내한 일정을 재구성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이 기간의 제너럴 셔먼호의 행적에 대해서는 고종실록과 오문환의 기록이 거의 유일한데 둘의 기록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전체적인 일정의 재구성을 위해 고종실록의 기록을 기준으로 하고, 선교와 관련하여서는 오문환의 기록을 기준으로 하여 재구성한 후에 비교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비교 과정을 통해서 고종실록의 기록과 오문환의 기록의 상이점과 상호 문제점들을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76 일성록과 고종실록은 내용에서 거의 유사하다. 고종실록 처럼 일성록도 음력 1866년 7월 15일, 18일, 22일, 25일, 27일, 8월 8일, 그리고 11월 5일자에 제너럴셔먼호 관련 기록을 담고 있다.
77 24명이 공식적인 기록이다. Visit of Commander Shufelt in the United States steamer Wachusett to Chifu and Corea. United States FlagpShip Hartford, Hong Kong, China, February 16, 1867; United States Steamer Wachusett, January 30, 1867. 여기서는 27명이라고 기록되었다.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수에 대해서는 메도우 회사는 24명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다른 기록에는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15명에서 20명이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78 8월 9일 제너럴 셔먼호가 지푸를 출발한 것에 대해서는 오문환의 기록과 토마스 일행이 문정관에게 밝힌 고종실록에 나타난 기록과 일치한다.
79 민경배, “로버트 토마스,” 교회와 민족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63. 7월 7일에 용강현 다미면 상칠리 주영포에 나타났다는 기록은 일성록에 있다. Cable, “The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 1866-1871,” 12.
80 고종실록 3권 7월 15일.
81 고종실록에는 작은 배를 타고 다섯명이 늘 단체 행동을 했던 것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를 고려할 때 서양인이 외관상으로도 눈에 확 띨 정도로 구분이 될텐데도 고종실록에는 4명만 언급되고 있다.
82 왜 기록에 차이가 있을까? 제너럴 셔먼호 탑승자들이 거짓말로 국적을 말했을 가능성과 통역이 잘못 통역했을 가능성, 그리고 조선의 문정관이 잘못 전해 듣고 적었을 가능성 모두가 가능할 것이다. 만약 셔먼호가 거짓말을 했다면 굳이 페이지를 덴마크 국적으로 언급할 특별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83 고종실록 3권 7월 15일.
84 그러나 11월 5일자 고종실록에는 이팔행이 덴마크 인이라고 국적을 기록하고 잇다.
85 고종실록 3권 7월 15일.
86 柳洪烈, 韓國天主敎會史, 690.
87 고종실록 3권 음 7월 15일
88 고종실록 3권 음 7월 15일
89 고종실록 3권 7월 15일.
90 좌우 두켠에 각각 대포 1문씩 설치되었다는 것이 좌우 1문씩 전체 2문이 있다는 것인지, 각각 두켠씩 좌우 총 4문의 대포가 있다는 것인지 불확실하지만 아마도 후자가 아닌가 여겨진다.
91 고종실록 3권 7월 18일.
92 이날 제너럴 셔먼호는 문정관에게 “황주(黃州)에서 얻은 식량과 찬거리로 겨우 며칠간 살았으니, 쌀과 고기, 계란(鷄卵)과 시목(柴木) 등을 도와주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는 도리로서는 냉담하게 대할 수가 없어서 쌀과 고기 등의 물건들을 공급해 주었다.”
93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18일.
94 고종실록 3권 음 7월 18일
95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46-50.
96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2일
97 오문환은 黃江亭에 셔먼호가 도달한 것은 음력 7월 16일이며 이 때부터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오문환, 〈조선기독교회사 일대 분수령이 된 평양양란〉, 20-21.
98 옥성득, “토마스 목사의 죽음은 순교인가,” 뉴스엔조이 2016년 3월 16일. 최근 옥성득은 “토마스 목사의 죽음은 순교인가”라는 논고에서 박춘권이 이익현을 구해낸 사건의 시점과 제너럴 셔먼호가 소실되는 시점을 혼돈하고 있는데 고종실록에도 두 사건의 날자가 다르다. 고종실록은 박춘권이 중군을 구해낸 사건은 음력 7월 19일이고 셔먼호가 소실된 날은 음력 7월 27일, 양력 9월 5일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옥성득은 제너럴 셔먼호가 소실된 날짜가 9월 2일이라고 주장한다.
99 Gale, “The Fate of the General Sherman,” 253.
100 김양선, 한국교회사연구, 1971, 45.
101 Floyd E. Hamilton,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 183.
102 통문관지 3권, 2469;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120. 사무엘 마펫(Samuel H. Moffett)도 이를 지지한다. Samuel H. Moffett,“The General Sherman Mystery, Thomas’ Second Trip to Korea,” The Korean Herald, May 6, 1973.
103 오문환, 〈조선기독교회사 일대 분수령인 평양양란〉, 21. 여기서 오문환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군에서도 中軍柀中이 念慮가 되기는 되엿다. 故로 府校 朴春權은 書를 作하야 緊封한 後 扁丹를 頭에 乘하고 敵船에 來하야 그것을 投入하매 그것이 무엇인지 보노라고 船員多數가 船頭에 會集하엿다. 比를 機會로 삼아 박춘권은 中軍의게 暗號하야 中軍을 丹中에 超下케 한 後 我軍을 向하야 渡來하엿다.”
104 〈고종실록〉 3권 음 7월 22일
105 Gale, 253,
106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5일
107 John Ross, 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 with Description of Manners and Customs, Language and Geography(London: Paisley: J. And R. Parlane, 1879), 294.
108 강규찬, 김선두, 변인서, 평양노회지경각교회사기, 19.
109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392
110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7일
111 E. M. Cable, 25.
112 그제야 온 성안의 소요가 비로소 진정될 수 있습니다. 겸 중군(兼中軍)인 철산 부사(鐵山府使) 백낙연(白樂淵)과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은 직접 총포탄이 쏟아지고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싸움으로써 결국 적들을 소멸시켰으니 모두 그들의 공로라고 할만 합니다. 포상(褒賞)의 특전을 베풀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처음에는 이양선(異樣船)이 경내에 침입하였을 때 이미 방어를 잘하지 못하여 심지어 부장(副將)까지 잡혀가 억류당 하는 수치를 당하게 한 데다 끝에 가서는 서로 싸우고 죽이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는 전하께서 멀리 있는 나라의 사람 들을 너그럽게 대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은 황공하기 그지없어 대죄(待罪)할 뿐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평안도로 말하면 기자(箕子)의 옛 도읍지로써 《범금팔조(犯禁八條)》를 대대로 계승해오고 충성과 의리를 서로 권면 하는 곳이라 조정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다른 도보다 특별하게 대해 왔다. 이번에 서양의 추악한 무리들이 대동강(大洞江)에 몰래 침입하여 부장(副將)을 잡아다가 억류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였다. 못된 놈들이 사납게 날뛰는 것에 본래 피 흘리며 싸움할 것까지는 못되지만 대체로 그들이 죄악을 쌓은 것이 이미 오래되어 스스로 천벌을 받을 죄를 지었다.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은 기율(紀律)을 철저히 세워서 제때에 적들을 제압하여 이미 온전하게 공을 세웠고 군사들 과 장교들, 아전(衙前)들과 백성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용감하게 나아가 적들을 남김없이 섬멸하였으니, 이는 충성심 과 의분에 격동된 것이므로 그 기개와 의리가 아주 가상히 여길 만하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고, 겸 중군(兼中軍)인 철산 부사(鐵山府使) 백낙연(白樂淵)에게 가자하고 영장(營將)의 이력을 허용하도록 하라. 그리고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은 맡은 벼슬에 한번 더 연임하도록 하라. 그리고 감사(監司)와 중군(中軍), 서윤(庶尹)에게는 새서(璽書)와 표리(表裏)를 주는 특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전 중군 이현익(李玄益)에게는 이미 책임을 물을 일이 있다 하더라도 수고롭게 뛰어다니며 일한 공로가 없지 않으니 변지(邊地)에서의 이력을 허용하도록 하라. 그 외 교리(校吏)들에 대해서는 본 감영에서 후하게 시상하고, 공곡(公穀) 도 회감(會減)하도록 하라. 감사는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113 고종실록 3권 7월 18일
114 고종실록 3권 7월 18일
115 최난헌이 이 질문을 했고 야소교에 대한 설명을 했다고 고종실록이 기록하고 있다면 최난헌은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사람들 다섯 명 가운데 한명이 분명하다. 그리고 고종실록에 최난헌이 배에 승선한 서양인이라고 인상착의까지 기록하고 있다. 그는 영국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다. 영국 사람으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고 종교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았다면 그렇다면 최난헌은 누구인가? 영국인이고, 한국어를 구사하고 중국어를 잘하며, 야소교가 무엇인지를 한국적 상황에서 매우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고, 한국에서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파할 수 있는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외국인은 토마스 선교사 밖에 없다.
116 고종실록 3권 11월 5일
117 고종실록 3권 7월 15일.
118 고종실록 3권 7월 15일.
119 뻬지를 계속해 덴마크 국적의 사람들로 기술하고 있다.
120 고종실록 3권 7월 15일.
121 제너럴 셔먼호가 무게감을 더하기 위해 범국가적인 상선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면 모르지만 분명 미국과 영국 2개국 사람들인데 왜 3개국으로 고종실록이 기록하고 있는지 풀어야 할 것이다. 고종실록은 페이지를 덴마크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가 미국 사람이 아니라 덴마크 사람이라는 기록은 서양기록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122 통역관이 잘못 기재를 했는지, 거짓으로 나이를 속여서 전했는지, 또 자신들이 나름대로 판단해서 추측해서 기록했는지 모르지만 확실히 틀리다. 그것은 적어도 토마스의 실제 나이가 27세인데 36세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기록상의 오류를 잘 파악하고 있던 오문환이 이 때문에 〈고종실록〉에 실린 셔먼호 제 기록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인 아닌지 여겨진다.
123 정교, 대한계산사 권1, 변주승 역주, 서울: 소명출판, 2004), 62-63.“1868년 가을 미국인이 평양을 침범하다. ”이 때 미국 배 한 척이 대동강으로 곧 바로 들어왔다가 강물이 줄어들자 얕은 여울에 좌초했다. 평양감사 박규수가 군사들에게 습격토록 명령하여 그 배를 불질러 버렸다. 어떤 이들은 프랑스 선교사 토마스(최난헌)오 조준봉도 그 배안에 있다가 역시 피살되었다고 말한다.“
124 매천야록, 118.
125 오문환은 국내 자료의 연대가 오기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문환, 〈조선기독교회사와 일대분수령인 평양양란〉, 17-20. “비 平壤洋亂을 實際로 觀光한 老人 중 아직 生存한 이가 平壤附近에 多하며 自古及令에 平壤셔 起한 事實을 詳記한 歷史인 合 8권의 平壤誌에 其 事實及年代가 明確히 記載되여잇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오문환이 자신의 저술을 〈평양지〉와 증인들의 증언을 참고하여 기술했음을 강하게 암시해주고 있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17.12.1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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